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적으로 라온에 오는 손님은 헬레나 제레미 언더테이커다. 그녀는 40대 초반으로, 현직 오러이자 언더테이커 가주 대리로 현재 내정을 맡고 있는데, 아주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망사로 된 베일이 달리고 챙이 넓어 얼굴을 확인하기 어려운 모자, 머메이드 원피스, 오페라 장갑과 어깨에 걸치는 모피 숄까지 온통 검은색이기 때문이다. 장례식에 참석한 것 같은 어두컴컴한 모습과 달리 걷는 모습부터 배어나오는 품위에 여러 사람이 시선을 뺏겼다. 그중에서도 학생들의 시선이 유독 짙었는데, 팔짱을 끼고 옆을 같이 걷는 남성이 아주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는 아주 근사하게 차려입었다. 옆의 여성처럼 모피 숄을 걸치고 있는데, 그 속의 옷은 번듯한 정장 차림이다. 평소처럼 구부정하지도 않고, 머리도 단정하게 빗어 깔끔하게 귀 뒤로 넘겨 위로 올려 묶었기 때문에 두 눈이 완벽하게 드러났는데, 역시 사람은 꾸미면 된다는 지론이 그에게 딱 들어맞았다. 두 사람은 꼭 사교 모임에 참석하러 가는 상류층 인사 같았다.
그가 오늘 이렇게 차려입은 이유는 어머니가 버킷리스트를 달성하는 걸 돕지 않으면 길바닥에 드러눕겠다 항의했기 때문이다. 버킷리스트는 노마지 출신인 오러 동료가 알려준 것인데,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을 적는다는 사실에 그를 비롯해 가문원 대다수가 흥미를 가졌다. 죽음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성장의 기회라고 여기는 의도 때문이다. 그의 어머니는 이걸 기회삼아 무려 아들과 함께 하고 싶은 50개의 리스트를 적어왔고, 오늘은 24번 리스트인 '아들 꾸며놓고 라온 산책하기'를 하게 됐다. 그는 진득한 학생의 시선을 무시하고 어머니를 내려다본다. 어머니와는 키차이가 조금 나는데, 그래도 뭇 여성보다는 커 고개를 한참 내리지 않아도 된다.
"만족하세요?" "물론이지! 내가 얼마나 이러고 싶었는지 몰라." "죽기 전의 소원이라기엔 너무 소박하신데요." "그렇지만 만티코어 송곳니를 산채로 빼서 피리 만들기를 우리 아들이 도와줄리가 없잖니.." "그 소원을 제가 여덟살 때부터 들었던 것 같은데." "당연하지! 제레미, 그이도 못하겠다며 발뺌을 하던 소원이란다.." "아버지가요?" "그래. 네 아버지는 다 좋은데 그런 부분에선 약해 빠졌던 사람이었단다. 만티코어가 얼마나 무서운 동물인지 모르냐며 다칠 지도 모른다며 길길이 날뛰더구나."
헬레나가 팔짱을 끼지 않은 손으로 뺨을 짚으며 한숨을 푹 내쉰다. 그는 그 모습에서 질색을 했는데, 어머니가 이렇게 한숨을 쉴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조만간 어머니는 만티코어의 송곳니를 빼올 것이다. 아니면 더 최악의 상황이 올 지도 모른다. 그는 어릴적 엉클 톰이 '인마, 헬레나. 네가 누구 동생인데 뭘 믿고 그렇게 먹고 늘어지기만 했냐. 관리 안 하면 곧 나처럼 될 걸?' 하고 호탕하게 웃자 오빠는 닥치고 있으라며 주먹으로 흠씬 두들겨 패던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머니의 그 불꽃같은 성격으로 미루어보아 아마 주먹으로 제압해 송곳니는 빼서 피리로 쓰고, 남은 몸은 길들여 등에 타고 다니지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 성큼 다가왔다. 그는 어머니가 가고 싶어하던 당과점을 향해 걷다가 은근한 시선이 꽂히자 잠시 멈춰섰다.
"아들." "예, 어머니." "이 어미는 아들을 위아래로 기깔나게 낳아줬는데, 제발 어느 한곳이라도 써먹을 날이 오면 좋겠답니다."
헬레나가 아무리 얼굴을 가렸다고 해도 위아래로 훑다 아래로 멈추는 시선을 그가 눈치채지 못했을리가 없다. 불투명한 검은색 막 뒤로 어딘가 붉은 시선이 음흉하게 휘자 그는 팔짱 낀 팔을 움직여 손을 빼 탈출을 시도했다. 그러자 헬레나는 팔에 착 달라붙고는 대놓고 으흐흐 웃었다.
"어머, 얘도 진짜. 어딜 도망가려고." "놔요, 놔. 저 돌아갈 테니까." "아! 버킷리스트도 못 채우게 하는 아들놈 싸가지 때문에 갑자기 있지도 않은 지병으로 연약하게 쓰러질 것 같구나. 그것도 이 라온 한가운데에서."
헬레나가 손등으로 이마를 짚는 시늉을 하자 그는 질색을 하며 한 손으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진통제를 먹고 나왔는데도 골이 아프다. 그는 길바닥에 드러눕는 참사를 막기 위해 곁에 남기를 택했고, 헬레나는 은근한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며 웃었다.
"그래도 아깝잖니. 너 좋다 할 마녀랑 마법사가 잔뜩인데. 너도 근사하게 연애도 하고 그래야지. 여러 사람도 만나보고 헤어지고." "그러기엔 이미 여생을 함께 할 사람이 있는데요." "그거 아니? 어머니의 입장에선 허락 했지만 오러의 입장에선 허락할 수 없단다. 네가 그 숭고하지 못한 죽음을 양산한 장본인의 수하와 여생을 함께한다니. 무덤에서도 벌떡 일어나서 막아세우고 싶은 마음이 어찌나 큰지." "아직도 불만이시군요." "원래는 이해하려 노력했단다. 네 말을 듣고 어떤 사람인지도 궁금하고 말이다. 그런데 그 수하중 하나가 타니아를 죽였으니, 이젠 어머니와 오러의 입장에서 아주 껄끄러운 상대일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그는 헬레나의 얼굴이 가려졌어도 수심에 젖었음을 알 수 있었다. 유년시절의 그에게 타니아를 붙여준 건 다름아닌 헬레나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타니아를 소개시켜주고, 딸처럼 키웠다. 또다른 가족이나 마찬가지던 타니아는 이제 없다. 죽음을 몇번이고 겪는 집안이지만 이번 일은 궤를 달리했다. 그는 어머니가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이유가 이마에서부터 콧등, 그리고 뺨까지 가로지르는 큰 흉터가 있기 때문임을 안다. 아버지를 어머니의 손으로 잃은 날 생긴 것이다. 그날의 상처는 새겨져 평생을 함께한다. 타니아를 잃은 날에는 얼굴에 흉터가 생기지 않았어도 마음에 큰 상처가 생겼을 것이다. 그는 침묵하다 말없이 팔 위에 올라온 헬레나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뗐다.
"원인을 제쪽에서 처리하면 되는 일이죠 뭐." "얘도 참. 넌 아직 학생이잖니." "학생이라고 뭐가 다르겠어요? 유서 품고 다니는 건 똑같은데." "어머? 젊은 치기가 있는 법이지! 고작 처리가 말이 되니?! 지팡이 끝을 날카롭게 세공하고 다니렴. 갈레온은 원하는 만큼 보내주마. 그 새끼의 머리에 찍어내리렴. 지팡이가 두피를 어느정도 파고들면 봄바르다를 쓰면 된단다. 그러면 아주 끝장이 나지. 머리만 터진다니까? 대신 눈이 네쪽으로 튈 수도 있단다. 좋은 기분이 절대 아니란다."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이번에 과잉 진압으로 정직 처분 당한거. 그거 때문이죠." "어머, 갑자기 없던 지병이……." "엄마." "그 새끼는 현장 사살 허가를 받았으니 쌤쌤이란다." "됐다, 됐어요. 그 머리없는 시체 처리했을 캐서린이 고생 했겠지……." "이젠 내정까지 꿰뚫는구나." "울고도 남았겠죠."
그는 당과점의 문을 열어 헬레나가 먼저 들어갈 수 있게 도왔다. 단내가 훅 끼치자 두 모자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드디어 버킷리스트 25번이구나. 당과점에서 아들과 사탕과 초콜릿을 사기." "이쯤 되니 궁금해지는데요." "뭐가 말이니?" "26번은 뭔가요?" "내 아들 홀랑 낚아채간 도둑놈 얼굴 보기." "예?" "27번은 갈레온 더미를 던져주며 네가 감히 우리 아들과 만나는 도둑 고양이냐? 헤어져! 라고 외치고 반응을 보기, 28번은 도둑 고양이랑 만티코어 잡으러 가기, 29번은.." "그만. 바꾸세요." "어머? 지금 내 삶의 목표를 네가 마음대로 바꾸겠다 하는 거니? 이 불효자 녀석. 내가 너를 이렇게 키웠구나. 어쩜 어린 시절의 나를 이렇게 쏙 빼닮았지?"
그는 헬레나의 성격을 떠올렸다. 며칠 전 f로 시작해 k로 끝나는 4글자의 단어를 배운 그의 절애하는 작은 매는 헬레나에게 무얼 배울지 모른다. 그와 헬레나의 작은 실랑이가 이어졌고, 결국 헬레나가 여기서 드러눕겠다 선포하자 그는 백기를 들었다. 각자 슬픔을 딛고 일어서는 방법은 제각기고, 삶의 한 부분을 장식하는 방법도 여러가지다. 언더테이커는 인간적이고, 가장 평온한 방법으로 삶의 후미를 장식한다. 그 이후 들이닥칠 폭풍을 대비하기 위해. 그렇기에 라온은 오늘도 평화롭다.
같은 사람이니까 싫어하지 않는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지만, 일부에 한해서는 아니었다. 그녀가 보았던 환상 속 그들. 돌을 던지던 그들만큼은 같은 사람이래도 싫었다. 그들만 아니었으면, 어쩌면 다른 미래가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그거 뭐라더라, 결벽증? 그런건가 보네요. 행여나 닿지 않게 조심해야겠어요."
반쯤 농담조로 말하면서도 제대로 기억해두기로 했다. 뭐든 알아둬서 나쁠 건 없겠지. 친분, 이라고 할까, 굳이 미움 받고 싶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을 기억 한켠에 잘 적어두고 연주 준비를 했다.
몇달만에 들어보는 바이올린이라 실수 하진 않을까 살짝 걱정이 들었지만, 그것이 무색하게 연주는 실수 없이 끝났다. 개인적으로도 뿌듯한 연주였다. 집에선 번번히 실수하는 구간이 있었는데 이번엔 그런게 없었다. 샤오의 반응도 도움이 되었다. 이미 알고 있는 곡이었는지 작은 노래소리가 들려와 무의식중에 맞추다보니 중간부터는 실수에 대한 생각 자체가 없어졌었다. 정말, 간만에 좋은 연주를 했다고 생각하며 그럴듯한 인사를 해보였다.
"저야말로, 덕분에 좋은 연주를 할 수 있었어요. 들어주셔서 감사해요."
그런 다음 용무를 다한 악기를 다시 케이스에 잘 집어넣었다. 이 이상 시간을 보내는 건 서로에게 무리였으니까. 처음 메었을 때처럼 케이스를 둘러 메고서 샤오가 건네주는 도시락을 받아든다. 받고 바로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잠깐 가만히 서있다가, 고개를 들어 샤오를 마주보고 말을 꺼냈다.
"샤오 씨. 저 말이죠, 모두를 구하고 모두를 살릴 수 있을거란 오만한 생각은 하지 않아요. 그래서 저번엔 무슨 일에 누가 죽던 말던 상관 없다고 말했었지만, 지금은 죽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들이 생겼어요. 그러니 이젠 그 사람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걸 할 거에요. 가능한 희생을 내지 않는 쪽으로요."
그녀가 그런 말을 샤오에게 하는 진위는 무엇이었을지 알 수 없지만, 그녀의 눈빛은 진지했다. 나름의 각오와 나름의 결심을 담고서 싱긋 웃었다.
"말은 이래도 저 따위가 해봤자 뭘 얼마나 할 수 있겠어요. 하지만 희박한 가능성이라도 걸어준 사람이 있으니까 한번 되는데까지 해보려구요. 희박하고 흐릿하더라도 잡으려 하는 손이 많아진다면 잡힐지 모르잖아요? 뭐든 해봐야 아는거니까요."
그걸로 할 말은 끝인가 싶더니 조금 목소리의 음색을 바꿔 조금 더 말을 얹는다.
"샤오 씨가 탈을 쓰고 뭘 하고 싶은 건지는 모르지만, 뭔가 목적이 있는 건 분명하겠죠. 만약 그게 그 사람이 하려는 것과 접지어진 거라면, 진지하게, 다시 생각해줬으면 해요. 정말로 그 사람이 샤오 씨의 목적을 이뤄줄 것 같은지, 혹은 도움이 될 것 같은지."
거기까지 말한 그녀는 이제 할 말 다 했다는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수업 때처럼 멋대로 떠나가지 않고 제대로 말을 들은 뒤 인사를 하고 가려나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