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먼발치에 있던 적이라도 누에라면 샤를로테가 숨 한 번 쉬는 동안에 붙잡을 수 있었다 . 빛을 반사하지 않는 무광의 검은 제 주인이 바란대로 방심하는 배후를 노렸다 . 기습 - 아니면 암습이라 해야할까 . 누에가 변한 검에 발목을 베인 괴수는 자신의 발이 떨어진지도 모르고 걸음을 내디뎠다 제자리에 쓰러졌다
모르는 삼자가 본다면 한 편의 잘 만든 슬랩 스틱 개그로 보일 것이다
괴수 또한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이 희극이기를 바랐을 거다 . 하지만 현실은 비정하여 바라는 대로 되는 법이 없다 . 뒤늦게 자신의 부상과 누에의 존재를 눈치챈 괴수는 자신의 발목을 자른 누에에 대한 분노로 눈이 멀어 목청껏 고함을 토해내었다
이것에 비하면 먼저 비명 지르던 여자와 소녀는 아무것도 아니다 . 뼈에 울리는 소리란 이런 것이라 보여주는 듯한 외침 . 그토록 분노한 괴수를 상대로 선뜻 나설 수 있는 자가 이 사막에 몇이나 되겠는가
─ 의외로 많을지도 모른다
생각지 못한 누에의 기습에 괴수는 자신을 잊었다 . 사냥꾼의 입장에 도취해 사냥감의 존재를 잊은 것이다 . 자신 또한 사냥감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잊었다
< 콰직 >
사람이 신을 신발이 아니었다
한 뼘 넘게 신는 사람의 키를 높여주는 굽이라니 . 끝으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신발은 서커스의 피에로라도 거리낄 것이었다
용기와 만용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만이 신을 수 있을 신발 . 그것이 괴수의 머리를 부수었다 .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갖는 킬힐 - 저것에 차인다면 누에라도 아파하겠지
자세히 보니 자신의 팔에 돋아난 건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코트 아래에 있는 피부가 보일 리 없잖은가? 그렇지만 분명히 팔이 보였다, 비늘이 돋아난 팔이 코트의 소매 위로 분명히 보였다! 자신의 팔이 아닌 무언가의 팔이. 그렇게 생각하니 순식간에 찌릿하고 소름이 돋아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 위치라면 자신과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을 텐데. 부디 돌아보았을 때 아무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동시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모순되게도 그의 정신에 파고들었다.
자신에게 솔직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는 론멕의 결심은 가상했으나 오랜 시간 축적된 자신을 거스르는 행동 양식이 편할 리 만무했다 . 하지만 론멕이라면 . 어쩌면 론멕이라면 해낼 수 있을 지도 모르지
단번에 자신을 회복한 론멕에게 오필리아는 의외라는 듯 눈길을 줬다 . 론멕이 해낸 일이 너무나 이례적이어서 오필리아는 포커 페이스가 무너진 것도 모르고 눈 앞의 소녀를 바라봤다 .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나 . 오필리아는 론멕의 질문에 대답을 아꼈다 . 론멕의 잠재력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목숨값이라... 오필리아가 꺼낸 말을 입속에서 머금어보며 론멕은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자아이한테 뭐라도 뜯어먹으려고 구해준 거냐고 비꼬고 싶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행한 기적의 규모나 지금까지의 태도를 봐서는 확실히 그녀와 함께하머 뭐라도 배우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문제점이라면, 지금 론멕이 가지고 있는 것이 전무하다는 사실. 애초에 본인이 어떤 이었는지조차 방금 떠올린 론멕이다. 나풀거리는 환자복과 주머니 깊숙히 있던 뿔태안경 정도를 빼면 가진 게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건 몸인데, 몸으로 갚겠다고 그대로 초면의 누님... 아니 사람에게 말하는 짓거리를 할 생각은 없는 론멕이니 결국 남은건... 론멕은 최선의 수를 떠올리고자 노력했다.
먼저, 구해주고 본인을 떠올리는걸 도와준 은인 오필리아에게 진심을 담아서 인사한다. 그리고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는, 말해본다.
"...목숨을 구해주고 아무것도 몰랐던 저를 도와준 거, 정말 감사합니다 오필리아 씨. 그런데... 제가 아직 머르는 것도 너무 많고 가진 것도 없어서... 지금 이대로면 제가 빚을 갚을 방법이 없을 것 같아서... 제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 만큼 성장할 때까지, 조금만 더 도와주실수 있으세요? 그러면 제가 꼭, 이번 삶을 걸고 은혜는 갚도록 할게요!"
-말하자면, 정면돌파. 론멕은 오필리아에게, 조금 더 도와달라고 말했다. (이왕이면 제자로 받아줄 수 있는지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거기까지 물어보지는 못했다.)
"만약 지금 당장 원하신다면 이 연약한 몸뚱아리뿐이라도 내줄 수는 있지만..."
...끝에 굳이 불편한 답안지를 내놓아서 상대방을 난감하게 만든 것은, 나름대로의 협상의 기술일 것이다. 론멕이 악질이라서가 아니라.
오필리아는 장님이 아니다 . 론멕이 무일푼이라는 사실은 보면 알 터 . 론멕에게 조언한 내용을 따지면 오필리아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론멕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 헌데 어째서 저렇게 무리한 요구를 꺼내는 걸까 . 론멕에게 빚을 지우려는 걸까 . 통화의 존재조차 불분명한 이 세계에서 현물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뭐가 있지
" ... 언니는 연상이 취향이라서 . 거기다 난 네 미래에 투자하려는 것도 아니야 "
상상이 지나치다며 오필리아가 론멕의 말을 일축시켰다 . 주저 앉은 론멕에게 손을 내밀며 오필리아가 말하길 ─ 그녀가 론멕에게 바라는 것은 그런 육체적인 보상이 아니라 했다
" 오해하게 만들었네 . 하지만 삯은 삯이라 확실한 형태로 약속을 만들어두지 않으면 이후 우리의 관계가 복잡해질 수도 있잖아 ? 언니는 기본적으로 솔로 플레이어라서 . 다른 사람이랑 함께 행동하는 일은 드물거든
그러니 내가 바라는 만큼만 함께 있겠다는 거야 . 소정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너도 나도 사요나라
모래에 파묻혀 보이지 않는 구간도 있었지만 어림 짐작이 잘 들어맞은 덕분에 당신은 철도를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었다
저번의 빌딩에서도 당신의 직감은 잘 들어맞는 편이었지
빌딩이라 하니 하는 말인데 이 세계도 반드시 사막 일변도인 것만은 아닌 모양이었다 . 명백히 인간의 솜씨로 보이는 문명의 잔해가 드물게 눈에 띄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 전신주와 같은 ─ 송전 시설이 마련되지 않은 이 세계에서는 쓸 길이 없는 인공물들을 당신은 이제까지 방황하며 몇 번인가 보아왔다 . 하지만 그것들은 버려진 것과 하등 다를 바 없어서 ─ 그것만으로는 어떠한 의미도 느껴지지 않아 당신은 그것들을 뒤로 해온 것이다
하지만 철도는 다르지 . 철도는 달랐다 . 짧게 이어지다 끊어진다면 더이상 기대할 바가 있겠냐 싶지만 이 녀석은 이어진다 . 어디까지고 이 세상의 넓음을 가늠하겠다는 듯이 뻗어나가고 있었다
고뇌를 먹고 고민은 자란다 . 질리도록 해온 혼자만의 가설 세우기 . 사상누각 .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짓이었지만 그조차도 긴 시간 거듭하다보면 제법 일리가 있어졌다 . 현실미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 빌딩에서 낭패를 봤던 당신이지만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당신의 가설도 여기까지 발전하지 못했겠지 . 잠시 뿐이라도 서로 소통할 수 있는 누군가와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당신으로 하여금 희망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 그런 희망이 있기에 당신은 철도를 따라 걷는다
이 세계에 나 혼자만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알게 됐으니까 . 앞으로 만날 누군가가 ─ 여러 사람이 모인 집단이 당신에게 호의적일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으나 당신은 이를 의식적으로 무시했을 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생각하는 동안에도 두 다리는 분주히 움직여 어느덧 천 걸음이 넘는 거리를 지나게 되었다
많다면 많지만 적다면 적은 걸음
언덕을 가로지나는 철도를 쫓으면 저 편에 그늘막 붙은 나무 의자와 엉성하게 이어 붙인 표지판이 보였다
당신이 아는 종래의 교통 표지판과는 생김새가 달라도 너무 달랐다 . 판자에 판자를 이어 붙인 만듦새는 돈 주고 시킨 일이라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해졌다 . 대체 누가 손을 댔기에 저렇게 대충 만든 것을 세워놓은 걸까 . 뭐라 그림을 그려놨지만 거리가 거리라 뚜렷하게 이거라 말하기는 어렵다
빌딩 ─ 메어리가 에스라 부르던 < 적 > 에게 별다른 저항도 못하고 제압됐던 일이 아직도 후유증으로 남았는지 저스티스는 전에 비하면 기력이 없었다 . 덩치는 거대했지만 말이다
하면 저번에는 어째서 작았느냐
빌딩에서 저스티스가 작게 나타났던 것은 상황에 맞게 자신의 크기를 조절했기 때문 아닐까 . 그렇다면 저스티스의 강함에 기복 따위 없다는 소리가 된다 . 저스티스에게도 이성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 행동 하나하나가 투박하며 언제 어디로 튈지 몰라 불안한 저스티스에게도 생각할 머리가 있다는 건가
「 G rrrrrr 」
도무지 그렇게 보이지 않지만 어쨌거나 ─ 저스티스는 싫은 내색 한 번 하지 않고 당신의 뒤를 따라왔다 . 당신이 세 번 걸으면 제 놈은 한 번 걸어 당신과의 일정한 간격을 지켰다 . 아주 칼같이 말이다 . 저렇게 잘 따라올 거면서 저번에는 왜 심통을 부렸는지
한 사람과 한 마리는 오래지 않아 표지판이 세워진 장소까지 다다를 수 있었다
드디어 분명해진 표지판의 그림은 아무래도 열차를 그린 듯 했다 . 썩 잘 그린 그림은 아니었다
오필리아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론멕은 정신을 집중했다. 다른 것보다 소정의 목적이라. 같이 있고, 관계를 가지는것만으로도 달성이 될 수 있는 목적이라는 걸까?
오필리아가 다른 사람을 데리고 다니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은 짐작하고 있었는데, 그녀가 바라는 것은 혼자 있는 것이 아니고 잠시라도 같이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예상을 보기좋게 뒤집은 것이었다. 물론 좋냐 나쁘냐를 따지면 대환영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론멕 데이드림에게 바라는 거 없는 호의는 부담이었다.
...사실, 마법과 오필리아에 대한 호의와 조금은 욕망에 솔직해진 마음이 부담감을 딸쳐줬다. 그 반대편에서는, 아직 오필리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 너무 긴 동행에 대해서 생각해보라고 제동을 걸었다. 뭐, 양쪽 작용 모두 잠시의 동행에 대해서는 환영이었으니, 론멕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건 그림자였다. 아니, 그림자였던 것이라고 해야 옳을까. 하늘로부터 내리쬐는 빛을 받아들인 자신의 반대편에 드리운 그림자가 자라난 것과 같은 존재. 그것은 가면을 쓰고 있었으며 색채가 가득한 세상-그렇다기엔 온통 사막 뿐이었지만-에서 이질적으로 색채를 잃은, 혹은 애초부터 색채가 존재하지 않았던 존재가 있었다.
그 형체는 인간과 유사했으나 온 몸에 돋아난 비늘과 풍겨오는 느낌이 보통 인간이 아님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는 묘하게 섬뜩한 그 느낌에 몸을 살짝 떨며 심호흡했다. 갑자기 달려들지는 않을까? 미지의 생물을 본 그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혼란스러워지려 하는 정신을 애써 붙잡으며 상황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지금 그가 추측할 수 있는 사실은 우박으로부터 자신이 멀쩡한 이유를 저 존재로부터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었다.
"....."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니 대화를 시도해 볼 법 하다고 생각했지만 정확히 뭐라고 이야기를 꺼내야만 할까. 그는 할 말을 고르듯 머뭇거리며 자신과 마주 선 존재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