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하늘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자신도 이럴 때 안 나간 것은 아니긴 하지만 일단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하늘은 넘어가기로 했다. 사실 알려준다고 해도 자신이 알아볼 것 같진 않았으니까. 무대 위에 앉아있을땐 오로지 피아노만 바라보며, 모든 것을 피아노에게 맡기며 연주를 했으니 더욱 그러했다. 아무튼 이 누군지 모를 팬에게 마음 속으로 감사하며 하늘은 곧 그가 보여주는 유리조각들을 바라봤다.
바다에 흽쓸려 동글동글하게 깎여나간 유리조각은 상당히 아름다웠으나 조금 안타깝다고 하늘은 느꼈다. 물론 이 유리가 자신이 아는 그 유리가 맞을진 알 수 없었으나 이렇게 있다는 것은 그 과정 속에서 유리를 먹은 바다생물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슬프진 않았으나 어느 정도 연민을 느끼며 눈을 감으며 하늘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마치 묵념이라도 하듯 그렇게 고개를 다시 들어올린 후에 하늘은 자신을 규리라고 소개한 이를 바라봤다.
"예쁘네. 그래도 이런게 너무 많이 나오지 않는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보여줘서 고마워. 좋은 구경 했어. ...그리고 텐션... 아니야. 아니야. 편한대로 있어도 돼."
역시 이런 높은 텐션의 상대는 대하기가 조금 어려웠으나, 그래도 그게 상대의 특성이라면 존중하는게 맞다고 생각하며 하늘은 내면으로 고개를 살며시 돌렸다. 상대의 영역을 존중하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것. 그것이 하늘의 삶의 방식이었으니까.
"편한대로 불러도 돼. 강규리? 기억해둘게. 일단 내 팬인 모양이니 말이야.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고등학생 2학년이지만."
팬 맞지? 맞지 않을까? 그렇게 내심 기대를 하는 모습은 자신에게도 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나름의 설램을 느끼는 고등학생의 모습이었다. 허나 곧 표정 관리를 하며 하늘은 자신의 머리를 정리했다.
"물론, 맛까지 있어서 정말 좋아해! 근데 평소에 너무 의지할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칼로리가 낮은 편은 아니니까! 그래서 자주 먹진 않으려고 했던 거야! 혹시 먹고 싶으면 말해!"
그렇게 말한 홍현은 강장제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물에 들어가도 정말 괜찮겠냐는 하늘의 질문과 강장제에 향하는 의심스러운 시선에 홍현은 손가락을 턱 위에 놓고 고민하며 말했다.
"그래 그렇지..? 내가 왜 들어간다고 했을까? 알코올 성분은 확실히 없는 게 맞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당분 섭취가 훨씬 많아서 그런가 좀 흥분했던 것 같네!"
홍현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모습이 어딘가 웃겨서 킥킥대며 웃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라 왠지 나중에 많이 후회할 것 같았지만 일단 지금은 정신없는 이 상태를 즐기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홍현은 갑자기 겉에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기 시작했다.
"수영은 빠져 죽지 않을 정도만 하지만 발만 담그는 정도가 나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한 뒤 홍현은 자신의 가디건을 강장제를 놔둔 곳 위에 올려놓곤 하늘을 보고 미소를 지음과 함께 손을 내밀며 말했다.
"너무 의지할 것 같다는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조절을 하고 있다는 거지? 그러면 괜찮은 거 아니야? 너무 푹 빠지지만 않으면 되는 거니까. 아. 나는 사양할게. 지금은 크게 몸이 안 좋거나 그런 건 아니어서."
자신에게 권하는 홍현의 제안에 하늘은 가볍게 오른손을 휘저었다. 물론 맛이 좋다고 하니 호기심은 있었으나, 자신의 몸 상태가 굳이 먹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조금 끌리긴 했는지 힐끗힐끗 병을 하늘은 아무런 말 없이 바라봤다. 나중에 수영 다 끝나고 콘도로 돌아갈 때 하나만 달라고 해볼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하며.
"바다고 여름이잖아? 그럴 수도 있지. 가끔 살다보면 괜히 하이텐션이 될 때도 있고 그런 거 아니겠어?"
슬슬 들어가려는걸까? 가디건을 벗으려는 그녀를 확인한 하늘은 살며시 고개를 바다 쪽으로 돌렸다. 철썩이는 푸른 파도는 딱 자기 마음에 드는 색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에메랄드 빛과는 조금 다르지만, 저 정도면 충분히 맑은 에메랄드 빛이었다. 그에 만족하며 괜히 미소를 짓다 고개를 들어 막 들려오는 물음에 그는 대답했다.
"그럴게. 조금 쉬러 나왔지만 대화하면서 어느 정도 휴식은 취했으니까 말이지."
허나 자신을 향해 내민 손을 바로 잡진 않으며 하늘은 아무런 말 없이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그러다 작게 소리없이 미소를 지으며 아주 살짝, 정말로 살짝 손가락 부분만 가볍고 약하게 잡는 느낌으로 잡으며 바다 쪽으로 살며시 발을 들였다.
'역시 조금 부끄러울지도,'라는 말을 덧붙인 그녀는 복잡미묘한 감정에 대해 꽤나 깊게 생각하는듯 입가에 손을 가져다대었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생각해봐도 이렇다할 결과가 나오진 않았다. 역시 사람의 감정이란건 정해진 수치로는 표현할수 없는 무형의 무언가인 것일까? 어쩌면 그래서 그녀에겐 더더욱 미지의 무언가로 와닿았을런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 모든 것에 불편함이나 거부감은 없었으니 그저 담담하게, 하지만 기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언젠가는 웃는 이유도, 화내는 이유도, 우는 이유도, 즐거워하는 이유도 알게 될테니까.
"딱히 대단하다 할 정도까진 아니겠지만요...?"
장난스러운 웃음 뒤, 어깨에서부터 천천히 내려가던 손길이 등에 머물러 조심스럽게 움직이자 괜시리 더 굳어버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다른 사람의 손이 닿는다는 것이 오래간만이라 잠시 긴장했을뿐 얼마 안가서 편안하게 늘어졌을지도 모른다.
"좋은 모습이라..."
찬찬히 내려가는 궤적을 등에서부터 온몸으로 느끼면서도 그녀는 당신의 말을 곱씹으며 생각에 잠겼다. 여전히 세심한 손길은 경계선을 지나 완만하게 패인 허리를 향해가고 있었고, 그녀 역시 어느정도 생각하고 있던게 매듭지어졌는지 조심스럽게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을까.
"그건 그래요. 저 또한, 그대야에게 더 나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으니까..."
물론 다시 만나고 얼마되지 않아서는 애착보다 죄책감에 가까운 느낌으로 당신을 대했겠지만, 봄이 지나 여름이 되어가면서 그런 후회감은 조금씩 사그라들기 시작했고 그때부터는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했던 그녀였다.
어차피 지나간 일을 후회한대도 그것을 덮어쓸수 없는 일이니까, 세이브로드가 가능한 것은 어디까지나 게임일 뿐, 현실엔 그런게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대야만할까요~? 아, 물론 아쉽다면 다른데도 부탁할수 있겠지만요?"
허리 근처까지 닿은 손, 그러면서도 간질거리는 숨결에 덧붙여진 상냥한 목소리가 귓가에 사뿐하게 전해지자 그녀 역시 살짝 얄궂은 표정을 지으며 슬쩍 돌아보았다.
" 그대야랑 마음이 맞는 걸 알 수록 기쁘고 설레이는데.... 역시 노력하는 보람이 있네. "
시아는 잠시 말을 곱씹는 듯한 슬혜의 대답을 얌전히 손만 움직이며 기다려주다 들려온 대답에 맑은 웃음소리와 함께 대답을 돌려준다. 이제는 정말 둘이서 마음이 맞기 시작한 것 같으니까 분명 초록불이 들어온 것이나 다름 없을테니까. 물론 이제 두사람은 다시 시작선에 선 것인 만큼 노력을 더 해야하겠지만 추진력이 된다는 사실은 틀린 것이 아니리라.
" 흐응, 다른데도 부탁할 수 있는거야? "
시아는 장난스런 자신의 말에 얄궂은 표정을 지으며 돌아본 슬혜의 말에 눈을 한차례 반짝이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물음을 던진다. 마침 허리부분까지 선크림을 바르던 것이 마무리가 될 즈음이었기에 등에 선크림을 발라주던 손을 이용해 그대로 뒤에서 백허그를 하듯 감싸안는다. 시아의 몸이 슬혜의 등에 맞닿자 따스한 온기가 느껴진다.
" 다음에는 어디를 부탁하고 싶어? 그대야가 이야기하면 다 들어줄게. "
부드럽고, 장난스럽게 손가락으로 슬혜의 배를 톡하고 건드린 시아가 이야기 해달라는 듯 상냥하게 귓가에 속삭인다. 물론 말을 끝낼 즈음, 마지막에 쪽하는 소리를 들려주곤 맑은 웃음을 터트리는 것도 빼먹지 않는다.
홍현은 밝은 목소리로 답하였다. 홍현은 조금 피곤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매우 멀쩡한 것 같다가도 가끔씩 조금 피곤해지는게 이상한 기분이었다. 흔쾌히 승낙해준 하늘에게 홍현은 밝게 웃으며 말했다.
"좋아! 그러면 같이 들어가자!"
하늘과 손을 살짝 잡으며 바다를 향해 걸어가던 홍현은 이게 다른 남자와 처음으로 악수나 다른 의도 없이 손을 잡아본 경험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왠지 그걸 떠올리니 기분이 오묘해지는 것 같았지만 살짝 손가락만 잡은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손 정도는 잡아도 괜찮을 것이란 생각에 그냥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다른 친구들? 약학부라면 같이 오긴 했는데 어딨는진 모르겠어! 아마 저기 어디 있을거야!"
그렇게 말하며 홍현은 어딘가를 가리켰지만 정확히 어딜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손이 조금 떨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홍현은 먼 해변을 바라보며 잠깐 멍을 때리다가 손을 내리곤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