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청림은, 그다지 친화력이 좋은 편이 아니었다. 사람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으나 굳이 먼저 다가서는 편이 아니었으며, 주위에 사람이 있는 것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었으나 굳이 잡아두지 않는 정도. 그러니까, 오려는 놈 안 막고 가려는 놈 안 막는다는 말씀이시다. 먼저 한 발자국 나서는 법을 모르던 인간이었기에 주변에 친구는 어찌 붙어있는건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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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씨, 취한다. 청림이 피식 웃으며 홀로 중얼였다. 얼굴에는 취기가 얼큰히 올라있다. 부서를 옮긴 뒤로 처음 참여한 회식이던가? 청림은 나름 사람들이 북적이는 자리를 좋아했다. 별 건 아니고, 재밌잖아. 원래 술자리란 시끄러우면 시끄러울 수록 좋은 것이라 했다. 누가 그랬냐고? 탕아 이청림 선생님께서 그리 일언하시더라. 청림이 왁자지껄한 식당을 둘러보았다. 당연하게도 익숙한 얼굴 따위 있을 리가 없다. 대신 저 초록색 병들은 반가울 정도로 익숙한데 말야. 요근래 술을 마신 기억이 없다. 부서 이동이니 어쩌니, 현실이 오죽 바빴어야지. 친구들이 듣는다면 네가 그만큼 술을 안 마셨다고? 하며 놀랄지도 모른다. 좋은 현상은 아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경찰 이청림, 직장 동료 앞에서는 제정신 잡아야지. 실수하면 X된다. 청림이 물잔을 쥐며 생각했다. 그녀는 더이상 술만 마시면 개로 변하던 스무살 망나니 이청림이 아니었다. 이제는—좀 늦은 감이 있지만—절제라는 것을 배웠고, 사회생활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적어도 인간 구실은 해야지. 스무살의 겨울, 술에 진탕이 된 청림을 보고 엄마가 등짝을 때리며 하던 말이 떠오른다. …정신차리자. 청림이 냉수를 들이키며 나직히 중얼였다. 술이 유난히도 달던 날이었다.
" …안녕하세요? "
청림은 고민 끝에, 제 옆자리에 앉은 누군가에게 선뜻 말을 걸었다. 차라리 사람들이랑 말을 하면 술을 덜 마실까 싶어서. 입이 쉬면 술이 당기는 법이다. 말을 안 하면 안주를 집어먹게 되고, 안주를 먹으면 술을 마셔야하거든.
…뭐 그러시단다. 청림이 최대한 온화한 표정을 지으며 제 옆자리의 사람을 바라본다. 상대의 눈에도 '온화'해보였을진 모르겠다만.
웃긴 거 나도 아니까 그냥 크게 웃어도 돼. 먼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자신도 분명 이런 외견에 나길수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봤다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르지. 마치 한국 이름 짓기의 희망편과 절망편을 보는 느낌이었다. 차민철과 나길수. ...어떻게 봐도 후자가 너무하잖아?
"한국에서 방학이라. 그럼 와서는 주로 뭘 했어?"
시골에 내려갔으려나? 시골 할머니 집 같은 게 한국에 있을 리 없는 그녀로서는 조금 부러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조부모님은 아직 건강하시지만 두 분 다 미국에 사시니까.
화연은 평소 다른 이들에게 친화력이 좋다. 용감하다 소리를 자주 듣는다. 길거리에서 처음 만난 사람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길을 묻고 아무렇지도 않게 길에서 울고 있는 아이들에게 손을 건네준다. 길에서 누군가의 물건이 떨어지면 주워주고 미용실에서는 이발이 끝날때까지 아주머니와 수다를 떤다. 누군가는 그에게 착하다고 말하겠고 누군가는 오지랖이 넓다고 말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면이 회식 같은 친목 장소에서는 강점이 된다. 당장 이번 회식만 해도 벌써 한명과 인사를 나누고 대화했으니
화연은 동환과의 짤막한 대화를 마치고 자리에 앉아 식사를 계속한다. 화연은 고기를 좋아한다. 아무래도 이름의 '화'자가 직화구이할 때 火자여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삼겹살을 좋아한다. 양념갈비를 좋아한다. 항정살을 좋아한다. 대패삼결살을 좋아한다. 우삼겹을 좋아한다. 소고기를 좋아한다. 가브리살을 좋아한다. 부엌에서, 식당에서, 옥상에서, 캠핑장에서, 친구 집에서, 술집에서, 모든 장소와 종류의 고기를 좋아한다. 혼자 집에서 저녁으로 음료와 함께 삼결살을 구워 쌈장에 찍어 상추에 싸서 먹어도 맛있고 친구들과 함께 캠핑장에서 바베큐 파티를 하며 먹어도 맛있다. 화연은 속으로 고기에 대한 예찬을 하며 기분 좋게 식사를 하고 있었다.
술은 마시지 않는다. 술을 마시면 의식이 흐려지고 의식이 흐려지면 맛을 느끼기 어려워진다.
옆자리 앉은 여성이 아무리 초록병으로 초록 산을 만들고 술값으로 팀이 해체 되진 않을까 걱정이 들기 시작할 정도로 마셔도 무시하고 그냥 먹었다.
화연은 먹는 것과 사교를 나누는 것을 엄격히 구분한다. 먹으면서 말하지 않고 말할때에는 절대 먹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 이런 일이 생긴다.
"... "
입에 음식이 있을 때, 누군가가 말을 거는 일.
그때마다 화연은 빠르게 음식을 씹고 제대로 씹지도 않은 채 넘겨버린 후 물을 마셔 제대로 넘어가지 못한 음식물을 처리한다..
음식을 씹고 삼키고 물을 마시느라 바로 인사를 받지 못했지만 화연은 그저 그녀가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랐다. 취기가 올라와 옅은 붉은 빛 얼굴을 한 동료가 나름대로 적의가 없는 표정을 지으며 자신에게 인사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