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 빈센트. 당신만의 베로니카가 될게요. 베로니카가 아니면, 베레니체도 좋고, 베레니케도 좋아요. 제가 사람조차 못 된다고 생각하시면, 당신의 양이, 하다못해 개돼지라도 될게요. 개돼지가 될 자격조차 없나요? 그러면 당신의 도구가 될게요. 좋을 대로 쓰다가, 쓸모없어지면 가차없이 내버리는, 하지만 당신만을 위해 쓰여지는 도구! 그러니까 빈센트, 나만의 사랑, 아니면 나만의 주인, 신이어도 좋으니 나만의...'
"...베로니카. 당장 인터넷에다가 '고백해서 혼내주자'를 검색해보고 일주일 동안 그게 무슨 뜻인지, 그게 나온 맥락인지 연구해 봐."
...라고 말하고, 빈센트는 전화를 끊어버린다. 인천항에서 빈센트에게 허락도 안 받고, 고통마저 잊은 채 날뛴 뒤로 베로니카의 광증은 더욱 심해졌다. 이제는 단순한 집착을 넘어서 신앙 수준이었고, 자기가 신앙의 대상이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고, 된다 하면 무조건 거절했을 빈센트는 안 그래도 미친 게 더 미쳤구나 생각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 세상의 누군가는 저것을 보고 사랑이라 하지만, 빈센트가 보기에는 명백한 광증이었다. 나중 가면 자기 얼굴 그려진 전단지 돌리면서 종교라도 차리는 것 아닌가 걱정하다가 공원의 벤치에 앉았다.
베로니카라는 악몽 속에서 마모된 정신을 치유하는 듯한 가락이 들려왔다. 뭔가 정신이 없이 흘러가지만, 그렇다고 난잡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 관현악인데도, 마치 락 음악을 듣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다. 평정을 유지하다가, 베로니카 때문에 내려갔던 입꼬리가, 그 소리에 다시 평정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고, 난잡한 와중에도 빈센트는 눈을 감고 음악을 감상하기 시작했다. 끔찍한 일밖에 없던 최근에, 몇 없는 좋은 경험을 한 것 같았다.
음악이 끝나고, 빈센트는 일어나서 그 음악의 중심이 된 것 같은 한 여자를 보았으리라. 그리고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그 익숙함에 물었겠지.
"좋은 연주 잘 들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미리내고에 재학하고 계십니까?"
오랜만에 연주를 해볼까 싶어 공원으로 나왔어요. 연주라고 해봐야 생각나는데로 손가락을 움직이고 제멋대로 숨을 불어넣어 트럼펫을 연주하는 것 뿐이지만요. 그래도 악기를 다루는 실력은 몸에 익었고, 적절한 의념의 보조로 조화로운 선율을 연주할 수 있었어요. 그게 끝이지만요. 뿌뿌- 하고 불어도 박수 갈채는 오지 않아요. 오직 시선만 다트처럼 꽂혀오지요. 뒤라님, 뒤라님, 저도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하는 연주를 할 수 있을까요? 뒤라님, 당신의 공연에 어울리는 연주를 하고 싶어요. 아~ 뒤라님... 잘 이어가던 연주는 비뚤어지기 시작했어요. 톱니바퀴가 서서히 어긋나 하나의 기계장치를 망가뜨리는 것처럼, 하나의 비뚤어진 음이 서서히 연주를 망가뜨리기 시작했어요.
"후우... 아직 멀었네요."
입가에서 트럼펫을 떨어뜨리고 숨을 몰아쉬어요. 그래도 좋은 연습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어머나? 요즘은 그런 식으로 헌팅하는 건가요?"
살며시 웃어요. 제법 유려한 외모네요. 농담은 자기만 알아들을 수 있으면 안되는 거죠? 그만두도록 할게요.
상대방은 빈센트의 이야기에 살풋 웃더니, 농담을 하면서 헌팅이라는 이야기를 한다. 헌팅? 내가? 가늘게 뜬 빈센트의 눈이 커지지만, 빈센트는 농담이란 걸 눈치챈다. 뭐, 그럴 리가. 가끔씩 그런 오해를 받지만, 빈센트는 최근 들어서, 아니, 몇 년 들어서 헌팅이란 걸 해본 적이 없었고, 하다못해 "자연스러운 만남을 추구"라고 부르는 것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걱정 마세요. 저는 그런 일 안 합니다. 절대로요. 절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빈센트는 베로니카에게 실시간으로 헌팅당한 상태고, 절대로 추구해서는 안 되었던 "자연스러운 만남"을 성공해버렸으니까. 펀드매니저 일을 할 때 만난 친구가 한국에 출장 나온 김에, 불러서 술 한잔 하고 왔더니만, 그 친구는 1)성별이 여자고 2)빈센트와 만났다, 는 두 가지 이유만으로 베로니카의 감시 표적이 되었으니까. 쟤 건드리면 UHN이고 지랄이고 당장 감방으로 널 처넣겠다는 경고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지만... 사람한테 말해놓고, 혼자서 깊은 생각에 빠지는 것도 꼴사납다. 빈센트는 고개를 젓고 말한다.
"빈센트 반 윌러. 미리내고 학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혹시 악기로 의념을 운용하시는 건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