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행히도, 새슬이 소년의 행동에 저항하는 일은 없었다. 오히려 순순한 편이었다. 사실은 하도 정신이 없는 와중에 무언가 생각할 틈도 없이 휩쓸렸다고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체중을 등 뒤로 옮기며 고개가 힘 없이 휘떡 넘어갈까 싶던 찰나, 갑자기 시야가 훅 높아지는 것이 느껴진다. 우와, 어지러워. 작고 맥 없는 짧은 소감.
“어디로, 가는데?”
달아오른 고개가 서늘함을 찾아서 소년의 목덜미를 슬쩍 파고들었다. 가까이서 들으니 숨이 조금 가쁘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와중에도 새슬은 재미있겠다ㅡ 하며 킬킬거리는 소리 따위를 웅얼댔다. 아마 하가 새로운 낮잠 포인트라도 발견했나 봐.
그렇게 새슬은 늘어트린 팔다리를 덜렁거리며 소년에게 들려 옮겨지기 시작했다. 아마 누가 보면 시체라도 옮기고 있는 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흔들리는 움직임에 맞춰 머릿속이 텅텅 울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로 가는데? 하는 질문에, 하는 달래듯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를 살짝 기울여서 새슬의 정수리에 자신의 뺨을 살짝 부볐다. 그에게서 퍽 드문 애정의 편린이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서슬에 새슬의 머리가 흔들리자, 하는 발걸음에 조금 더 조심해 균형을 잡았다. 계단을 다 내려가자 흔들림이 훨씬 덜해졌다. 창밖을 문득 바라보면 푸른 하늘빛이 비껴드는 본관 1층. 창 밖에서 체육시간에 뛰어노는 아이들의 소리는 들리지 않고, 하의 스니커가 복도를 저벅이는 나직한 소리뿐이었다. 문하는 새슬을 안아든 채로 몸을 조금 돌려 문에 손을 가져다대고 노크를 똑똑 했다. 그리고 교실에 흔히 쓰는 미닫이문이 아니라 보통의 문이 달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났다.
문이 열리면 하얀 조명 아래에 알콜 냄새가 흐릿하게 맴돈다. 웅얼웅얼 뭐라 대화하는 소리가 들리는데, 분명히 알아듣기는 힘들지도 모르겠다. 다만 풍경이 조금 더 옮겨지더니, 옥상과는 비교도 안 되게 푹신한 무언가에 몸이 부드럽게 내려놓이는 게 느껴질 뿐이다. 뭔가 엄청나게 대단한 낮잠 스팟을 찾아내기라도 한 걸까? 머리에 뭐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삑 하는 소리가 난다. 다른 사람의 손이 하에게 무언가를 보여주는 게 보인다. 하가 짧게 한숨을 쉬는 게 보인다. 고개를 돌려보면, 보건선생님에게서 뭔가를 받아드는 하.
"유새슬."
그가 새슬을 부르는 방법은 퍽 다채로웠다. 이름만 부를 때도 있었고, 성을 붙여서 다 부를 때도 있었다. 그건 아마 딱히 본인도 별 분간을 하지 않는 모양이다. 그렇지만 지금 그의 어조가 평소보다 특별히 누그러져 있다는 건 알 수 있다.
ㅖ... 일단 모두에게 머리 씨게 박겠슴다... 무엇보다 지금 자리에 있을지 없을지 모를 시아주에게도...
아무래도 사적인 거니까 길게 얘기하진 않겠지만 가족하고 친척들 문제로 멘탈 터질 일이 좀 있어서 수습 때문에도 참치에 대한걸 거의 잊을 뻔 했어. ;( 잊을만 하면 술렁거리다보니 내심 그러진 않을까 생각 정도는 했는데 이게 실제로 일어나면 예상이고 뭐고 없고 정신이 오락가락 하더라.
내 일이 바쁜 거라면 일찌기 얘기 해놓고서라도 몇주 정도 참치를 쉬었겠지만 이런 갑자기 터진 일에 대해서 한시 빨리 말하지 못한 내 대처가 역시 부족했던거 같아. 기약없이 기다리기만 하다 상황을 놓쳤을 시아주에게도, 갑자기 사라져서 당황했을 참치들에게도 미안하단 말밖에 할 수가 없네...
누군가가 베푸는 아주 작은 애정의 편린에 이상하게도 간절해질 때가 있다. 이를 테면 부드럽게 맞대오는 뺨의 서늘한 온기가 묘한 안정감을 심어 주는 지금. 마지막으로 이런 걸 느꼈던 때가 언제였더라. 아주 오래 전의, 지금으로선 희미한.. 어쩐지 그리운 감각.
소년의 어르는 소리에 새슬은 으응, 하고 앓는 소리인지, 대답하는 소리인지 모를 것을 흘리고는 몸에 조금 더 힘을 뺐다. 다행히 더 이상은 머리가 크게 울리지 않는 것 같기도 하다. 기분 탓인가, 아니면 익숙해진 건가. 체감상 꽤 오랜 시간이 지난 기분이 들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일렁거리는 시야가 다르게 바뀌었다는 것만은 기억하고 있다. 계단, 파란 하늘, 익숙한 복도 같은 것들. 그리곤 문이 열리는 소리.
별안간 등허리에 푹신한 것이 닿았다. 콘크리트나 나무의 단단함과는 비교도 안 되는, 그렇기에 다소 생경하게 다가오는 감각이었다. 그런 것이 불편한 것은 아니었으나, 괜히 어색한 마음에 미약하게 뒤척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사부작거리는 소리는 곧 줄어들고. 붕 떠있는 것 같은 머릿속에 누군가의 웅얼거림이 구름처럼 흘러 내려간다.
이윽고 유새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감았던 눈을 떴다. 소년이 무언가를 건네고 있었다. 작은 알약 몇 개와 컵에 담긴 투명한 액체. 거기까지는 좋았다. 딱히 약 먹는 걸 싫어하거나 맛에 투정을 부리는 성정은 아니었으니. 그러나.
“......싫어.”
집에는 안 가. 분명히 평소보다 힘 없는 목소리였음에도, 묘하게 단호하게 느껴지는 거부였다. 약을 받으려던 손을 금새 거두고, 이제는 볼멘소리를 툴툴대기 시작한다. 조퇴하면 집에 가야 하잖아.
물컵은 잠깐 양호실 병상 옆의 틱자에 놓아두고, 한 손으로(양호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약을 받기 전에 손은 깨끗이 씻었다) 알약 두어 개를 올려둔 채로 하는 다시 손을 뻗어 새슬이 알약을 넘기기 편하도록 그녀의 목어깨쯤을 싸안고 비스듬하게 받쳐올려 주었다. 그러나 싫어, 하고 툴툴대는 소리에 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그가 걱정하는 것 역시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음울한 압박감이 깃든 그 거대한 석관의 모습을- 그리로 돌아갈 때 새슬의 눈에 어리는 구슬픈 기색을 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 석관으로 새슬을 돌려보내고 싶은 생각은 하 역시도 추호도 없다.
"싫으면, 도망칠까?"
그래서 하는 조금 이상한 대안을 제시했다.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떨어져나와 이상한 삶을 살아온 소년이 떠올릴 수 있는 최선의 대안이었다.
"너랑 내가 아는 데로."
하면서, 하는 자신의 이마를 조심스레 새슬의 이마에 기댔다. 기분좋게 서늘하다.
이것이 맞는 일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무언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조바심도 든다. 그는 이 모든 것이 낯설고 의심스러웠다. 혼자되는 것이 익숙한 삶에, 자신이 계획한 사람들 이외의 다른 누군가를 위해준다는 것이 그는 서투르기 그지없었다. 누군가 보기에는 그것이 이상하기 그지없는 일일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상한 일이라고 하더라도 하는 새슬을 혼자 내버려두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혼자 새슬을 내버려두거나 집으로 돌려보내 버리거나 하면, 소년의 마음속 어딘가의 새하얀 병상에 가만히 누워있는 새슬의 모습이 영영 사라지지 않을 것만 같아서.
갑자기 말문이 막힌 소년과 그가 내민 알약들을 눈 앞에 두고, 새슬은 어린 아이가 투정을 부리는 것 마냥 슬쩍 고개를 돌려 그것을 피했다. 있을 것이라면 차라리 그 곳보다는 늘 가던 학교 뒷편의 나무로 향하는 것이 훨씬 나을 것이다. 곰팡내 나는 차갑고 딱딱한 매트리스와 냉랭하게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 있을 바에야, 풀 냄새 향긋한 나무둥치에 기대어 파묻혀 있는 것이 더 괜찮겠지. 열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드물게 일그러진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까지고 그대로 꽁해 있는 것은 또 아니었다. 소년이 금방 다른 대안을 제시해 주었기 때문이다. 둘만 아는 장소로 도망치자ㅡ 하고. 말이 끝나자마자 또 다시 상냥하게 다가오는 서늘함이 눈물 날 정도로 좋아서, 눈꺼풀을 스르륵 닫았다. 혹여나 말이 바뀔까 조바심이 나서 얼른 고개를 끄덕여 댄 것은 덤이다. 으응, 갈래. 오늘따라 참을성 부족한 어리광쟁이가 된 것 같은 건, 전부.. 네 서늘한 이마가 기분 좋아서야.
“그럼 먹을래.”
약. 그제서야 집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확신이 들었는지, 새슬은 냉큼 소년의 손에 들려 있던 알약을 받아 삼켰다. 물 한 모금도 물론 잊지 않았다. 그러나 물을 마신 뒤에도 물컵을 받아들기 전까지 아주 잠깐, 입 안에서 녹았을 알약의 잔맛이 남아 버렸는지. 얼굴이 미약하게 구겨지는 것이 보였다.
“…….써.”
나, 먹는 약은 안 익숙해서. 잔맛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자꾸만 입맛을 다시면서, 그대로 물을 몇 모금 더 넘기고서야 마침내 작은 금이 갔던 미간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478 아니 뭐, 과거랑 아주 연관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렇다고 떡밥이라 할 정도로 무거운 것도 아니라().... 그러면 그 쪽으로... 부탁드립니다. 사실 학교 교실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것도 좀 그렇고(??) 학생 쉼터는 공공시설이니까 이목이 쏠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버려서 <:3....
물컵을 건네어주면서, 하는 다른 방법이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보았다. 날씨가 본격적인 가을로 접어들면서, 춥다고는 못해도 싸늘하다고는 할 수 있을 정도로 평균기온이 내려갔다. 자유부 활동을 하면서 시간을 보낸 뒷뜰의 나무그늘 아래라거나 옥상이라거나는... 감기 환자를 실외에 방치하는 것은 언어도단. 애초에 이제 슬슬 자유부 활동을 하려면 비어있는 부실을 알아봐야 할 날씨가 되었다. 그렇다고 안 쓰는 교실이나 부실을 찾더라도, 쓰지 않는 동아리실에 난방이 들어올 리 만무. 평상시라면 몰라도 지금 새슬은 환자였다. 점퍼 하나 덮어준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체육특기생 휴게실에 있는 전기난로를 가져올 수도 없는 상황이고, 그렇다고 산들고의 수십 명이 되는 체육특기생이 드나드는 휴게실에 새슬이를 뉘어놓는 것도 양쪽에 형편이 맞지 않는 일이었다. 지금 자신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괜찮은 선택은 그것뿐이었다.
고민은 되었지만 머뭇거리지는 않는다. 약속했으니까. 자신이 그녀의 최악이 되어주기로.
하는 새슬의 이마에 손바닥을 착 얹으며 새슬이 중얼거리는 말에 대답했다. 물티슈 몇 장을 접어놓은 것이 새슬의 이마에 차갑게 착 달라붙어, 과하게 끓어오르는 열을 빼앗아간다.
"어떻게 하고 있냐, 억제제는."
아마 경구복용일 텐데, 그것도. 무미무취라고 들은 적 있으니까 상관없나- 하는 말로 부드럽게 어르듯이 새슬의 말을 받아주면서, 하는 주머니를 뒤적여 핸드폰을 꺼냈다. 가방이나 외투 따위 하루 정도 학교에 내버려둬도 된다. 도둑맞아도 새로 사면 그만이다. 외투는 해외에서 직구한 거라 진짜 도둑맞으면 좀 열받겠지만, 가방은 그렇게 비싼 것도 아니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