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하지, 생각해 보면 그리 오래 본 얼굴도 아니었는데. 곁에 있으면 이상하리만큼 마음이 안정되는 기분이었다. 잡아 이끄는 손도, 이따금씩 품이나 어깨를 조용히 내어주는 것도, 내뱉는 말도. 손을 뻗으면 닿는 거리에 있는 것. 몰아쳐 오는 소년이라는 이름의 파도와, 욕심이 저도 모르는 제 안을 야금거리는 것이 두려워서 도망쳤었다. 묶고 묶이는 것은 무섭다. 사랑이나 호감이라는 이름 하에 무언가에 속박당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그래서 주춤거리며 뒷걸음을 쳤었는데.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서 있는 곳은 다시금 소년의 품 속이다. 이상했다. 모르는 사이에 말뚝에 매여 버렸나? 자고 있는 사이에 잡혀 버렸나? 아니다. 목, 발목, 손목. 더듬어 확인해 보아도 손에 걸리는 끈 따위는 아무것도 없다. 매여있는 것 같음에도 매여있지 않은 것. 원래라면 일어야 할 혐오나 불쾌감이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 보이지 않고. 혼란스러운 것은 여전했다. 그러나, 글쎄. 거칠게 묶였다기보다는 소중하게 감싸안아진 것 같은 그 감각이ㅡ
너를 속박하고 싶지 않아. 여전히 얼굴은 보이지 않은 채, 잠잠히 이야기를 듣던 새슬이 두 팔을 뻗어 문하의 목덜미를 감았다. 그리곤 천천히 당겨서, 이마를 툭. 눈을 감은 채로 잠시 그렇게 있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속삭임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있잖아, 나는 아직도 내 안에 있는 게 뭔지 정확히 모르겠어. 그치만. 작게 숨을 삼킨다.
“네 안에 있는 것과, 비슷한 색이 아닐까.”
붙어 있던 이마가 떨어졌다. 둘러감았던 팔도 풀어내었다. 이제 새슬은, 소년에게서 반 발짝정도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그러나 손만은, 이때까지 계속 잡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던 손만은 놓지 않고. 새슬이 고개를 들어 문하의 얼굴을 마주했다. 어쩌면 새벽 이슬같은 것이 맺혀 있을지도 모르는 눈꺼풀을 깜빡, 한 번 털어내고서. 평온한 웃음이었다.
마법, 생각해보면 꽤 오래 전부터 걸려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잃어버리고 부서졌다고 생각했던 그 삶의 궤적에 언제부턴가 어느덧 어떤 흔적이 나타났고, 그 흔적을 쫓아와보니 여기에 이렇게 함께 있게 되었다. 그도 뭐라고 설명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발걸음이 어째서 그녀를 향했는지. 자신이 어쩌다 그녀에게 이끌리고, 함께 있기를 원하게 되었는지. 어쩌면 자신은 그 답을 찾고 싶어서 그녀를 따라온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정작 따라와보니 답을 모르기는 새슬도 매한가지인 것 같다.
그렇지만 답을 구하지 못했다고, 딱히 안타까워하거나 할 생각은 없다. 어차피 그 답이라는 것도 핑곗거리로 삼으려고 구하고 있던 것이 아니었던가. 황폐하고 차가운 겨울이 드리운 황무지를 벗어날 핑계 말이다. 그렇지만 핑계 따위는 필요하지 않다. 그는 늑대가 아니라 늑대개였기에 누군가의 손길을 바라고 있었던 것일 뿐이다.
새슬이 나직이 내 안에 있는 게 뭔지 정확히 모르겠어, 하고 말하자, 문하는 새슬의 이마를 자신의 이마에 기대어준 채로 아직도 자신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새슬의 손을 들어서는─ 그래. 이전에 두어 번인가 했었던 일이다. 문하는 그것을 자신의 가슴팍 위에 조심스레 올려놓는다.
맥박.
평범한 맥박이다. 보통 사람과 비슷해, 별 차이를 모를 것 같은... 정상적이고 일상적인 보통의 맥박이 손끝에 미세하게 와닿고 있었다.
"나도 이걸 뭐라고 부르는지 모르겠어... 그렇지만 이게, 전부 너로 쓰였어."
같이 가자, 하고 말해주는 새슬을, 문하는 쥐어져 있지 않은 쪽 팔을 당겨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응. 이젠 함께야."
문하는 새슬에게 동행을 선물하기로 했다.
소원. 이룰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소원. 한 순간이라도 자신이 살아있음을 실감하는 것. 링 위에서 그렇게 처절하게 찾아헤매이고 있었는데, 전혀 다른 곳에서, 찾아내고 말았다.
끌어안긴 틈새로 새어나오는 웅얼거림, 은은한 웃음. 손바닥에 이어진 규칙적이고 안정적인 고동. 처음 느꼈을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그것. 하아. 팽팽하게 휘어감아 잡았던 긴장의 끈이 탁 풀리는 기분이 들어 한숨같은 숨을 내뱉었다. 덩달아 자연스레 몸에 힘도 빠져서, 이젠 영락없이 소년에게 의지해 기대 선 꼴이 되었다.
웃긴 것은, 그러고 있자니 갑작스레 졸음이 몰려 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소년과 있을 때마다 잠에 빠져드는 것도 같다. 안정을 느끼는 탓인가. 고개를 들어 문하의 어깨에 가볍게 턱을 걸치고서, 눈을 끔뻑이며 중얼거렸다. 아, 저기 별 떴다. 그제서야 한껏 어두워진 주위의 풍경이 제대로 눈에 들어오는 모양이다.
“밤하늘, 예쁘다.”
이전에도 밤하늘을 예쁘다고 느낄 만큼, 자세히 보았던 때가 있었던가? 글쎄, 어쨌든. 나른한 고개를 툭, 아마 겹쳐져 있을 문하의 고개에 마주 기대며. 풀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 나 갑자기 졸려.
비루먹고 비참한 꼴을 한 유기견이었던 그것은, 비루먹은 꼴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다시 누군가를 눈에 담을 용기가 남아 있었다. 불확실한 미래 따위에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상관없다. 품안에 기대어오는 새슬을 문하는 꼭 안았다.
문하는 무언가 자신이 생각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져버렸다는 것을 느꼈다.
분명 자신의 앞에 놓여있었던 것은,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잠잠히 순응할 수밖에 없는 어두운 나날들뿐이었을 텐데. 그 누구의 눈도 닿지 않는 황야에서의 아사만이 자신에게 주어진 결말이었을 텐데. 변했다. 그 모든 게 변했다. 이제 문하의 앞날은 그 스스로가 전혀 짐작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상관없다. 임의의 가능성이라고 해도, 완전히 0%로 단절되어 버린 가능성보다야 낫지 않겠는가. 하물며 그 가능성을 너와 함께 찾아나설 수 있다면. 거기가 내 낙원일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래서, 새슬의 말을 따라 문득 고개를 들어본 문하는, 전에는 보인 적 없던 별들이 점점이 알알이 박힌 밤하늘을 마주했다. 눈을 깜빡이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예쁘네."
이전에도 밤하늘을 예쁘다고 느낄 만큼, 자세히 보았던 때가 있었던가? 아니, 없었다. 단 한 번도, 내 인생이 퍽 괜찮은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을 때도.
새슬이 고개를 툭 기대어오는 것이 느껴진다. 문하는 새슬을 내려다보다가, 잠깐 상반신을 숙였다. 새슬이 품 속에 기울어지도록 든 채로, 새슬의 다리에서 팔랑이고 있는 원피스 자락과 새슬의 오금을 한꺼번에 감싸서 번쩍 들어올린다. 그리곤 새슬이 자신의 품 안에 완전히 기댈 수 있도록 상반신을 뒤로 젖혀 무게중심을 맞췄다. 가볍네.
"그러면, 자러 가자."
숙소로 돌아가도 좋고, 어쩌면 어딘가 둘이서 잠들 수 있는 괜찮은 자리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로 가더라도 함께 있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 했으니까, 어디라도 괜찮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