" 어느날 게이트를 공략하기 위해 대구에 들린 적 있어. 그곳의 게이트는 언데드가 컨셉이었던 모양인데 파티에 위관급 가디언 셋이 포함되어선 생각 이상으로 게이트를 빠르게 공략해나갔지. 그러다가 게이트의 보스를 마주하게 되었는데 보스가 좀비였던 거 있지? 좀비가 왕관을 쓴 채로 근엄하게 왕좌에 앉아있는 거야. 그 장면을 보곤 웃음이 나와서 경배하듯 손을 들어올리고 말했지.
흔히 창을 쓰다 보면 어디서 배웠냐는 말을 듣곤 했다. 일반적인 린나찰에서 벗어나 곡선을 다루는 법, 창대를 움직이는 법, 창날을 통해 상대에게 휘두르는 법. 그것들이 일반적인 헌터들과 다르다며 아는 척을 해오는 것이다. 가문을 벗어나고 삼 년, 처음에는 하나하나 받아주던 지한의 입에서 서산 신가가 나올 때마다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 사람들이 나타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대부분은 서산 신가라는 이름에 주목하고, 그 다음으론 자신들이 볼 수 있는 이득에 대해 생각한다. 열일곱, 가문을 벗어나 꿈을 펼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소녀가 망가지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소녀는 지루하다는 듯 한 손으로 창을 늘여 잡았다. 창날이 바닥을 향하고, 순식간에 창을 말아올려 회전으로 다가오는 몬스터의 가슴께를 꿰뚫은 것이다. 그륵거리는 숨을 토해내던 몬스터의 입에서 정체 모를 무언가가 터져나오고 곧 몸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며 소녀는 조용하게, 그러나 입꼬리를 살짝 올린 채 물은 사람을 바라봤다.
"알아도 괜찮겠어요? 뒷감당은 가능하겠고?"
음산한 듯 보이는 미소에 남자는 혼신을 다해 말을 더듬었다. 당황해선 어떻게든 벗어나려 하는 폼이 꽤 우스워서 소녀는 웃음을 터트리며 창을 어깨에 걸었다. 농담이예요. 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남자는 불안한 표정을 내려둔 채 안도의 미소를 지은 듯 보였다.
"아가씨. 성격 세네?" "이해 좀 해줘요. 애초에 이 나이에 헌터짓 하려면 성질머리 개 더러워야 살 수 있는 거. 알잖아요?"
잡아먹지 않으면 잡아먹힌다. 결국 헌터 역시 피라미드 형태의 삶을 살아가고 있노라며, 지한은 자신에게 주절대던 한 어른을 기억해냈다. 걸친 창을 팔에 끼운 채 지한은 살짝 고갤 기울였다.
"자. 더 늦기 전에 공략이나 마치자고요. 며칠간 게이트에서 먼지 뒤집어 썼더니. 목이 따가워서 돌겠거든요." "어, 어.. 그래.."
결국 저자세로 물러난 헌터를 보면서도, 지한에게 별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이 곳은 예절과 정신으로 중요한 '가문'도 아니었고, 자신에게 뭐라 할 상급자가 있는 '길드'도 아니었다. 실력과 능력. 두 가지로만 평가되는 게이트에선 이런 모습은 당연한 거였다. 실력 좋은 각성자와 함께하는 게이트는 안정적이며, 위험하지 않으니까. 그런 면에서 지한은 자신의 성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실력을 믿고 갑질을 해대는 헌터들도 있는 이 업계에서, 자신 정도면 말이 조금 음산할 뿐. 실력은 볼 만 했으니 말이다. 그런 생각으로 키득거리던 지한의 감각에 무언가가 걸렸다. 순식간에 창대를 길게 잡고 창을 들어올린 지한에 의해 사람들은 진로를 방해받아 놀란 듯 했다.
"아저씨. 이 게이트 등급. 소형 아니었어요?" "어..어. 맞아. UHN에서 그렇다고 했는데.."
목을 긁어대며 깩깩거리는 사후아긴 무리를 보면서 지한은 창대에 더 힘을 가했다.
"이상하네. 요즘 소형에선 정예급 사후아긴 부대가 나오나?" "사, 사후아긴.."
게이트를 포기해야 하나? 안절부절대는 남자를 한심하단 듯 바라보던 지한은 일행 중 한 사람을 바라봤다. 아까부터 입을 꾹 닿은 채 짐을 옮기기만 하던 남자에게 천천히 다가가선 꾹 눌러 쓴 후드의 옆으로 스며들 법한 목소리를 냈다.
지한의 장난스런 목소리에 남자는 한숨을 쉬곤 후드를 벗었다. 황갈색의 머리카락과 멋을 내려는 듯, 굴절따윈 조금도 없는 안경을 쓴 남자는 웃고 있었다.
"근데. 나 칼잡인데." "예비용 칼이라도 써야죠. 그쪽. 실력은 꽤 되잖아요?" "하..피 묻으면 이 지적인 분위기가 살벌해진단 말이지."
실없는 농담을 던지던 남자가 의념을 끌어올리는 모습을 보며 지한은 가볍게 고갤 끄덕였다. 오히려 이런 쪽이 상대하기 편했다. 적당한 정의감, 미미한 광기. 그런 이들은 조금만 부추기면 이처럼.. 간단히 폭주하기 마련이었으니까.
"나는 상대하기 싫었어."
그런 말을 하면서도 태호는 손을 뻗어낸 채 사후아긴의 방패를 후려쳤다. 방패에 보기 좋은 일그러짐이 생기고 사후아긴이 그 힘에 튕겨나자 지한은 창대를 늘여 사후아긴의 손목을 후려쳤다. 손목이 어그러지는 듯한 고통에 무기를 던진 채, 손목을 쥔 순간. 결과는 당연했다.
"왜냐면 오늘은 얌전히 돈만 벌고 가려고 했거든." "의외네요? 그러기에는, 눈은 웃고 있는데?" "내가 좀 웃는 상이야. 보기 좋잖아?"
콰직, 카드드드득. 갑옷을 베었다는 말이 옳은가? 그런 것은 알 수 없었다. 단지 말 그대로 태호는 검을 통해 사후아긴을 갑옷 채로 베었을 뿐이다. 반으로 토막나 쓰러진 사후아긴의 시체를 멀리 던져버리며 태호와 지한은 각자의 무력을 원없이 발휘하기 시작했다. 지한은 창을 쥔 채로 적에게 찔러넣으며 자신의 의념을 끌어올렸다. 의지는 창에 깃들어, 자한의 의념을 표현했다. 그 표현에는 '정지'라는 힘이 담겨 있었다. 끼기긱, 기긱. 강한 힘을 허공에 고정한 채. 지한은 사후아긴의 앞에 도달했을 때. 정지되었던 힘을 풀어냈다. 순간적인 가속과 함께 사후아긴의 머리를 그대로 꿰뚫은 창과 함께 말이다. 상황은 빠르게 정리되어갔다. 애초에 중형 길드의 행동대장급 전력인 두 사람이 나선 순간, 소형 변칙 수준의 사후아긴 부대가 견딜 수 없었다. 바닥에 철퍽이는 피를 밟으며 지한은 기분 나쁜 표정으로 태호를 바라봤다.
"땀냄새에 피냄새. 완전 최악인데?" "그런 것 치곤 꽤 즐거우신 모양인데 말이지."
태호는 자신의 머릴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 놈들. 전부 머리만 당했잖아." "갑옷을 입고 있으니까." "그것 치곤 무언가에 원한 들린 듯이 머릴 뚫어놨는데?"
특유의 장난기를 참지 못하고, 쓸데없는 장난을 던지는 태호에게 지한은 가벼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아마 이쪽 세계관은.. 성현의 미래에 살짝 언급된 또다른 특별반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여기서 지한의 성격은 지금의 아버지나 어머니가 아니라 두 분이 모두 돌아가신 직후, 사촌에게 맡겨져 자랐을 경우의 성격입니다. 할아버지가 맡지 않은 세계관의 지한이라고 보면 되겠네요.
아참 문득 떠오른 질문사항이 있어 남기고 갑니다! 수업내용은 메타적으로 모두에게 공유되나요? 그러니까...예를 들어 연희가 인성학수업을 보고 특정한 수업 지문을 받아냈다면, 이거는 다른 캐릭터들도 들은 적 있는 수업이 되는 건가요? 아니면 저거 연희만 알고 다른 애들은 따로 공부해야 알게 되는 건가요?
의념파장이 세계 전체적으로 퍼져 있다는 류의 이야기도 생각해보자면, 의념의 영향을 받아 생기는 것, 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레벨이 높아지면 의념이 강해지고 받는 영향도 강해지니 파장도 강해지고 의념이 없는 일반인도 의념의 영향을 받을 수는 있으며 세계 역시 세계에 의념 보유자가 존재하는 이상 의념의 영향을 받고 있을테니? (물론 가능성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