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이 끝나고, 지금이라면 어김없이 집에 가거나, 그가 주인공이라고 부르는 태호와 함께 게임을 하고 놀 정수였으나, 지금은 집에 갈 수 없었다. 그가 살고있던 집은 그의 의형 조한서씨가 계약하여 몇년씩 더부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최근 조한서씨가 팔이 날아가 의수를 맞춰야 했기 때문에 정수가 기생충 처럼 살아가던 집의 보증금을 뺐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정수도 나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지금, 새로운 잘곳을 구하고 있었다.
"첫주는 주인공(한태호)집에서 버티고, 두번째주는 뫼천(강산)이 집에서 버티면 되겠지, 집은 잘 살아 보이고, 사람을 쫓아낼 것 같진 않았으니까"
한순간에 이 넓은 서울에서 노숙하게 생긴 정수의 눈앞은 깜깜해졌다. 의념속성은 섬광인데 왜 인생은 이렇게 어둠 뿐인것일까
가끔. 달에 세네 번 정도, 지나간 무렵의 꿈을 꿨다. 그건 평온한 가정집에서의 시절일 때도 있었고, 나의 인생 대부분을 차지한 방랑길에서의 일일 경우도 있었다. 하루하루 지나며 버석히 말라가던 추억이 꿈을 통해 비집고 나와, 햇볕과 물을 받을 때. 그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아 나는 꿈을 반겼다. 책상 한켠에 차지한 조금 두꺼운 노트는 그런 꿈을 기록한 꿈일기이자 추억의 기록이었다. 오늘도 그런 꿈을 꾼 날이었다. 천장 없는 옥상에서 홀로 누워있던 날이었다. 시인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늘 그랬듯 자신도 딱히 찾지 않았다. 그저 보이는 밤하늘을 차분히 보고 있을 뿐이었다. 나이는, 아마 열 살 전이긴 했던 것 같다. 여덟이던가? 아홉이던가? 이런 날들이 하루이틀은 아니었던지라 정확히 언제인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침낭에 애벌레 마냥 들어간 채 잠이 오지 않아 말똥거리는 눈을 깜빡거리던 기억. 당시에는 잘 몰랐지만 자신은 밤하늘을 좋아했다. 수많은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지나가다 만나게 된 인물은 아마 완전한 초면은 아닐 것이다. 특별반에서 본 적이 있던 것 같았다. 대화를 나눈 기억은 없었지만 피곤한 인상의 보랏빛 눈이 기억에 남았다. 잘 익은 포도인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손을 조심스레 뻗어 이 쪽을 보고 있지 않은 그의 어깨를 톡톡 두드리려 했다.
"물론 괜찮아요. 누구 한 사람만이 부르는 별명이라는 건 꽤 좋은 느낌이 든다고 생각합니다."
그저 웃어보였다. 그러고보면 아주 예전에 파프리카라는 이름의 영화가 있었다는 걸 들은 적이 있는데. 물론 본 기억은 없었다. 애시당초 영화를 본 적이 없었다. 언젠가 볼 수 있을까? 누군가와 함께. 그런 생각이 사뿐히 내려와서, 아주 잠시 말을 늦게 이었다.
"네. 기억하고 있습니다. 밝은 분이라는 인상이 강했지요."
이름도 속성도, 무기도 기억하고 있었다. 단지.. 미소를 지은 채로 슬그머니 고개를 기울이며 상대를 보았다. 묘하게 걸리는 게 있었다. 뭔지 명확히는 알 수 없었으니 그때도 지금도 말로 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탐정도 뭣도 아니며 앞으로 오래 함께하면 좋을 사람을 캐내는 것에도 취미는 없었다.
거짓말쟁이든 악한이든 상관 없어요. 누구나 더 나아질 권리는 존재하죠?
"네. 잘 부탁드립니다. 그런 이유로, 당신에게 말을 건 가장 큰 이유에 대해서 이야기할까 합니다."
오늘 꾼 꿈이 과거 밤하늘의 천장을 바라보며 자던 기억을 선명하게 만들어주어서, 스치듯 들은 그의 말이 평소보다 더 머리에 박혔다. 가출 청소년인가, 아니면 쫓겨난 입장인가. 이 시대의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사정이 있으며, 그 중에는 혼자일 수 밖에 없는 이유도 많았다. 그러니,
"지낼 곳이 저희 집에 오시겠습니까? 빈 방이 있을 만큼 넓은 집은 못됩니다만, 한 사람 정도가 지낼 공간은 넉넉합니다."
그러며 지은 미소에는 무심코 이상한 게 묻어나왔을 것이다. 예를 들면, 그 과거 벌레들과의 전투가 떠올라 생긴 피로와 걱정, 같은 것.
"....하늘을 이불로 삼는다는 건 표현으로만 낭만적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으니까, 걱정됩니다."
거실 하나, 방 하나. 혼자 살기 좁지 않은 수준의 집이지만, 그런 것 치고 넓은 편이기도 했다. 참고로 이는 내가 전에 살았던 그 평온한 가정집에서 도와준 것이기도 했다. 아마 시인이 말 한마디 얹어준 것 같기도 했으며, 그를 따라 다니면서도 정기적으로 선물과 함께 들렀던 것도 그들이 도와준 이유겠지.
"그건, 글쎄요?"
나는 그저 부드럽게 웃었다. 아주 살짝, 대답을 피했다. 숨길만한 이유는 아니었지만, 딱히 말하고 싶지 않았다. 나의 취향이나 취미에 관련된 문제기도 해서 부끄럽다는 게 큰 이유였다. 그래서 말을 돌렸다.
"그런데 다행이군요. 저는 혼자 사는 건 생각보다 익숙하지 않아서요. 혼자 있으면 나태해지는 편이라. 그러니, 가능한 누군가 있어주는 편이 좋지요."
대놓고 표현하진 않았지만 살짝 돌려서 말했다. 오래 있어도 문제 없다고. 상대가 불편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