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이 막힌다. 함께 있으면 항상 두 손으로 받아들기 버거울 정도로 행복하고, 괴롭고, 혼란스러운 감정이 넘쳐나고는 했다. 웃고 있는데도 간혹 낯선 곳에 던져진 것 같아서 두려움이 몰려오기도 했다. 그것은 그를 향한 것이라기보다는ㅡ 자신이 이 모든 것을 누릴 권리가 있는가에 대한 두려움이자, 언제 이 행복이 다시 빼앗겨 사라질까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야, 언제나 나쁜 아이였으니까. 나쁜 아이에게는 어떤 보상도 주어진 적이 없다. 마지막 남은 사탕 한 조각을 빼앗기지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니.
그래서 조용히, 선을 긋기로 했다. 곁에서 언젠가 사라지더라도 어느정도 추스를 수 있을 정도로. 갑자기 너는 그런 행복을 누릴 권리가 없다고 해도 쓴웃음 한 번 짓고 넘어갈 수 있겠다 싶을 정도에, 딱 그 정도 선에만 서 있으려고 했는데.
이미 발 아래에 그어 둔 선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챘을 때에는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 버리고. 불안해서 황급하게 뒤돌아 본 자리에 남은 물웅덩이에는, 길들여져가는 자신의 모습이 비추이고 있었다. 행복한 얼굴로 웃고 있는 제 모습이 낯설어서 뒷걸음질을 치면, 이번에는 앞길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커다란 짐승이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그 얼굴이 또 가슴을 후벼파는 것 같아서 다시 발을 내딛으면 또 다른 두려움이 발목을 잡아끌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해? 어디로 가야 해?
“싫어.”
웃고 있었지만, 웃고 있지 않았다. 젠장, 알아, 알고 있다고. 이제까지 토 나올 정도로 지독하게 겪어 온 거란 말이야. 그런데 왜 삭여지지가 않지. 익숙하기 마지않는 서늘한 체온이 이상할 정도로 시리게 다가왔다. 아마 언젠가 꿈에서 보았던 바닷물이 제 속으로 다시금 들이치는 모양이지. 무슨 말을 하자니 누군가 막아두기라도 한 것처럼 제대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옆에 있는데, 이렇게 닿아 있으면 조금씩 사그라들었는데. 왜 지금은 더 외로운 것 같을까? 있지. 여전히 어둠만이 자리하고 있는 얼굴을 마주하면서 가만히 이를 악문다.
“…..움직이지 마.”
네가 바닥을 짚고 일어나서, 눈 앞에서 사라지고, 고작 죽 한 그릇 얻어먹고 이 모든 것을 영영 놓치게 될 바에야.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춰버리는 편이 더 낫다. 역시, 약 같은 건 먹지 말 걸 그랬다. 열 속에 몸부림치는 것이 외로움 속에서 몸부림치는 것보다 백만 배는 더 나았을 텐데. 맨정신으로 싸늘한 체온을 마주하는 것보다 시리지는 않았을 텐데. 다시 후회하고 있는 제 자신이 비겁하고 창피하게 느껴져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명확한 이정표가 되기엔. 함께할 수 있는 구원이 되기엔. 서로 기댈 수 있는 동행이 되기엔.
그 어느 것에도 어설퍼 모자라면서 주제넘게 가까이 다가가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그 결과다.
소녀는 갈피를 잃었고, 소년은 추진력을 잃었다. 그렇게 두 사람은 길을 잃었다.
웃는 채로 희게 굳은 얼굴로 건네는 움직이지 말라는 새슬의 탄원에, 문하는 일어서는 것마저 포기했다.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 채로, 가만히 새슬의 방향으로 모로 엎드린 채로 문하는 가만히 있었다. 문득, 그가 입을 연다.
"유새슬."
자신의 손 끄트머리를 조심스레 쥐고 있는 새슬의 손을 문하의 손이 조용히 맞잡는다. 그리고 느릿하게 끌어당긴다. 손이 끌려들어가는 방향은, 새슬이 그토록 들여다보기 원했던 그늘의 속, 원래라면 그의 얼굴이 있었을 자리다. 가만히 딸려가 도달한 그 어둠 속은, 너무도 별것없고 평범했다. 도자기처럼 창백하고 차가운, 그러나 조금 말랑하고, 조금 젖어있는. 소년의 뺨과, 코와, 미약한 숨결이 느껴지는. 꼭 감은 눈이 느껴지는. 그냥, 보통의 얼굴이다. 그게 손끝에 조심스레 와닿는다.
"우리 너무 멀리 와버렸어. 미안해."
새슬의 손을 붙든 채로, 세상의 멸망을 앞에 두고 하는 듯한, 느리고 창백한 고해가 나직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다.
"이번에는, 행복하고 싶었는데."
손끝에 느껴지는 그 물기는, 차갑다. 그러니까, 반대로 말하자면, 그 소년에게 있어 아직도 새슬의 손은 한없이 따뜻한 것이다.
"잘 안되네."
새슬이 뒤로 돌아가야 할 때는 새슬을 놓아줘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 비참한 미소를 떠올려보면 도저히 새슬을 돌려보낼 수 없다. 그러나 돌려보낼 수 없다고 해서 돌려보내지 않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한 채로, 그저 앞에 남겨져버리고 마는.
차라리 새슬을 마음에 깊이 들이지 않아, 얼굴에 철판을 깔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너를 배웅해줄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