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 확실히 알러지라던가 있으면 곤란한게 이만저만이 아니니까요~ 단순히 식감을 싫어하는 경우도 많구요~"
그녀는 어느쪽이냐 묻는다면 뭐든 가리지 않는쪽에 가깝다 할수 있었다. 해산물 또한 상당히 좋아하는 편이었고 김을 제대로된 한국식으로 먹는 방법 또한 꿰고 있을 정도니까, 하지만 그만큼 기준 역시 까다로웠기에 '시도는 좋았으나 왜 만들었는지 모를 음식' 같은 것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예를 들면 한때 수많은 사람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는 과일맛 치킨이라던가, 파란라면, 초록떡볶이 같은 것들처럼...
"그건 좀 고달프시겠네요..."
효율이 썩 좋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힘을 쓰는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한 것인지, 어느쪽이든 조금 씁쓸하다는건 무시할수 없었다.
애쉬는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선다. 조각배 모양 레스토랑은 오션뷰가 장관이다. 직원에게 예약한 시간과 이름을 대자 창가 자리로 안내해준다. 그는 일행이 마저 오면 주문하겠다고 했고, 직원은 과할 정도로 고개를 끄덕이고 마저 다른 손님의 주문을 받으러 갔다. 그는 넘실거리는 바닷가를 보며 일행을 기다렸다. 15분 정도가 지나자 회색 머리카락을 포마드로 말끔히 넘기고 리넨 정장을 입은 남성이 들어온다. 그의 이름은 헤이즈 키르스텐으로, 애쉬의 친동생이자 올해 27살의 앞날 창창한 청년이다. 형인 애쉬는 과거 뉴욕의 살인 전담팀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영향력이 강했지만 현재 뉴욕에서는 비공식적으로 은퇴했다 알려져있다. 종사하는 분야는 완전히 다르지만 애쉬의 계보를 잇듯 헤이즈는 형 못지않은 성공을 거뒀다. 지금은 뉴욕 월스트리트에서 투자 조언가로 일하고 있다. 레스토랑에서 메인 쉐프로 일하는 아내와 귀여운 두살배기 딸도 있다. 오늘은 한국에 방문차 왔고, 애쉬와 점심 식사가 예정되어 있다.
"왔냐." "예, 형님. 근 1년만입니다." "네가 아주 바쁘니 말이다."
애쉬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헤이즈는 속으로 안타까움을 표했다. 형님은 달라진 점이 아주 많다! 비록 29세지만 아주 큰 풍파를 맞았다. 늘 호기롭고 예리하던 눈은 안경 너머로 봐도 깊고 차분해졌고, 이제는 장갑을 늘 끼고 다니고, 못본 사이 많이 수척해지기까지 했다. 애쉬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끌어 안았다. 형식적인 인사에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이러고 싶지 않지만 부모님을 원망하고 싶다. 둘은 애쉬가 부모와 틀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다. 애쉬가 먼저 돈독히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을 건데, 그럴 형제는 이제 없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이게 현실이다. 어릴 때처럼 투닥거리며 싸우고 화해할 만큼 생각이 없지도 않고, 이제는 서로 다투면 그 이후의 인생을 책임져야 할 나이다. 사회에 나온 지금은 어린아이처럼 행동하는 것도 힘들다. 그건 가족이라도 별반 다르지 않다. 애쉬는 서로의 길을 걷겠다며 집안과 연을 끊었고, 가만히 두고볼 수 없던 헤이즈가 중재자를 도맡겠다 선언했을 뿐이다.
딱딱한 분위기와 달리 식사는 만족스럽다. 에피타이저부터 시작해 메인까지 아주 완벽했다. 애쉬는 메인 요리로 나온 버터에 구운 관자를 나이프로 썰어 입에 넣었다. 이미 동생은 와인까지 한잔 걸친 상태다. 그동안 대화도 여럿 나눴다. 어떻게 지냈냐, 주식 망하는 꼴 보며 살았습니다, 여전히 주식판은 네 인성처럼 바닥이냐, 형님도 만만치 않습니다의 순서를 지났고, 지금은 침묵이다. 이제 제대로 된 대화의 물꼬를 틀 때다. 용건 말이다. 헤이즈는 냅킨으로 입을 툭툭 두드렸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뭐니." "그리 좋은 얘기는 아닙니다, 형님." "그럼 하지 마." "그래도 안 하면 제가 혼나요." "누구한테, 부모에게? 언제까지 부모 밑에서 빌빌 길 생각이냐." "부모님께 혼나는 건 시도때도 없으니 별 생각 없지만, 집사람에게 혼나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가족인데 챙겨야 하지 않겠냐고 오늘도 전화로 한참을 얻어맞고 왔습니다." "그래, 에블린 성격은 잘 아니 별 수 없지. 말해 봐라." "이제 슬슬 집에 돌아오시는 건 어떻겠냐고.."
애쉬는 입맛이 뚝 떨어졌는지 으깬 감자를 포크로 휘저었다. 감자가 엉망이 되는 꼴을 보며 헤이즈는 얼어붙은 분위기를 깨지 못하고 눈치를 봤다. 애쉬가 침묵 끝에 질문했다. "에블린은 아니겠고 누가." 헤이즈는 애쉬의 시선을 피했다. 꼭 죄를 지은 것 같았다. "부모님 두분 다요."
또 시작이다! 애쉬는 진절머리가 났다. 이렇게 대화를 하다 꼭 부모님 얘기를 물어온다. 그나마 연락하는 동생이지만 이럴 때는 연락을 끊어버리고 싶다. 물론 그도 잘한 것은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그도 살고 싶었다.
"왜. 또 아버지가 그 지긋지긋해서 총맞을지도 모르는 민중의 곰팡이 짓은 작작 하고 얌전히 돌아와서 너처럼 경제를 좌지우지 하는 대단한 일을 해야하지 않겠느냐고 설득하라 네 아내에게 닦달을 하시더니." "아뇨,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뭔데." "가족이니까..돌아오면 좋을 거라고. 보고 싶으시다고.."
그는 쾅 소리가 나게 나이프를 내려뒀다. 지나가던 종업원이 깜짝 놀라 애쉬를 쳐다봤다. 애쉬는 지나가라는듯 손을 휘휘 저었다. 종업원은 미처 시선을 떼지 못하고 주방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계속 그를 흘끔흘끔 쳐다봤다. 아마 촉새처럼 말싸움이 났나봐요, 하고 일러바칠게 뻔하다. 애쉬는 헤이즈를 똑바로 마주봤다. "가족같은 소리 하네. 개좆같은 소리 하지도 마라." 헤이즈가 반발했다. "형님!"
"내 틀린말 했냐. 왜, 또 혼처 알아본다더냐? 아니면 곧 30 다 되는 놈이 아직도 참한 처자 없고 앞날도 참담해서 넌더리가 난다고 하디." "어머니도 그때 말실수를 하셨다고 후회하셨어요!" "후회라고?"
그는 어머니가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외치던 날이 떠올랐다. 네가 내 말 듣고 고집만 안 피웠어도 앞날이 이렇게 참담하지는 않았을 거다! 그는 화도 내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유일하게 기댈 가족마저 자신을 끔찍하게 싫어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맹세컨대 잘못한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그 망할 순리를 거스른 것 뿐이다. 하지만 그게 무슨 죄란 말인가! 그는 그 이후 어머니가 갑자기 좋은 집안의 여자를 알아왔고 무려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헤이즈의 동료라며 슬슬 그에게 꼬리를 치자 결심했다. 죽어도 이 집안과 엮이지 않을 것이라고.
"내 그렇게 거절까지 했고, 그래서는 안 됐을 상황이다. 주변에서도 안 된다 했는데 옳다구나 혼처만 알아보지 않았더라면 나도 이렇게 까진 하지 않았을 거다. 어머니와 아버지껜 자업자득이라 생각하라 전해라. 뭣하면 집안에서 지워버려도 좋다고 하든지. 매일 너는 가족이 아니라면서 왜 진짜 지우지 않는지도 모르겠구나." "형님, 그래도 부모님이니 그렇죠. 정말로 자식을 버리는 부모가 어딨겠어요!" "이미 한번 버리지 않았냐." "버렸다뇨, 그건..납득하기 어려워서.." "대체 그놈의 납득이 뭐길래!!! 빌어먹을 납득이 뭐길래 7년을 넘게 괴롭혀!!"
애쉬는 기어이 테이블을 주먹으로 쿵 내리쳤다. 레스토랑 안에서 시선이 집중됐고, 그는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 그날도 많이 참았다. 지금도 참고있고.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못 된다고 생각은 안 하든!!" "그렇지만, 형님." "형님같은 이기적인 소리 하지도 마라!! 내가 7년 전에도 그랬고, 1년 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생각하면 속에서 불이 나는데 네가 살살 부채질 하는 꼴을 보니 입맛도 다 떨어진다, 그만 날 좀 내버려 둬라. 내버려 두라고!" "형님.." "잘 먹었다. 내가 낼 테니 너는 일이나 마저 보고 가라. 에블린에겐 미안하다 전하고."
애쉬는 그대로 뒤로 돌아 계산대를 향해 걷는다. 기다리고 있던 종업원에게 나머지는 팁이니 필요 없다며 봉투를 내밀고는 레스토랑을 나섰다. 둘이 먹은 양의 정확히 1.5배 되는 돈이다. 돈을 확인한 종업원은 횡재라는 양 입꼬리가 귀에 걸렸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메인은 단 한입밖에 먹지 못했지만 벌써부터 체할 것 같이 답답하다. 레스토랑을 나서자마자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며 마저 일하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은 순찰이 있고, 나머지는 대기근무가 있는 날이다. 그 시간도 전부 순찰로 때울 생각이다. 이젠 정 떨어진 가족보다 일이 더 중요하다. 중재자니 뭐니 하면서 저기서 질질 짤 동생따윈 이제 알 바 아니다. 그는 가족관계처럼 흐려진 연기를 뱉었다.
"경찰 일을 하는 이상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그래도 여긴 총기 소유가 불법이니까 그나마 낫더라."
경찰에 몸담은 지난 몇 년 동안 뼈저리게 느낀 바가 있다면 사람에게 무기를 쥐어 줘선 안 되고 무기를 사람에게 쥐어 줘선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그녀 역시 이제 어지간한 사건 현장은 거뜬히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이 일에 익숙해졌지만, 아마 미국에서 일했다는 상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고생을 했겠지.
"자, 다시 한 번 건배!"
상대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고 자신의 잔도 채운 뒤 또다시 잔을 들어올려 살짝 부딪혔다. 이번 잔 역시 무리없이 술술 들어갔다. 응, 아직까지는 끄떡없어. 그러던 그녀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나 내 능력이 뭔지 말 안 했지? 나 부상을 고칠 수 있어."
그러니까 다치면 나한테 와, 병원 가지 말고. 그렇게 말하며 자기 자신을 가리켜 보였다. 외국에서 들어왔으면 아직 의료보험도 없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