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로테는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턱을 매만지며 막 알게 된 사실을 되새기듯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는 공포심과 호기심이 동시에 묻어나고 있었다. 샤를로테의 누에가 한 경희의 소녀라는 말에는 잠시 이해에 난항을 겪는 듯했다. 형태도 촉감도 다를 것이 분명한데 어떻게 같은 존재라 할 수 있을까? 하지만 시간은 샤를로테가 미약하게나마 그것을 납득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누에- 충성하는 존재. 그리고 자신을 부모님에게로 이끌어주는 존재.
"우티스 언니는 입이 있는데 말을 하지 않아요? 조금 무서워. 누에는 입이 없어요. 그래서 말을 못 해요.."
동행을 망설이던 샤를로테가 별안간 시무룩한 목소리로 제 얼굴을 감싼 누에의 입 없는 신체를 만지작거렸다.
기이한 광경이었다 . 찢어졌던 살이 눈에 띄는 속도로 아무는가 싶더니 당신이 흘린 피 아닌 액체가 다시금 당신에게로 모여 환부의 벌어진 틈으로 역류해 들어갔다 . 상처가 치유되며 전과 마찬가지로 활력이 샘솟는다 . 당신을 당신이게 만드는 무언가가 - 당신의 안에 다시 자리를 잡았다
" 잘했어 . 아주 잘했어 . 거기서 더 요령이 생기면 어떤 부상을 입어도 즉각 치료할 수 있게 되겠지 . 자네는 재능이 있어 . 배우려면 금방 배우겠지 . 하니 내가 저기 멀대를 해치우는 동안에 마저 상처를 수습하게나
저기 저 놈 손에 잡힌 덜떨어진 친구를 구하려면 아무래도 자네보다는 내가 낫지 싶으니 "
낡은 말투였다 . 번지르르하게 윤이 나는 금색 머리카락을 이마 뒤로 넘겨놓은 남자였다 . 햇빛에 타지 않은 피부는 희었으나 넓은 어깨와 늘씬하게 뻗은 팔다리 때문에 유약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 자신에 찬 목소리는 당신을 높이면서도 당신이 지닌 한계를 날카롭게 지적했다
샤를로테와 한 경희의 암묵의 청에 힘입어 소녀는 말을 꺼냈다. 공기나 성대를 거치지 않고 뇌에 직접 전달하는 듯한 그것을 말했다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샤를로테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서 유유히 누에를 어루만졌다. 누에로부터 손끝이 떨어졌고 그와 함께 샤를로테의 결정도 정리된 듯했다.
"누에. 길을 만들어."
샤를로테의 손이 바퀴를 굴릴 준비를 하며 가지런해졌다.
"난 엄마, 아빨 만나러 갈 거에요. 아줌마가 따라오는 건..... 자유."
산뜻하게 말을 마친 샤를로테의 입술은 더이상 말을 하지 않을 것처럼 앙다물려 있었다. 누에에 의해 길이 준비되면 곧바로 자리를 떠나려는 것이 분명했다.
누에에게 입이 있었다면 자신의 주인을 업신 여기는 발언을 좌시하지 않았을 것이다 . 일방적으로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감사하기는 커녕 사람을 짐이라는 둥 함부로 말하다니 . 예의를 배우지 못한 언사가 아닌가 . 샤를로테가 더는 상관하지 않기로 마음 먹었기에 망정이지 아니었다면 누에는 샤를로테가 시키지 않아도 우티스를 베기 위해 날았을 것이다
샤를로테가 초연하게 대응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피를 보게 됐겠지 . 한 경희와는 대조적으로 샤를로테는 완벽하게 누에를 통제하는 것처럼 보였다 . 당신에 대한 신뢰가 없었다면 한 번에 한 가지 형태로만 변할 수 있는 누에가 낯선 자들 앞에서 샤를로테의 길이 되었을까 . 누에가 샤를로테의 가면이 되기를 포기했기에 누에의 안에 갇혀 있던 샤를로테의 색이 옅은 금발이 화려하게 밖으로 쏟아졌다
" ... 아 "
나이에 비해 단호한 선언에 한 경희는 망설이는 눈치였다 . 이런 한 경희를 우티스는 인상 찌푸리며 바라봤다
한 경희에게는 한 경희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 샤를로테에게 샤를로테의 목적이 있는 것처럼 . 어쩌다 한 번 길이 교차한 상대에게 한 경희는 지나치게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한 경희는 죽어서도 여전히 살아 생전의 도덕적 관념을 벗어던지지 못한 것처럼 보였다
" ... 안 되겠어 . 네가 뭐라던 저렇게 어린애를 뭐가 뭔지 모를 사막에 혼자 보낼 수는 없어 "
어른이라면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며 주장하는 한 경희에게 우티스는 더는 어떤 말도 내놓지 못했다
아니 - 상대하기는 전보다도 까다로워졌지 . 인질 = 미드 나잇을 쥐는 손으로 공격을 해오니 말이다 . 미드 나잇의 생사에 상관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미드 나잇을 살리는 판단을 한다면 녀석의 범위에 다가서는 일조차 망설여졌다
파리 머리라면 한 순간의 변덕으로 미드 나잇의 머리를 두부처럼 부숴버릴 테니 . 녀석에게 정공법으로 맞서서는 미드 나잇의 목숨이 몇 개라도 모자랐다
헌데도 금발의 남자는 스스럼 없이 파리 머리의 간격에 다가가니 파리 머리조차도 남자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꼈다
당신이라면 경험해봤으니 알 것이다 . 사람의 신체로 이 세계에 사는 기형의 괴수에 맞선다니 . 자해를 넘어 자살 행위로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 저 남자보다도 월등히 발달된 신체를 지닌 당신조차도 답이 나오지 않는 승부였다 . 조금이라도 몸 쓰는 법을 배운 사람이라면 남자가 얼마나 무방비한지 한 눈에 알 수 있을 것이다 . 이성과 담 쌓은 삶을 살 것이 분명한 파리 머리도 알 수 있을 만큼 남자의 무해했다
정말이지 절망적으로 무력했다
저스티스와의 일전이 엉성하게 마무리 지어지면서 상당한 양의 분노가 불완전연소로 남았던 파리 머리에게 이런 남자의 존재가 달가울 리 없었다 . 때문에 파리 머리는 - 문자 그대로 파리를 쫓는 손짓으로 남자를 후려쳤다
그것으로 남자의 숨통을 끊고자 했다
장난으로 던진 돌에 개구리가 죽듯이 - 남자가 보이는 대로 무력한 사람이었다면 저기서 이야기는 끝났을 것이다
" 블랙 사바스 "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타난 것은 거대한 못이었다 . 분명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던 허공에 못이 나타났다 . 파리 머리가 못의 존재를 눈치챘을 때는 이미 - 못에 손목을 찔리고 있었다
< #?#*kr !! >
저스티스를 상대할 때처럼 전력으로 휘두른 손이었다면 저 못에 찔릴 일은 없었을 것이다 . 찔리기는 커녕 못 째 남자를 박살냈겠지 . 이러한 사실을 본능적으로 이해했기에 - 파리 머리는 타다만 분노를 마저 불사르기 시작했다
>>762 "회사라... 결국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가 봐요" "결국 사람들이 모이면 조직을 이루고 인연을 맺기 마련이라는 걸까요." "ㅡ다만 달라진 게 있다면 저네요! 이전에는 혼자 움직이지도 못하고 매일 아프고 엄청 소심했었는데, 지금은 훨-씬 처지가 좋아졌으니까요!" 이 세상이 황폐하다고 해서, 론멕이 생전 봐온 몇평짜리 하얀 병실보다 사막할까. 사막보다도 사막했던 기억은 론멕의 긍정의 어두운 동력원이었다. 론멕의 대화는 끊이지 않았다. 간만에 하고 싶었던 말을 하게 된 재미 덕분이었을까. 어쩌면, 이렇게라도 말을 계속 걸지 않으면 사라져 버릴 환상같은 현실 때문일지도 모르지. "제가 만나면 좋겠다는 분이 어떤 분인지 말해줄 수... 없으면 안해도 되지만! 그래도 궁금하네요. 저희 사이의 잠시 이별을 기록하는 팻말이 될 사건이잖아요, 저랑 그 분의 만남은." 실제로 누구를 만날지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다. 이 세계에서 3번째로 만나는(뭔가 굉장히 길쭉한 형상을 봤던 듯한 기억도 있지만) 상대방이라니, 뭔가 특별하지 않은가.
간만에 모습을 드러낸 샤를로테의 눈동자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한 경희가 무어라 생각하든 샤를로테는 한 경희에게 그저 지나가던 행인의 역할 그 이상을 기대하진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 덕에 샤를로테는 우티스와 한 경희의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고갔는지와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였다. 실제로는 정반대였지만.
샤를로테는 우티스와 한 경희에게는 일말의 시선도 던지지 않은 채 휠체어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경희가 소녀를 따른대도 그것은 동행보다는 일방적인 뒤따름이 될 것이다. 문득 무언가 생각났는지 샤를로테가 누에에게 물었다.
하나 남은 팔을 못 박힌 순간에 파리 머리의 패배는 결정되었다 . 명명백백 뒤집힐 리 없는 한 판이었다 . 이에 불복하는 것은 파리 머리 정도로 그마저도 금방 조용해졌다 . 끊어진 한 팔로 발버둥치며 역전의 발판을 만들려던 파리 머리였다 . 일개 인간에게 패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 오기로 떠오른 팔은 금발의 남자를 해치기에 충분한 힘을 갖고 있었다 . 부족한 것은 속도 뿐 . 맞기만 한다면 금발의 남자는 변변히 형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것이 분명했다
" 포기를 모르는 친구군 "
남자를 지키는 것처럼 세 개의 대못이 연달아 떨어져 내렸다 . 첫 번째 대못에 파리 머리는 자신의 아이덴티티라 할 수 있을 무언가를 잃어버렸다 . 나머지 두 번째 - 세 번째 대못에 파리 머리가 힘겹게 치켜든 팔이 꺾였다
" ... 판단을 서두르지 말라고 하고 싶네 . 정말로 좋아졌는지는 아무도 모르잖아 ? "
오필리아는 초를 치는데 일가견이 있는 언니였다 . 마음씨 곱지 못한 사람 같으니 . 론멕의 활기참이 오필리아에게는 크립토나이트 같은 것이던지 그녀는 론멕이 활개치는 모습을 못마땅해 했다 . 이상한 일이지 . 저렇게 볼멘 소리만 늘어놓을 거라면 애초에 상대를 않고 무시해버리면 될텐데 오필리아는 일일이 싫은 내색을 하면서도 말을 아끼지 않았다
" 말해줘도 되지만 . 들어서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있어 ? 믿을 생각은 있고 ? 내가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너는 사람을 의심하는 법을 좀 배우는 게 좋겠다 "
자신을 따라 구릉에 오르는 론멕에게 슬며시 손을 내미는 오필리아 . 무심한 손길이었다 . 투박하다는 말도 어울릴 듯 했다
>>793 "...다가가지 않으면 배신당할 일도 없다고 생각해 왔었거든요." 이 말을 하는 순간 론멕의 눈가는 조금 사글퍼 보였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결국 배신도 인연도 없는 삶은 너무 좁더라고요. 적어도 배신당하기 전까지는- 사람을 믿어보기로 결심했어요, 그래서." "뭐, 그러니까 지금 이순간에는 후회를 하더라도 최대한 많이 낭아기고 다가갈 생각이에요. 그러니까... 알려주세요. 그 사람에 대해서." 투박한 오필리아의 손을 살며시 잡는다. 물 한번 묻힌적 없는 곱디 고운 작은 손이 그녀의 손 위에 포개진다. "...그러니까, 최대한 가까워지도록 노력할게요... 그래서, 언니라고, 불러도 되나요?" ...마지막 말 한마디를 하는 순간에 론멕의 볼이 홍조를 띈 걸, 오필리아는 볼 수 있었겠지...
어떤 이정표도 준비되지 않은 사막이기에 세 사람은 땅 위를 지나면서도 망망대해 위를 표류하는 듯한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휠체어를 굴리는 샤를로테와 쳇바퀴를 굴리는 햄스터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을까 . 목적성을 지닌 만큼 샤를로테의 휠체어 바퀴가 제까짓 설치류의 쳇바퀴보다야 더 무겁겠으나 공허한 굴림이라는 것에서는 하등 다를 게 없었다 . 어디로 가서 무엇을 해야하는지 모두 막연하기만 하니 확신에 가까운 믿음도 날이 갈 수록 흐려지리라
" ... 얘 ! 멈춰봐 ! 얘 !! "
한참을 조용히 뒤따르던 한 경희가 별안간 소리를 내었다 . 다급한 음성은 샤를로테에게 무언가를 알리려 했다
상념을 부수는 외침에 샤를로테가 뒤를 돌아보면 한 경희의 검지 손가락이 측면을 가르키고 있었다 . 저럴 게 아니라 말로 설명하면 될텐데 . 더는 소리를 내지 않은 이유란 무엇일까 . 당신의 주의를 자신에게로 가져온 한 경희는 그 길로 싫어하는 우티스를 억지로 붙잡아 눕혀 모래 사막 위에 바짝 엎드렸다
위험을 느낀 샤를로테는 입술을 단단히 여몄다. 또래의 아이들처럼 호들갑스럽게 새된 소리를 내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비명소리는 가해자들의 흥분을 자극한다는 사실이 기억에 남아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샤를로테가 그럴 수 있었더라면 연유는 알지 못하더라도 누에를 감싸안고 한 경희와 똑같이 사막에 엎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소녀가 탄 휠체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위험으로부터 몸을 지키기를 어렵게 했다. 샤를로테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리고 천천히 손가락 사이에 틈을 벌려 한 경희가 가리킨 측면을 흘끗대었다.
" 애석한 일이군 . 하지만 뭐 시간이 다 해결해 줄 걸세 . 나도 한 때는 그랬으니 알지
조바심 내거나 걱정할 만한 일은 아니니 안심하게 . 누구나 겪는 일이야 . 여기 이 미숙한 녀석도 분명 지나왔을 길이지
나는 바스티유라 하네 . 만나게 되어 반갑군 "
적이라면 저대로 미드 나잇을 해칠 수도 있을 텐데
자신을 바스티유라 소개한 금발의 남자는 구태여 미드 나잇을 당신의 앞에 던져놓는 수고를 들였다
사무적인 느낌이 물씬 풍기는 삭막하게 날선 눈매와 이국적인 이목구비 . 당신에게 우호적인 제스쳐를 보내오고 있지만 표정과 말이 따로 놀기에 - 말과 목소리가 따로 놀기에 감정이 동하지 않는다 . 감성이 샘솟는 못에 염산이라도 들이 부은 걸까 . 남자의 목에서는 어떤 색깔도 느껴지지 않았다 . 대리석처럼 차가운 목소리였기에 당신의 적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지 않으리라
샤를로테가 한 경희를 흉내내기 위해서는 휠체어에서 뛰어내려야만 했을 것이다 . 하지만 샤를로테의 소리 없는 호소에도 두 다리는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앙증맞게 자신의 눈을 덮어가리는 것이 샤를로테의 최선이었다 . 정말로 최선이었는지는 한 번 곰곰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겠다만
손가락의 벌어진 틈새로 샤를로테가 밖을 엿보면 일전에 마주쳤던 흉물스런 파리 머리의 괴물들이 떼지어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얼굴을 덮었던 손가락이 측면에 있던 것을 확인하고 가냘프게 꿈틀거렸다. 손가락의 그늘 아래서 샤를로테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소녀의 시선은 엎드린 한 경희와 소녀를 한 번, 그리고 파리 머리의 괴물들을 또 한 번 향했다. 조심스럽게 한 모금 숨을 들이마시자 흉곽이 들썩였다. 휠체어 바퀴에 다시 얹히는 손길이 사뭇 비장했다. 샤를로테는 음량을 죽여 누에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