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슬이 겨우 일으켰던(정확히는, 일으킴당했던) 상체를 다시 뒤로 젖혔다. 뒷통수에 닿는 푹신한 감각이 첫 번째, 솜 뭉텅이가 미처 흡수해가지 못 한 작은 울림이 머릿속을 튕기는 것이 두 번째. 으, 짤막한 신음과 함께 기껏 사라졌던 작은 금이 보람도 없이 미간에 다시 나타나고.
그나마 차가운 손바닥이 다시금 이마에 내려앉으니 조금 가시는 듯 한 기분이 들어 몰아 삼켰던 숨을 천천히 내쉰다. 머잖아 소년의 손바닥이 떠난 자리에 남은 물티슈 몇 장은 금방 이마의 열기에 녹아들기라도 하듯이 미지근한 기운을 머금기 시작했다. 없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지만, 못내 아쉬운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나. 원한다면 손 떼지 마ㅡ하고 칭얼거리듯 졸라 볼 수도 있었으나, 가뜩이나 아픈데 응석까지 많은 아이로 남고 싶지는 않았다. 다만 흐릿한 시선으로 가만히 소년의 자취를 좇는 것이다. 안심시켜 줄 만 한 무언가를 찾아다니듯이.
".....억제제."
자신에게 되묻듯이 소년의 말 끝을 되풀이했다. 그러고 보면 억제제도 약은 약이었지. 1년 365일 빼놓지 않고 복용해야 하는 양들의 필수품이었던 탓일까. 아무래도 새슬의 안에서 억제제는 이미 약이라기보다 매일 한 번은 꼭 해야 하는.. 식사나 수면과 같은 것 즈음으로 굳혀져 버린 모양이었다. 비록 그것들과는 결이 달라도 많이 달랐지만 살아가기 위한 (양 한정)필수품이라는 점은 같았으니. 아주 오랜만에 깨닫게 된 작은 사실과 함께 아니네, 익숙했네, 하고 웅얼거렸다. 평소 같았다면 또 헤실거리는 웃음으로 대충 얼버무렸겠지만, 애석하게도 지금 그럴 기력은 없다. 다만 고개를 아주 조금 움직였을 뿐이다.
빨리 오라고 할까, 조금 더 있다가 오라고 할까. 잠깐 멍한 시선이 허공을 가로질렀다. 아마 느린 사고회로로나마 무언가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렇게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나온 답은 '빨리 갈래' 였다. 아무래도 낯선 보건실 환경에서 가만히 누워 있기에는 조금 불편했던 모양이다.
>>528 흑흑.. 흑흑흑... 고맙습니다...... 다행히 못 움직일 정도로 허리를 삔 건 아니라서 병원은 필요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요 ㅇ(-(..... 그래도 오늘은 전기장판을 팍 틀어서 허리를 지지면서 자겠습니다..(??) 사실 찜질팩이 없어서 ._.)..
하는 핸드폰을 주머니에 쿡 쑤셔넣었다. 그리고는 새슬의 몸을 이불 대신 덮고 있는 트랙탑을 더 꼭 여며주었다. 내부에 퀼팅이 들어가 보통 트랙탑보다 좀더 두꺼운 물건이긴 했지만, 이럴 줄 알았다면 오늘 좀 더 따뜻하게 입고 올 걸 그랬다고 하는 생각했다.
어쩌면 응석을 부리고 있는 쪽은 자신일지도 몰랐다. 초점 흐릿한 눈으로 무언가를 찾아헤매는 것 같은 새슬을 바라보며 하가 문득 한 생각이다. 그런 생각이 들어버린 것이다. 양과 늑대가 아닌 평범한 사람과 사람으로 만났더라도... 양이니 늑대니 하는 것이 없는 세상이었어도 우리는 이렇게 가까워질 수 있었을까? 그것은 명백한 불안감이었다. 그는 뭐라 말을 하는 대신에, 손을 뻗어서 아침 안개 같은 손으로 새슬의 손 하나를 꼭 마주잡으려 했다. 새슬이 맞잡아준다면 그렇게 계속 쥐고 있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위잉, 하고 하의 핸드폰이 울었다.
"...왔대."
빨리 오라고 한 말이 틀리지 않았던지, 호출을 한 지 몇 분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콜택시가 도착한 모양이다.
"가자, 유새슬."
하고, 문하는 쥐고 있던 새슬의 손을 놓고는- 다시 새슬의 목어깨와 오금을 감싸안고 새슬의 몸을 천천히 받쳐들었다. 단단하기만 했던 품에 새슬의 열이 복사되기라도 한 것일까 퍽 미적지근하게 따뜻하다. 이번의 이동은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택시가 정문을 넘어서 본관 출입문까지 와서 대기하고 있었던 덕분이다. 새슬에게 느껴지는 풍경의 변화는 아까보다도 훨씬 짧을 것이다. 몸이 조금 들려올라간다 싶더니, 새하얀 양호실의 풍경이 조금씩 허물 벗겨지듯 멀어지고는 푸르른 그늘이 진 복도가 나오고, 가을 오후의 서늘한 햇살이 내리쬐는 운동장의 흐릿한 풍경을 배경으로 세워져 있는 택시... 그리고 이내 덜커덕 하는 소리와 함께 코끝에 섬유세제 냄새와 오래된 방향제 냄새가 옅게 걸리는.
새슬의 몸이 택시 뒷좌석에 놓였다. 아까 조금의 흔들림에도 새슬의 미간에 새겨진 주름을 잊지 않았던 건지, 새슬을 뒷좌석에 내려놓는 품이 아까보다도 훨씬 조심스러웠다. 새슬에게 좋은 일일지 나쁜 일일지 모르지만, 푹신한 뒷좌석에 놓이면서 새슬을 옮겨준 단단한 품은 다시 새슬에게서 멀어져갔다. 아니, 멀어져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내 바로 옆에 다른 누군가가 타는 기척이 느껴지고, 새슬의 옆으로 이젠 꽤 익숙한 감각이 다가붙어왔다. 자신에게 기대라는 듯이.
하가 택시 기사님께 주소를 불러드리는 소리가 웅얼웅얼 낡은 라디오로 전해지는 것처럼 울렸다. 그의 팔이 새슬의 어깨를 조심스레 감싸안았다. 풍경이 또다시 흐릿하게 흐르기 시작한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새슬주 때문이 아니니 미안해할 필요는 전혀 없어. 그냥 요즘 문하라는 캐릭터의 성격이 내 의도와는 방향이 다르게 가는 것 같아서 이걸로 괜찮은가, 상대가 어울리기에 즐거운 캐릭터인가 하는 고민이 많아져서 물어본 거야. 나도 현생 때문에 접속을 자주 하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인걸. 그러니까 새슬주도 그것에 미안해하거나 하지 마. 그리고 충분히 자고 있다는 그 말, 나 믿을게...? (물끄러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