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적거리는 카페 안에서 홀로 고독해보이는 소녀의 근처는 비어있었다. 몇 명 다가가는 사람은 있었어도 끝내 등을 보였다. 어쩌면 소녀가 보석같은 빛의 차를 다 마실 때 까지 앉는 사람은 없을 지도 몰랐다.
"혹시, 앞 자리에 올 사람이 없다면 제가 앉아도 괜찮을까요?"
그런 그녀에게 한 소년이 말을 걸었다. 부드럽고, 또 상당히 정중한 목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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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학교란 장소는 어색했지만 사람이 몰리는 장소는 적당히 익숙했다. 어딜가나 사람이 모이는 장소는 있는 마련이었고, 소년은 종종 그 사이에 낑겨 이득이나 손해를 보기도 했다. 오늘은 손해를 보게 될까? 2분 정도 고민하다 블루베리 스무디를 주문한 소년은 빈 자리가 영 보이지 않는 카페 내부에서 곤란한 듯 웃었다. 혼잡함 속에서 무척 바른 자세로 걷던 소년은 한 소녀와 빈자리를 발견했다. 망설임은 없었고, 곧 말을 걸었다.
"혹시, 앞 자리에 올 사람이 없다면 제가 앉아도 괜찮을까요?"
조금 외로워보인다거나, 아무튼 그런 생각은 다가가면서 들었다. 그랬기에 남들보다 오지랖이 아주 조금 더 넓은 소년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참고하자면 이 생각이 맞는지는 소년도 모른다. 소년의 직감이 맞은 적은 길 찾을 때 말고는 없었다.
사람이 몰리는 카페에서 자신에게 말을 스스럼없이 건네는 파필리오는 알기 힘든 느낌입니다. 조금 독특하다고 느꼈을까요.
"...앉아도 상관없습니다." 차를 홀짝이던 지한의 앞에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건네자 그를 올려다보는 지한은 무언가 애매한 것처럼 고개를 갸웃합니다. 뱀눈? 아닌데.. 같은 뜻을 알기 어려운 말의 중얼거림이 흩어집니다. 그거랑은 별개로. 앉아도 상관없다는 말은 쉽게 나왔습니다.
"...." 앉게 해준다고 해도 딱히 말을 걸거나. 그러지는 않고 차를 홀짝입니다. 옆에 놓여있는 책은 도서관에서 쉽게 빌릴 수 있는 소설책 류겠지요. 관심을 가질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힐끔 쳐다보는 건 약간이지만 호기심을 가진 모양입니다.
그는 다소 과장스레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나비가 내려앉듯 소리 없이 사뿐했다.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쳐져 있었고 시선이 맞닿으면 부드러이 웃겠지만, 분위기나 느낌은 경박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상냥함과 적절한 배려, 예절. 소년을 꾸미는 건 그런 것이었다. 잠시간 있던 소년은 슬쩍 책을 보고서는 말을 걸었다.
"어떤 이야기를 좋아하시나요?"
턱을 괴고, 소설책을 바라보았다. 읽은 적은 없었다. 소년의 독서 취향은 상당히 편중되어 있어 졸업할 때라 해도 도서관에서 읽은 책을 목록으로 만들면 그리 길진 않을 것이었다.
"공부를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독서는 즐거워요. 저는 취향이 다소 치우쳐져 있지만요."
소녀를 바라보던 소년이 잠시 말을 골랐다. 이름 모를 소녀를 뭐라고 불러야할지 고민하다가 무난한 선택지를 골랐다.
이름 모를 소녀는 뻣뻣하지만 대화를 싫어하진 않는...것 같았다. 아직 확신까진 못한 소년은 약간의 웃음소리로 그녀의 대답에 반응했다. 예전에 저런 사람이 등장하는 이야기를 읽은 적(혹은 들은 적)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이야기더라?
"음..."
미지수라는 대답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잠깐 고민하던 소년은 "아직 취향을 모르겠다고 이해하는 게 맞을까요?" 하고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다르게 이해했다가 나중에 곤란해지는 것 보단 지금 바로 묻는 게 나았다. 혹시 모르지 않나. 저 미지수라는 게 정말 미지수인, 미래의 수학자일수도. 또 덧붙이자면 소년은 수학이란 과목을 좋아해본 적은 없었다. 그럼 그 쪽 대화는 피해야지.
"네. 확고한 취향은 적습니다." 사실 지한의 취향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았던 지한주의 탓이지만. 지한의 취향은 꽤 애매합니다. 어제 좋아했던 것이랑 동일한 맛인데도 별로라고 할 때도 있으니까 말입니다. 본인 말로는 영 아니게 들린다. 혹은 영 아니게 보인다.라고 하던데. 무슨 기준일지.
"네. 파필리오 씨." 그래서 뱀눈이었던 걸까. 라고 생각하는 지한입니다. 미리내고라는 것은 고개를 끄덕입니다.
"미리내고 학생이 많습니다." 일반반이 아니라면 좀 더 가깝겠군요. 라는 말은 하지 않으며 슬쩍 보면. 일반반을 흘깃 봤을 때엔 없었던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보네요. 좀 늦은 특별반일지도 모르겠다는 기분입니다. 공통점이라는 건 좋아보이지만...?
"중간으로 유지하는 것이지요." 너무 넓으면 찾기 어렵고. 너무 좁으면 편협하다는 생각을 하며 파필리오를 바라봅니다.
그렇게 말하며 웃은 소년은 이해를 돕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앞으로 좋아하는 게 많이 생길 수도 있잖아요." 그 후에 소년은 살짝 소리내어 웃었다. 이는 어느 정도 경험담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에서 점차 나아간다는 기분이 들었던 적을, 소년은 선명히 떠올랐다.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그걸 찾아가는 건 나름, 즐거웠다.
자신을 부르는 소녀에게 소년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웃었다. 살짝, 나비(파필리오)같이 살랑이는 웃음이었다. 흔들리며 나는 듯한 그런, 살짝 자유로운 웃음이었다.
"그건, 그렇죠. 하지만 세계 인구가 훨씬 많은 만큼, 완전한 타인부터 시작하는 관계가 아니라는 건 무척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통의 화제가 최소 한 개는 명확히 확보된다는 건 좋은 일이다. 다른 사람과 친해질 수 있는 이유가 하나 정도 더 늘어나는 건 정말로 멋진 일이다. 적어도 소년에게는 그렇게 생각되는 일이었다.
"그게 가능한 일이었나요..?"
늘상 좋아하는 걸 늘려나가자 해도 소년의 취향은 영 움직이는 걸 싫어했다. 저번에도 시계태엽오렌지를 읽다가 포기했고, 공포나 추리계열도 영 꺼려졌다. 소년의 취향은 각도를 명확히 정해두고 움직이는 느낌이 강했다. 그랬기에 취향을 중간으로 유지한다는, 즉 조절하고 있다는 말은 소년에게 꽤 놀라운 말이었다.
길을 걷다가 스쳐가서, 서로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남이 아니다. 현재의 공통점이 있고, 언젠가 그것이 늘어날지도 모르는 어느 애매한 위치의 타인. 또한 소년은 때때로 진정한 의미로 완전한 타인이라는 건 사실 없지 않을까.. 하고 깊은 생각에 빠지기도 했다. 잠자리에 누우면 머릿속이 여러 생각으로 가득해지는 건 소년에게도 자주 있는 일이었다. 이불 속은 창작의 공간이라는 말을 누가 했던가 안했던가. 가리지 않으련 노력한다는 말은 이해가 쉬웠다. 싫어하는 것을 어느 정도 괜찮게 만드는 그런 류의 일을 소년도 시도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소년은 여전히 아메리카노는 좋아하지 않고 홍삼맛 캔디도 질색한다. 나이를 먹으면 좋아하게 될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그렇네요. 예전부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게 확실하다고 할까요? 3장 읽고 덮은 책은 다음에 다시 도전해도 똑같이 되더랍니다."
소년은 블루베리 스무디에 꽂힌 빨대로 스무디를 쭉 빨아들였다. 과일의 새콤함이 깃든 달달함이 입안에서 시원히 녹아내리는 게 참 좋았다. 소년은 카페에서 커피를 시킨 적은 많지 않다. ...사실 카페에 잘 오지 않는다.
"물론, 제가 싫어한다고 해서 그게 나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에요.
소년이 좋아하는 걸 싫어하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 소년이 싫어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무척이나 많다. 그걸 아주 잘 알고있는 소년은 타인의 취향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취향이 없는 것 같은 사람은 걱정된다.
"그렇네요." 완벽한 타인이 아니지요. 이론을 가져오지 않더라도(6다리만 건너면 세계의 사람을 대부분 알 수 있다고도 하는 이론이 있으니) 지한은 파필리오와의 관계가 기본적으로 같은 학교생이고. 더 나아가면 같은 학급의 학우일 수도 있다고 가정합니다.
"확실하다면 고민이 적을 거라 사료됩니다." 하긴. 취향이 확실하다면 굳이 고민할 이유가 적을 것 같다는 건 사실이지 않나요? 아예 새로운 것을 도전하는 것을 제외한다면. 지한은 차를 홀짝입니다. 그나마 쓴 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지한의 취향이라고 볼 수 있을까요?
"싫어한다고 해서 나쁜 건 아니지요." 다만 강요는 좋은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말하면서 책을 가방에 넣습니다. 다 읽어가던 모양인지. 책갈피가 상당히 끝부분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문득 뭔가가 떠오른 소년이었지만, 말로 하지 않았다. 상대가 모르는 것 같으니 굳이 말로 할 생각은 없었다. 떠오른 게 무엇이었냐면, 공개되어있는 특별반 학생 목록에서 지한의 이름을 본 적 있던 일이었다. 공부는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성실하게 하고 있고 소년의 머리는 나쁘지 않았으며 영성이 높았다. 기억력은 썩 괜찮았다. 나중에 특별반에서 말 걸기 편하겠다. 소년은 그냥 그렇게만 생각했다.
"꼭 그렇지만도 않아요."
확고한 취향이 있긴 하지만 그게 고민거리를 해소시켜주진 않았다.
"취향이 확고하지만, 하나라는 뜻은 아니다보니 고민이 쓸데없이 깊어지기도 하죠. 저녁 메뉴 고민으로 30분을 보냈다고 한다면 믿어주실건가요?"
좋아한다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만큼, 그 둘, 혹은 셋에서 넷 중에서 어느 걸로 할지 고민하는 건 꽤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챙겨보던 책의 신간이 발매되었을 때, 그것과 전에 봐두었던 취향인 책 중에서 뭘로 할지 고민하는 건 난제였다. 소년은 소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스무디를 쪽 빨아들였다. 소년의 미소가 몽글거렸다.
사실. 파필리오를 지한이 떠올리는 게 쉬울 것 같지만. 지한은 굳이 특별반 학생 목록을 머릿속에 넣고 다닐 것 같지 않았다고 합니다. 아니면 의외로 파필리오인 걸 아는데도 모르는척을 했다거나. 그렇지만 후자는 조금 곤란해 보이는 느낌입니다.
"그런 방향도 존재하는군요." 좋아하는 것이 하나만 있다면 모를까. 두 개 이상이면 고민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간과한 지한입니다. 찬찬히 고개를 끄덕여 동의하는 의도를 보인 지한은 파필리오의 몽글거리는 미소에서 정말로 거품이 뭉게뭉게 올라오는 듯한 소리를 듣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간단한 음료 취향을 물어봐도 될까요?" 아무렇지 않게 주제를 슬쩍 돌려봅니다. 저는 쓴 건 별로라고 생각해서요. 라며 차를 흔들거립니다. 얼마 남지 않은 잔의 차가 찰랑입니다. 이 차도 과일이나 청이 들어가 단 편이고요. 라고 말합니다. 파필리오도 쓴 걸 선호하지 않을지도.같은 생각을 해보지만 듣기 전까지는 확답은 금물입니다. 그런 건 잘 하지요.
"커피는 싫지 않지만, 쓰기만 한 건 싫어합니다. 우유와 시럽은 필수요소죠. 그리고 커피, 차보다는 스무디 같은 걸 좋아해요. 주스 같은 것. 과일을 좋아해서 말입니다."
소년은 아까 지한이 한 것처럼, 지금 마시고 있는 블루베리 스무디를 들어올려 흔들었다. 반 절 정도가 그새 사라진 스무디에서 블루베리 향의 단내가 풍겼다. "맛을 따지면 단 맛과 신 맛을 좋아해요." 이에 덧붙여 꿀도 좋아한다며 웃어보였다. 소년의 이름(나비)에 상당히 어울리는 음료 취향이었다.
"그 외에 탄산은 목이 따가워서 싫어하고, 우유는 그냥 먹기보단 데워서 꿀을 타먹는 편이에요. 또는 과일 우유."
"롱블랙이나 에스프레소 보다는 라떼같은 류가 낫다는 거네요." 가볍게 말해봅니다. 굳이 커피를 마신다면 그런 게 빠져있기는 하지만 대충 뜻은 통하지 않을까요. 주스나 과일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는 그렇습니까. 같은 담백한 말을 해봅니다.
"상세하네요." 지한은 그다지 상세한 취향을 말하긴 어려웠지요. 쓴 건 별로다. 라고 해도. 쓴 것이 풍미를 높여주는 거라면 괜찮으니까요. 탄산은 별로고 우유는 그냥보다는 다르게..
"그렇다면 나중에는(아마 같이 먹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닐까?) 나쁘지 않겠군요." 느리게 답한 지한은 그럼 전 차도 다 마셨겠다. 챙겨야겠군요. 라는 말을 합니다. 그 말대로 찻잔은 비었고, 책도 다 읽었으니. 적당한 회전률를 위해 일어나야 합니다. 음. 그렇지만 파필리오와 합석할 이가 있을까요? 같은 특별반이 또 온다면 모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