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2학년 라인이라고 해도 행동반경이 겹치지 않으면 얼굴을 보기는 힘든 법이다. 어디 다른 반뿐일까. 같은 반이라도 행동반경이 겹치지 않으면 반을 나간 이후에는 대체 어디서 뭘하는지 모를 이도 천지였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행동반경은 참 좁지 않나 생각을 하지만 아무렴 어때라는 느낌으로 하늘은 개운하게 그 사실을 넘겨버렸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그렇게 보이기도 하니까 나말고 다른 이들 중에서도 묻는 이가 나오지 않을까? 물론 내가 잘못 본 걸수도 있지만. 아무튼 특제 강장제? 항상? 꽤 아끼는구나. 그거."
이런 바다에서까지 저런 것을 들고 다닌다면, 그걸 넘어서서 항상 들고 다닌다면 정말 아끼는 물건임은 분명하다고 생각하며 하늘은 모래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물기를 가볍게 털어냈다. 물론 그녀에게 튀지 않도록 조심해서. 이런 작은 행동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거? 잘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고마워. 그런데 물을 좋아하지 않는데 들어가도 되는거야? ...혹시나 해서 묻는건데 정말 알콜 성분 없는거 맞지?"
싫어한다더니 갑자기 이번엔 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말에 하늘의 눈이 의심스러운 분위기로 그녀가 보여주는 병으로 향했다. 강장제를 먹으면 싫어하는 곳에도 들어갈 수 있는건가? 전혀 다른 효과 아니었나? 그렇게 생각을 하며 그는 우려스러운 목소리로 고개를 저었다.
"들어가는거야 자유겠지만 좋아하지 않으면 그냥 발을 담그는 정도로 하는게 좋지 않을까? 수영은 가능한거지?"
>>912 커플끼리 협의해서 다른 사람과 할 수도 있는 거니까.. (포크댄스가 아니라 담력테스트건, 혹은 무슨 활동을 하는 것이건) 가능하면 신청을 해줬으면 해! 커플끼리 할거면 서로 협의해서 각자의 이름 넣으면 되는거고, 아니면 다른 사람 찌르거나 랜덤 돌릴 수도 있는거고.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착각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하며 하늘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자신도 이럴 때 안 나간 것은 아니긴 하지만 일단 중요한 것은 아니었기에 하늘은 넘어가기로 했다. 사실 알려준다고 해도 자신이 알아볼 것 같진 않았으니까. 무대 위에 앉아있을땐 오로지 피아노만 바라보며, 모든 것을 피아노에게 맡기며 연주를 했으니 더욱 그러했다. 아무튼 이 누군지 모를 팬에게 마음 속으로 감사하며 하늘은 곧 그가 보여주는 유리조각들을 바라봤다.
바다에 흽쓸려 동글동글하게 깎여나간 유리조각은 상당히 아름다웠으나 조금 안타깝다고 하늘은 느꼈다. 물론 이 유리가 자신이 아는 그 유리가 맞을진 알 수 없었으나 이렇게 있다는 것은 그 과정 속에서 유리를 먹은 바다생물이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슬프진 않았으나 어느 정도 연민을 느끼며 눈을 감으며 하늘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마치 묵념이라도 하듯 그렇게 고개를 다시 들어올린 후에 하늘은 자신을 규리라고 소개한 이를 바라봤다.
"예쁘네. 그래도 이런게 너무 많이 나오지 않는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고. 아무튼 보여줘서 고마워. 좋은 구경 했어. ...그리고 텐션... 아니야. 아니야. 편한대로 있어도 돼."
역시 이런 높은 텐션의 상대는 대하기가 조금 어려웠으나, 그래도 그게 상대의 특성이라면 존중하는게 맞다고 생각하며 하늘은 내면으로 고개를 살며시 돌렸다. 상대의 영역을 존중하고 자신의 영역을 지키는 것. 그것이 하늘의 삶의 방식이었으니까.
"편한대로 불러도 돼. 강규리? 기억해둘게. 일단 내 팬인 모양이니 말이야. 그렇게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고등학생 2학년이지만."
팬 맞지? 맞지 않을까? 그렇게 내심 기대를 하는 모습은 자신에게도 팬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나름의 설램을 느끼는 고등학생의 모습이었다. 허나 곧 표정 관리를 하며 하늘은 자신의 머리를 정리했다.
"물론, 맛까지 있어서 정말 좋아해! 근데 평소에 너무 의지할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칼로리가 낮은 편은 아니니까! 그래서 자주 먹진 않으려고 했던 거야! 혹시 먹고 싶으면 말해!"
그렇게 말한 홍현은 강장제를 조심히 내려놓았다. 물에 들어가도 정말 괜찮겠냐는 하늘의 질문과 강장제에 향하는 의심스러운 시선에 홍현은 손가락을 턱 위에 놓고 고민하며 말했다.
"그래 그렇지..? 내가 왜 들어간다고 했을까? 알코올 성분은 확실히 없는 게 맞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당분 섭취가 훨씬 많아서 그런가 좀 흥분했던 것 같네!"
홍현은 고개를 숙이고 자신의 모습이 어딘가 웃겨서 킥킥대며 웃었다. 평소와는 다른 모습이라 왠지 나중에 많이 후회할 것 같았지만 일단 지금은 정신없는 이 상태를 즐기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홍현은 갑자기 겉에 입고 있던 가디건을 벗기 시작했다.
"수영은 빠져 죽지 않을 정도만 하지만 발만 담그는 정도가 나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한 뒤 홍현은 자신의 가디건을 강장제를 놔둔 곳 위에 올려놓곤 하늘을 보고 미소를 지음과 함께 손을 내밀며 말했다.
"너무 의지할 것 같다는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조절을 하고 있다는 거지? 그러면 괜찮은 거 아니야? 너무 푹 빠지지만 않으면 되는 거니까. 아. 나는 사양할게. 지금은 크게 몸이 안 좋거나 그런 건 아니어서."
자신에게 권하는 홍현의 제안에 하늘은 가볍게 오른손을 휘저었다. 물론 맛이 좋다고 하니 호기심은 있었으나, 자신의 몸 상태가 굳이 먹어야 할 정도는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조금 끌리긴 했는지 힐끗힐끗 병을 하늘은 아무런 말 없이 바라봤다. 나중에 수영 다 끝나고 콘도로 돌아갈 때 하나만 달라고 해볼까? 그런 생각을 잠시 하며.
"바다고 여름이잖아? 그럴 수도 있지. 가끔 살다보면 괜히 하이텐션이 될 때도 있고 그런 거 아니겠어?"
슬슬 들어가려는걸까? 가디건을 벗으려는 그녀를 확인한 하늘은 살며시 고개를 바다 쪽으로 돌렸다. 철썩이는 푸른 파도는 딱 자기 마음에 드는 색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에메랄드 빛과는 조금 다르지만, 저 정도면 충분히 맑은 에메랄드 빛이었다. 그에 만족하며 괜히 미소를 짓다 고개를 들어 막 들려오는 물음에 그는 대답했다.
"그럴게. 조금 쉬러 나왔지만 대화하면서 어느 정도 휴식은 취했으니까 말이지."
허나 자신을 향해 내민 손을 바로 잡진 않으며 하늘은 아무런 말 없이 그녀의 손을 바라봤다. 그러다 작게 소리없이 미소를 지으며 아주 살짝, 정말로 살짝 손가락 부분만 가볍고 약하게 잡는 느낌으로 잡으며 바다 쪽으로 살며시 발을 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