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라니에서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에 사내는 강하게 겁을 먹어서 예성을 바라보며 살려달라는 눈빛을 보였다. 예성의 눈빛이 자연히 동환에게 향했다. 누군지 모를 이였지만 뼈를 부러뜨린다는 그 말이 과연 허세인지, 아니면 진심인진 모르나 경찰로서 가만히 볼 수는 없는 모습이었다.
"거기까지. 당황하는 범죄자를 그렇게 자극해서 좋을 건 없습니다. 그냥 이쪽으로 인계해주면 충분합니다. 협조 감사합니다."
명확하게 알 순 없었으나 그대로 두면 정말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둘째치더라도 저 사내는 정말로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예성은 고개를 저었다. 애초에 저 사람은 대체 무슨 사람인건지. 고라니의 뼈를 박살내는 것은 보통 사람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게 가능하다니. 근력과 관계된 익스퍼를 가지고 있기라도 한 것인지. 아니면...
"남은 것은 제 쪽에서 알아서 하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이어 예성은 동환이 있는 쪽으로 다가간 후에 단번에 소매치기를 자신의 팔로 잡으려고 손을 뻗었다. 만약 방해하지 않았다면 단번에 사내의 다리를 차서 넘어뜨린 후에 제압했을 것이다. 물론 수갑은 없으니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손수건을 이용해 두 손목을 꽉 묶으려고 했을 것이다.
정확하게 단번에 소매치기를 제압한 후, 예성은 등을 무릎으로 약하게 눌러서 도망치지 못하게 만들었다. 수갑이 있었다면 바로 채웠겠으나 안타깝게도 휴가중인 경찰에게는 수갑이 없었다. 일단 핸드폰으로 다시 연락을 해서 근처 지구대, 혹은 파출소에 현 위치를 알린 후 예성은 다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뒤이어 예성은 동환이 꺼내는 경찰 수첩을 확인했고 그 얼굴을 바라봤다. 유동환 순경. 어디선가 들어본 이름 같다고 생각을 하나 예성은 굳이 더 생각을 하지 않기로 했다. 적어도 얼굴은 자신이 아는 얼굴이 아니었으니까. 그럼 그것으로 충분한 일이었다.
"그런가요? 다시 한 번 협조 감사합니다. 나중에 소속된 곳에 잘 이야기해드리겠습니다."
그러면 차후 포상도 어느정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예성은 생각했다. 설사 아무것도 없이 그냥 넘긴다면 자신이 직접 찾아가서 이야기를 하면 될 일이었다.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는 그는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아니요. 오히려 경찰로서 확실한 대처였습니다. 애초에 경찰수첩을 휴가라고 안일하게 집에 두고 온 저의 불찰이었습니다. 허나 믿어주시고 범죄자를 놓아주지 않아서 감사합니다."
그리 밝고 다정한 미소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나름대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를 지은 후 예성은 동환의 얼굴을 다시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몸을 바라보다 이야기를 했다.
"꽤 단련한 모양이로군요. 얼마나 운동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그 듬직함과 힘이 시민을 위해서 써줬으면 합니다. 당신도 경찰이라면, 경찰로서의 의무를 알고 있을테니까요."
오른손 엄지를 살짝 올린 후 예성은 경찰차가 오는 것을 기다리려는 듯, 범죄자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는 듯, 그 움직임이 정확했다.
"그 마음가짐은 나쁘지 않지만, 주어지는 보상은 받아두는 게 좋아요. 공을 세웠으니, 그에 마땅한 보상은 당연히 주어져야 하는 것이니까요. 누구 한 명이 그런 것을 거부하면 그것을 받지 않는 것이 당연한 분위기가 되기도 하고요."
나름 자신의 기준 하의 정론을 이야기하나 과연 상대가 받아들일지는 예성도 알 수 없었다. 만약 그래도 내켜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더 이야기할 생각은 없었다. 계급은 자신보다 낮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생각을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그 이상은 자신이 하고 싶은대로 하면 된다고 생각하며 예성은 범죄자의 등을 누른 무릎에 힘을 더 꽉 주었다.
"...저기."
허나 들려오는 말들은 역시 어색한 느낌이었다. 야생동물? 오리걸음으로 산을 왕복? 단련? 대체 이 사람은 뭐하는 사람이란 말인가. 아니, 그 전에 경찰 일을 하면서 그런 것들을 할 여유가 난단 말인가.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고 생각을 하며 멍한 표정을 짓던 예성은 잠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경찰 업무 중에 야생동물과 직접 싸우거나 그렇게까지 하드 트레이닝을 해야만 하는 그런 게 있습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일반적인 단련 법은 아닌 것 같은데. 물론 그런 단련을 좋아한다면 상관이 없습니다만."
다른 건 몰라도 고라니라던가 야생동물이라던가. 그런 것은 역시 자신의 상식 밖 이야기였기에 예성은 생각을 애써 정리하며 동환에게 되물었다.
"애초에 왜 야생동물과 싸우는 겁니까? 어릴 때부터 그런 훈련이라니. 혹시 학대라도 받으신겁니까? 그것도 아니면, 극한의 단련이라도 하시고 계시는겁니까?"
갑작스럽지만 그의 취향을 밝히자면, 그는 작고 한적한 곳을 좋아했다. 술집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끄러운 주점 역시 나름의 특색이 있어 좋아했지만, 가장 좋아하는 술집은 작고 조용한 펍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몇명의 단골만이 존재하는 작은 펍에서, 그는 카운터 앞자리에 앉아 조용히 맥주를 마시고 있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래, 한적하게 술을 마실 수 있는 것 까지는.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함께 술 마실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을까. 한적한 것을 좋아하는 것과, 홀로 쓸쓸히 마시는 것을 좋아한다는 것은 전혀 의미가 달랐으니.
누구 아는 사람을 부를까.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고개를 내저으며 포기했다. 한국에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였다. 그에게 친구같은게 있을리가 만무했다. 심지어 그냥 친구가 아닌 연락처가 있는 친구라면 더더욱.
"그냥 혼자 마시자."
가볍게 한숨을 뱉으며 혼잣말했다. 뒤에 누구 활발한 손님 하나가 들어온 것 같긴 하지만... 말을 먼저 걸기도 껄끄러우니 가만히 있기로 했다.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으나 예성의 눈빛은 점점 멍해져가고 있었다. 4~5살에 야생동물과 싸우도록 산을 왕복하게 한다니. 정말로 괜찮은 것인가. 아무리 봐도 아동학대 같은데. 그런 생각만 하며 예성은 생각을 애써 긍정적으로 정리하려고 했다. 아니. 그 전에 대체 어디에 살고 있었기에 야생동물을 그렇게 많이 봤다는건지도 예성은 이해할 수 없었다. 산골 깊숙한 곳에서 지냈던 것인가. 그런 생각을 하며 애써 생각을 멈춘 후 예성은 헛기침을 여러 번 했다.
"그야 그렇게까지 했다면 당연히 그렇게 되겠죠."
뭔가 그 이상의 코맨트를 할 수는 없었기에 예성은 일단 그 정도로만 이야기를 하며 그의 피지컬을 보았다. 익스퍼가 아니라도 단련을 하면 사람이 저렇게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으며 예성은 자신의 상식을 정리했다. 나중에 소라를 만나면 그런 이가 있었다고 이야기를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마음 같아선 저런 이를 스카웃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으나 스카웃은 자신의 담당이 아니라 소라의 담당이었으니 나중에 추천만 슬쩍 해봐야겠다고 다짐하며 예성은 슬슬 오고 있는 경찰차를 바라봤다.
"적어도 전 특별한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 다른 이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그 정도로 단련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말이에요. 특별한 것이 나쁜 것도 아니고요."
세간이 알지 못할 뿐, 이 세상에 특별한 힘을 지닌 이는 많았다. 물론 상대가 익스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저런 결과물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것이라고 예성은 생각했다.
"적어도 고라니의 뼈를 부숴버리는 것은 보통 사람이라면 어림도 없으니까요. 아무튼 경찰이 온 모양이군요. 저는 이 범죄자를 인계하겠습니다."
뒤이어 예성은 눕혀진 소매치기를 다시 일으킨 후에 팔을 꽉 잡아 도망치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동환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하나만 묻고 싶네요. 그런 체격이 있다면 격투기 선수나 다른 것도 할 수 있었을텐데 왜 경찰이 되신거죠? 경찰 일을 하면 당신에게 있을 그 힘을 오히려 자제해야 할 일이 많을텐데."
여기서 케이시 나이팅게일의 취향을 짚고 넘어가자면, 그녀는 한적한 펍에서 혼자 조용히 술을 마시는 것도, 여러 사람과 떠들썩하게 주점에서 부어라 마셔라 하는 것도 모두 좋아했다. 혼술에는 혼술만의 장점이, 단체로 마시는 것에는 또 그만의 장점이 있는 법이다. 단순히 술이 들어가기만 하면 뭐든 좋은 게 아니냐고 묻는다면 착각이다.
그런 면에서 그녀는 최근 새로 찾은 이 작은 펍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다소 구석진 자리에 위치하는 펍은 주로 단골들 위주로 돌아갔고, 그만큼 분위기 또한 조용했다. 그 무엇에도 구애되지 않고 혼자 생각을 정리하면서 마시기에 딱이었다. 게다가 여기 생맥이 아주 기가 막히단 말이지.
몇 번 보지도 않았는데 주인장과 벌써부터 안면을 트는 것은 그녀에게 아주 손쉬운 일이었다. 반갑게 인사를 건네면서 그녀는 익숙하게 카운터로 다가갔다. 자리에 앉고 나서야 두 자리 떨어진 곳에 처음 보는 사람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것도 어딘가 혼자 술을 마시는 게 아쉬워 보이는 사람이.
뭐, 새로운 만남은 늘 좋은 일이지. 속으로 어깨를 으쓱한 그녀는 자리를 한 칸 옆으로 옮겼다.
"여기 맥주 되게 맛있지 않아요?"
가까이 다가간 뒤 웃으며 말을 걸었다. 혼자 마시는 게 영 아쉬우면 즉석에서 새로운 친구를 사귀면 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