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를로테는 넓게 펼쳐져 펄럭이는 아름답고 검은 날개를 상상했으나 실제는 이상과의 사이에서 다소간의 괴리를 가졌다. 그러나 환상을 깨부수었다고 하기엔 검은 안갯속에는 그 나름대로가 품은 분위기가 있었기에 마치 꿈 속이나 잠수함 같다고 생각하며 샤를로테는 누에의 내부를 편안히 즐겼다. 누에의 체력이 바닥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샤를로테는 누에가 체력을 회복할 때까지 무릎 위에 지치고 가여운 누에를 누이고 다독이며 시간을 보내야 했다.
이상하다 여길만한 것이라면 누에는 지쳤으나 샤를로테는 지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분명 이때쯤이면 팔이 아파왔던 것 같은 시간즈음에도 근육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정말로 죽었나 봐."
바퀴를 굴리며 담담히 흘렸다. 이야기책에 나왔던 유령들의 이미지가 머리를 잠식했다. 샤를로테는 자신의 모습이 흰 모포를 뒤집어쓰지 않은 여전히 금발 곱슬머리를 가진 제법 귀여운 소녀라는 사실이 내심 달가웠다.
날카로운 소음에 바퀴를 매만지던 손길이 멈췄다. 끊긴 바퀴자국 끝에서 샤를로테는 쫓기는 한 여인과 소녀에게 일어나는 일을 관조하고 있었다. 제 3자로서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가? 괴수를 보고서 일전에 마주쳤던 목 없는 흑표를 연상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저들도 당시의 샤를로테와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다른 것이라면 제 3자에게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당시의 샤를로테와는 달리 그들에게는 있다는 것이었다.
"누에는 저 아이, 이길 수 있어?"
샤를로테가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이며 소곤소곤 물었다. 뭔지 모를 끔찍스럽고 기괴한 생물체를 가리키기에 '저 아이'는 지나치게 수수한 호칭이 아닌가 싶지만.
제법 먼발치에 있던 적이라도 누에라면 샤를로테가 숨 한 번 쉬는 동안에 붙잡을 수 있었다 . 빛을 반사하지 않는 무광의 검은 제 주인이 바란대로 방심하는 배후를 노렸다 . 기습 - 아니면 암습이라 해야할까 . 누에가 변한 검에 발목을 베인 괴수는 자신의 발이 떨어진지도 모르고 걸음을 내디뎠다 제자리에 쓰러졌다
모르는 삼자가 본다면 한 편의 잘 만든 슬랩 스틱 개그로 보일 것이다
괴수 또한 자신에게 일어난 비극이 희극이기를 바랐을 거다 . 하지만 현실은 비정하여 바라는 대로 되는 법이 없다 . 뒤늦게 자신의 부상과 누에의 존재를 눈치챈 괴수는 자신의 발목을 자른 누에에 대한 분노로 눈이 멀어 목청껏 고함을 토해내었다
이것에 비하면 먼저 비명 지르던 여자와 소녀는 아무것도 아니다 . 뼈에 울리는 소리란 이런 것이라 보여주는 듯한 외침 . 그토록 분노한 괴수를 상대로 선뜻 나설 수 있는 자가 이 사막에 몇이나 되겠는가
─ 의외로 많을지도 모른다
생각지 못한 누에의 기습에 괴수는 자신을 잊었다 . 사냥꾼의 입장에 도취해 사냥감의 존재를 잊은 것이다 . 자신 또한 사냥감이 될 수 있다는 현실을 잊었다
< 콰직 >
사람이 신을 신발이 아니었다
한 뼘 넘게 신는 사람의 키를 높여주는 굽이라니 . 끝으로 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신발은 서커스의 피에로라도 거리낄 것이었다
용기와 만용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만이 신을 수 있을 신발 . 그것이 괴수의 머리를 부수었다 .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갖는 킬힐 - 저것에 차인다면 누에라도 아파하겠지
자세히 보니 자신의 팔에 돋아난 건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코트 아래에 있는 피부가 보일 리 없잖은가? 그렇지만 분명히 팔이 보였다, 비늘이 돋아난 팔이 코트의 소매 위로 분명히 보였다! 자신의 팔이 아닌 무언가의 팔이. 그렇게 생각하니 순식간에 찌릿하고 소름이 돋아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이 위치라면 자신과 가까이 있을 수밖에 없을 텐데. 부디 돌아보았을 때 아무런 일이 없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동시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건지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모순되게도 그의 정신에 파고들었다.
자신에게 솔직하기가 어디 쉬운 일인가 . 이제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겠다는 론멕의 결심은 가상했으나 오랜 시간 축적된 자신을 거스르는 행동 양식이 편할 리 만무했다 . 하지만 론멕이라면 . 어쩌면 론멕이라면 해낼 수 있을 지도 모르지
단번에 자신을 회복한 론멕에게 오필리아는 의외라는 듯 눈길을 줬다 . 론멕이 해낸 일이 너무나 이례적이어서 오필리아는 포커 페이스가 무너진 것도 모르고 눈 앞의 소녀를 바라봤다 .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있나 . 오필리아는 론멕의 질문에 대답을 아꼈다 . 론멕의 잠재력이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목숨값이라... 오필리아가 꺼낸 말을 입속에서 머금어보며 론멕은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여자아이한테 뭐라도 뜯어먹으려고 구해준 거냐고 비꼬고 싶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하기는 했지만- 그녀가 행한 기적의 규모나 지금까지의 태도를 봐서는 확실히 그녀와 함께하머 뭐라도 배우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문제점이라면, 지금 론멕이 가지고 있는 것이 전무하다는 사실. 애초에 본인이 어떤 이었는지조차 방금 떠올린 론멕이다. 나풀거리는 환자복과 주머니 깊숙히 있던 뿔태안경 정도를 빼면 가진 게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건 몸인데, 몸으로 갚겠다고 그대로 초면의 누님... 아니 사람에게 말하는 짓거리를 할 생각은 없는 론멕이니 결국 남은건... 론멕은 최선의 수를 떠올리고자 노력했다.
먼저, 구해주고 본인을 떠올리는걸 도와준 은인 오필리아에게 진심을 담아서 인사한다. 그리고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는, 말해본다.
"...목숨을 구해주고 아무것도 몰랐던 저를 도와준 거, 정말 감사합니다 오필리아 씨. 그런데... 제가 아직 머르는 것도 너무 많고 가진 것도 없어서... 지금 이대로면 제가 빚을 갚을 방법이 없을 것 같아서... 제가 당신을 도와줄 수 있을 만큼 성장할 때까지, 조금만 더 도와주실수 있으세요? 그러면 제가 꼭, 이번 삶을 걸고 은혜는 갚도록 할게요!"
-말하자면, 정면돌파. 론멕은 오필리아에게, 조금 더 도와달라고 말했다. (이왕이면 제자로 받아줄 수 있는지고 물어보고 싶었지만, 거기까지 물어보지는 못했다.)
"만약 지금 당장 원하신다면 이 연약한 몸뚱아리뿐이라도 내줄 수는 있지만..."
...끝에 굳이 불편한 답안지를 내놓아서 상대방을 난감하게 만든 것은, 나름대로의 협상의 기술일 것이다. 론멕이 악질이라서가 아니라.
오필리아는 장님이 아니다 . 론멕이 무일푼이라는 사실은 보면 알 터 . 론멕에게 조언한 내용을 따지면 오필리아는 비교적 객관적으로 론멕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 헌데 어째서 저렇게 무리한 요구를 꺼내는 걸까 . 론멕에게 빚을 지우려는 걸까 . 통화의 존재조차 불분명한 이 세계에서 현물적인 가치를 지니는 것이 뭐가 있지
" ... 언니는 연상이 취향이라서 . 거기다 난 네 미래에 투자하려는 것도 아니야 "
상상이 지나치다며 오필리아가 론멕의 말을 일축시켰다 . 주저 앉은 론멕에게 손을 내밀며 오필리아가 말하길 ─ 그녀가 론멕에게 바라는 것은 그런 육체적인 보상이 아니라 했다
" 오해하게 만들었네 . 하지만 삯은 삯이라 확실한 형태로 약속을 만들어두지 않으면 이후 우리의 관계가 복잡해질 수도 있잖아 ? 언니는 기본적으로 솔로 플레이어라서 . 다른 사람이랑 함께 행동하는 일은 드물거든
그러니 내가 바라는 만큼만 함께 있겠다는 거야 . 소정의 목적을 달성한 뒤에는 너도 나도 사요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