급박한 상황 속에서도 몸놀림이 가볍다 . 머리로 기억하는 게 아닌 몸이 기억하는 요령 - 당신이 의도하지 않아도 그것이 적재적소에 맞춰 발휘되었다 . 벽을 달리다시피 몸을 던져 아래로 내려오는 당신 . 아무리 내려오기가 올라가기보다 쉽다지만 이렇게까지 일사천리로 해결되는 것은 당신의 신체가 여느 사람 이상으로 단련되었기 때문이리라
자 그러면 고대하던 하층이다 . 당신은 자신이 어떤 원리로 상층에 날려졌는지 여전히 모른다 . 만약 같은 일이 발생한다면 두 번 다시 급소를 노릴 기회는 찾아오지 않을지도 몰랐다 . 당신은 신중해야만 한다
하층에 당신 외의 다른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 밖으로 통하는 현관문도 여전히 반틈 열린 채로 바란다면 당신은 혼자서 달아날 수도 있었다 . 하지만 그러지 않은 것은 당신이 이 문제의 해결을 바랬기 때문일까 . 모를 일이지 . 당신이 문제의 방으로 다가가면 전과 마찬가지로 신문지 붙여진 창문이 보일 것이다 . 굳세게 닫힌 문은 여전히 보통의 방법으로는 열리지 않는다
이름 없는 소녀는 검은 것이 넓게 펼쳐질 때 그 검은 것에 삼켜질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부름에 응하여 흑표와 소녀를 가로막는 벽이 되었고 소녀는 이러한 일시적인 술책이 오래가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팔에 난 상처를 부여잡고 침묵을 삼키던 소녀는 검은 것과 눈을 맞추며 말을 흘렸다.
"너라면 저 아이를 꿰뚫을 수 있어."
할 수 있지? 다짐시키듯 묻는 소녀의 눈에는 어느새 눈물이 말라 있었다. 소녀에게는 지금까지 살펴온 검은 것의 행태로 하여금 그것이 뾰족한 물체가 되어 한 점에 집중될 수 있으리란 걸 알 만큼의 추리력은 있었다.
당신의 그것은 아이다운 믿음이었다 . 하지만 이만으로도 충분했던지 흑표는 검은 것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반격을 당해야만 했다
공격의 순간에 맞춰 무너진 벽이 흑표의 공격을 흘려보내고 생겨난 빈틈에 검은 창이 찔러박혔다 . 이제까지 일방적으로 시달린 것이 거짓말처럼 보이는 공격력이었다 . 결코 얕지 않은 부상에 흑표는 크게 물러나야만 했으나 부상을 입기는 당신들도 매한가지라 추격의 기회는 허무하게 흩어졌다 . 흑표는 눈 앞의 사냥감이 그저 사냥당하기만 하는 약자가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 당신과 검은 것을 사냥하기 위해서는 제 살을 내놓을 각오를 다져야 한다고 깨달은 모양이었다
흑표에게 머리가 있었다면 분노와 통한으로 일그러진 표정을 당신들에게 향했겠지 . 몇 번 더 기회를 엿보던 흑표는 혼자만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될 거라 여겨 당신과 검은 것을 뒤로 한 채 사막의 저 편으로 사라져갔다
메어리가 한 말을 당신은 잊지 않았을 것이다 . 문을 부순다는 것은 빌딩 전체에 맞서 선전포고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 . 당신의 용기는 대단했지만 진정한 의미로 메어리의 말을 이해한 것은 아니었다 . 문울 부수고 들어간 당신이 가장 처음 마주한 것은 칠흑이었다 . 커튼을 쳐 외부로부터 빛이 들어오지 않게 된 방 . 암흑에 익숙지 않은 당신의 눈이 여기에 적응하기까지 수 초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 당신의 적이 나타나려면 앞으로 얼만큼의 시간이 남았을까 . 많아봐야 수 초일 거란 예감이 든다
저 속에서 당신이 급소라 부를 만한 것을 찾기 시작하면 단 하나의 의자 위에 비스듬히 엉덩이를 붙여 앉은 누군가가 보였다
눈이 어두워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으나 분명 사람이었다 .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 당신에 비하면 가련하기까지 한 체구는 당신의 머리에 유약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만들기에 부족하지 않았다
흑표가 자취를 감춘 뒤 긴장으로 팽팽해져 있던 폐가 찌그러지며 안도의 숨을 뱉었다. 잠시나마 멎어있던 눈물방울이 소녀의 눈으로부터 하염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휠체어를 타고있지 않았더라면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 더러워진 원피스가 모래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소녀는 소리내어 흐느끼기 시작했다.
"이리 와."
소녀가 검은 것을 껴안을 듯 양팔을 벌렸다. 위로받기 위해서 안을 것을 구하는 그 모습은 영락없는 10살짜리 소녀였다.
"싫어, 싫어... 어떻게 다들 그렇게나 비열하게 웃었던 거야? 왜 내가 그런 짓을 당해야만 했던 거야?"
밀려들어오는 기억들에 소녀는 진저리를 쳤다. 샤를로테 발렌타인이라는 소녀의 최후는 부정하고 싶은 만큼의 비극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소녀의 무감각할 것만 같던 회색 눈동자에 무언가가 깃든 것 같았다. 그것은 비극의 기억으로부터 초래된 몸에 익은 공포였을지도, 또 다른 무언가일지도 몰랐다. 소녀는 떨리는 목소리를 게워내듯 고통스러운 의문을 토했다. 검은 것을 품에 안고서 샤를로테는 고개를 숙였다. 차츰 진정이 되었는지 숨소리가 규칙을 찾기 시작했다.
눈물이 닦이는 동안 샤를로테는 속눈썹을 가뿐히 내려앉히고서 누에의 손길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처음에는 경계했던 듯도 했지만 역경을 함께 겪은 두 생물은 자연히 서로 끈끈해지는 법이고 샤를로테와 누에의 관계도 다르지 않았다. 샤를로테는 누에에게 다친 곳이 없는지 살펴보려 두 눈을 굴렸다. 흑표와의 사이에 벽이 되어 공간을 막아주었을 때가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엄마, 아빠가 보고싶어... 너는 엄마, 아빠가 있는 곳으로 나를 데려가려는 걸까?"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보아 목소리 형태를 한 대답이 들려올 것 같지는 않았지만 샤를로테는 앵두같은 입술을 오므려 물음을 던져보았다.
몇 번을 다시 생각해도 이건 운이 아니다. 일단 상황이 종료되었기에 그는 점점 더 냉정을 되찾았고, 그제서야 비늘을 발견했다. 자신의 팔에 돋아난 비늘을.
"이게 무슨...?"
잠시 냉정해졌던 그의 상태가 다시금 혼란에 빠지려 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지? 분명 자신의 팔이건만, 저 비늘은 아무리 생각해도 그에게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게 사실일까? 자신이 누군지조차 모르는데. 그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팔에 생긴 비늘을 만지려고 했다.
자신지 누군가인지를 떠올리는 것을, 마치 누군가가 막고 있기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그녀의 무의식 속에서, 진실을 기억해 내는 것을 격하게 거부하고 있는 것일까. 어찌 되었든 간에, 누군가는 그녀가 과거를 떠올리는걸 원하지 않는다는 거겠지. 하지만, 지금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내야만 여기에서 진정한 시작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일단 지금 당장 전부 알아낼 수는 없을 것 같지만. 항상 생각하고 추리하는 것부터 시작하자. 먼저 내 모습. 환자복을 입고, 앙상한 몸과 짧게 밀은 머리. 누가 봐도 환자의 그것이다. 이전에 떠올렸던 거지만, 사막에서 홀로 버려져있을 리가 없는 모습이다. ...그리고, 이렇게 나약한 몸의 환자(일 것으로 추정되는)인 자신이 멀쩡하게(물론 모래언덕을 오르는 길에 엄청 고생하기는 했지만, 어쨌든 간에 무사히 오르지 않았는가?) 사막에서 활동적으로 있는 것 역시 이상하다. ...질문을 바꿔보자. 여긴 어딘가? 이 지독하게 비현실적인, 마법과도 같은 곳에, 나는 왜 왔는가? ...혹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