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일면식도 없거나 기피하는 사람이라면 텐션이 낮은 때 몇번 그럴 수야 있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그런 사람을 대하는 것도 아닐뿐더러 기분 역시 좋은 편이었다. 물론 당신이어서 기분이 좋은 것이라는 어느정도의 전제가 있긴 해도 누가 그런 것까지 염두에 둘까?
평소엔 딱딱하게 굳어있고 이리저리 찌르는 일이 많지만 이 순간만큼은 한없이 말랑해지는 그녀였다. 그렇다고 마냥 의식의 끈을 놓았다간 당신이 어떤 비범한 행동을 할지 모르니 약간의 긴장감 정도는 있으려나, 그래도 나름 즐거운 고민이니 그걸로 만족이지 않을까 싶었다.
"후후후... 부끄러운 건가요? 어차피 살다보면 부끄러운 일 정도는 얼마든지 일어날수 있지만..."
이유(수영복)가 이유인지라 선뜻 내비칠수 없다는건 그녀 역시 알고 있었다. 그녀라면 그런것에 딱히 거리낌은 없지만 단순히 학교에서 물놀이를 하는 것과 이렇게 바다까지 나와서 물놀이를 하는건 전혀 다른 것이라는 상식 정도는 기억하고 있었으니, 의문을 가질지언정 그것에 대해 캐물을 생각은 없었다. ...만, 부끄러워하는 모습을 보니 어째선지 모르겠지만 그것에 순순히 따르고 싶다는 오기가 생겼을 것이다.
무엇보다 아랫입술을 뻗은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고혹스러운 미소를 짓는 당신의 모습에 혹한걸지도 모르겠지만, 어차피 좋은게 좋은 거니까. 거부할 생각은 애당초 리스트에 있지도 않았던만큼 즐길 수 있을때 충분히 즐기는것 또한 여름을 나는 법이었다.
"흐음~ 제가 늘상 하던 말을 반대로 듣게 되다니, 감회가 새로운데요?"
천천히 내밀어진 손을 가볍게 잡고 일어난 그녀는 여전히 흰색과 검은색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짐들을 한켠에 놓아두었고, 장난스레 자신의 호칭을 따라 부르는 당신에게 한껏 웃어보이며 대답했다. 어째 그런 모습이 귀여워보이기도 해서 저도모르게 손을 뻗어 당신의 얼굴쪽으로 가져다대려 했을까?
"그래도, 벌써부터 그런 발칙한 생각을 생각하는건 곤란하다구요~? 물놀이 하기도 전에 진이 빠질 생각은 없잖아요?"
마치 '정말 그럴셈인가요?' 라고 되묻듯 한쪽 눈썹만 올라간 표정과 함께 오므린 손으로 뺨을 잡듯, 살짝 꼬집는것 같으면서도 딱히 힘은 실리지 않은 손길이 잠깐 전해졌다.
" 물놀이 하기 전의 준비운동이라고 가볍게 이유를 붙인다면 못 할건 없지? 적어도 몸이 풀리는 건 사실일테니까. "
시아는 자신의 뺨에 다가오는 당신의 손을 피하지 않고, 얌전히 고개를 움직여 뺨에 닿는 손에 부비적거렸다. 마치 고양이처럼, 살살 부비적거린 시아가 혀 끝으로 입술을 적시며 고혹스런 미소를 지어조였고, 진담일지 농담일지 모를 대답을 들려준다. 일단 슬혜도 일어난 만큼 이대로 가만히 서서 시간을 보내는 건 아쉽다는 듯 손을 잡고 모래사장을 걷기 시작한다.
" 맞다, 선크림은 발랐어? 안 발랐으면 이따 놀기 전에 바르고 놀자. 예쁜 피부 타버리면 안되잖아. "
시아는 당신의 부드러운 손을 만지작거리며 앞장서서 나아가다 마침 생각이 났다는 듯 초콜릿색 눈동자를 당신에게 돌리고는 말을 이어간다. 물론 피부 걱정만이 선크림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아니겠지만, 그래도 표면적인 이유로는 완벽하지 않았을까.
" 내가 이번에 괜찮은 선크림을 가져왔거든. 물에도 잘 안 녹고, 오래 유지되는걸로. "
꼼꼼히 발라야 밤에 따갑지 않을테니까. 시아는 방긋 미소를 지어보이며 부드럽게 속삭이곤 맑은 웃음을 흘린다. 장난스레 혀를 빼물고 웃어보인 시아는 다시 고개를 앞으로 하곤 성큼성큼 나아간다. 걸음이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주변의 인파도 줄어들기 시작한다. 확실히 사람이 없는 곳이 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닌 모양이었다. 해변이 휘어져 안쪽으로 들어가 시야에서도 운좋게 가려지는 곳에 도착한 시아는 돗자리와 가방을 내려놓는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모처럼 바다에 왔는데 밤에만 나와서 돌아다니는 건 좀 아깝지. 물장구 정도는 쳐야 조금 덜 억울할 것 같다. 사실 시아가 얘기해주지 않았다면 별생각없이 누워 있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시원한 실내에서 창밖으로 구경만 했거나. 아마 그랬다면, 바다 구경 얘기 들을 생각하고 물어본 친구들은 사하를 황당하게 쳐다봤겠지. 시아가 말해준 덕에 그럴 일은 없겠지만. <모래사장이라 발 괜찮아요.> 제 맨발로 향하는 듯한 눈길에 사하가 가볍게 말한다. 물에 젖은 탓에 모래가 들러붙는 건 좀 거슬렸지만, 그것 빼곤 괜찮았다. 이따 들어가기 전에 바닷물에 한 번 씻고 어차피 젖은 신발에 대충 발 구겨 넣고 들어가면 될 테니까.
"나도 공부 싫어서 왔는데, 뭘. 공부 생각 아까 저쪽에 던져서 이제 없을 걸요."
사하가 바다 너머 어딘가를 보는 척 하며 웃었다. 공부생각 안녕! 지금쯤 러시아에 닿았니? 거기에도 사하가 있다니까 알아서 잘 살도록 해. 저편에서 빛이 한 번 반짝이고, 사하는 힘차게 손을 흔든다. 그리고 페이드 아웃. 상상 속에서 벌어진 일이므로 사하는 그냥 느릿느릿 편안하게 걷고 있다.
"사실 난 물에 들어가는 거 별로 안 좋아해요……."
사하가 머쓱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이렇게 말하니까 진짜 공부 싫어하는 사람 같잖아. <수영 못 하기도 하고 뒷정리도 귀찮아서.> 덧붙인다.
"그래서 시아는 마음 맞는 사람이랑 왔나?"
시아 보며 짓궂게 웃는다.
/ 맨발이라 그것만 수정해서 생각해주면 될 것 같아! 슬리퍼는 숙소에 있는 거였읍니다 ㅇ.<
마치 고양이가 그러하듯 손에 얼굴을 부비는 당신의 모습을 보니 고양이와 함께 사는 입장인 그녀에겐 다소 신선하게 와닿았을지도 모른다. 적어도 평범한 고양이와는 다르게 대화가 가능하고 같은 밥을 먹을수 있단 차이 정도야 있겠지만,
"음~ 뭐 그정도라면 문제될건 없지만요~"
다만 뒤이어 들려온 말엔 아차, 하는 생각에 잠시 머리를 짚었을까? 그 뒤엔 태연하게 제 머리칼을 쓸어넘기는 동작으로 마무리지었지만 잠시동안 갈곳을 잃었던 눈동자는 조금이나마 당황했다는 모습을 보여주기엔 충분했다. 나름 진지한 이야기인지, 아니면 그저 장난치기 위한 농담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았지만 그 특유의 미소 때문에도 전자쪽에 더 힘이 실리는 건 어째서일까?
"...아, 깜박했네요... 그런쪽은 딱히 신경 안썼던지라..."
의외로 정말 몰랐다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그녀의 반응이 바로 전해졌다. 쉽게 타는 성질은 아니기에 구태여 태닝할 이유도 없던 피부였지만 예전엔 신경쓰지 않았다면 지금은 조금이나마 시선이 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람은 관심가는 이가 생기면 자연스럽게 자기 외모에 신경쓰게 된다더니, 그게 딱 맞는 말이었을까? 구애의 대상에게 조금 더 잘보이기 위해 치장하는 동물들의 예시는 사람이라고 크게 차이나는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확실히 그정도 성능이 있다면 어차피 노는거 마다할 것도 없지만... 아, 확실히 괜찮은 곳이네요~"
아무리 생각해도 당신의 장난스러운 웃음과 함께 어우러진 당당한 걸음걸이에 무언가 꿍꿍이가 있을 거라는것 정도는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딱히 거절할 생각도 없고 어울릴수 있다면 뭐든 어울리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었기 때문에 수긍은 빠른 편이었다.
게다가 해변가의 들어가고 나온 호도 저쪽의 시야에 가려질법했기에 주변 인파에 신경쓸것 없이 느긋한 분위기를 즐길수 있는데엔 최적의 장소라 할수 있었다. 풍경도 제법 괜찮았고, 어쩌면 사진찍기에도 딱 좋은 배경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그녀였다. 물론 아무 이유없이 찍는 사진엔 잔상만이 남겠지만,
"그나저나 돗자리까지라니, 후후후... 상당히 본격적이네요?"
그녀 역시 자신이 필요한것 정도엔 준비성이 철저한 편이었지만, 기껏해야 햇빛을 충분히 가릴 정도의 모자, 크로스백 따위가 전부인 구성이었기에 심플하다면 심플하다 볼수 있었다.
모래의 성질에 대한 얘기를 해주고 모래성을 좀 더 뒤쪽에 지어야한다고 알려주자 너의 표정이 바뀐다. 마치 무언가 깨달았다는듯 머리 위에 전구가 보이는 것 같은건 기분탓일까. 콜라 아니라니까, 자꾸 내 마니또 별명과 이름을 헷갈리는 네 얼굴을 눈을 가늘게 뜨며 보았다. 지금까지 네가 지었던 표정 중에 제일 생기있네. 그러다 네가 일어나는 것을 눈을 쫓는다.
" 모래성 만들기 ... 할 거 없으니까 같이 해볼까. "
어차피 시간을 때우다가 들어갈 생각이었기에 나름 괜찮은 제안이었다. 하지만 모래성을 만들자고 한건 너니까, 네가 만들고 싶은대로 만드는게 좋겠지. 모래성은 무엇보다 역할 배분이 중요하다. 이렇게 파도가 들이치는 곳에 지으면 쉽게 지을 수 있지만 쉽게 무너지기 때문에 먼저 흙을 옮기던가 아니면 물을 붓던가 둘 중 하나를 해야하는데,
" 그럼 네가 성을 지어. 내가 흙을 퍼서 가져다줄께. "
사실 모래성은 바구니 같은 곳에 꾹꾹 눌러담아서 지어야지 멋있는 모습이 완성되지만, 그렇게까지 할만한 도구가 우리에겐 없었으니까 이렇게 젖은 흙을 옮기는게 가장 좋은 방법이다. 여름용의 얇은 긴바지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바지춤을 걷어붙이고 파도가 밀려오는 모래사장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조금씩 모래를 파도가 닿지 않는 곳에 쌓아두기 시작했다.
" 그렇다고 욕심 부려서 크게 지으면 오늘 안에 안끝날수도 있어. "
혹여나 하는 마음에 말해두고 열심히 흙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거 내일 몸살 나는거 아니야?
>>244 하늘이는 다른 사람과 벽을 쌓거나 멀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영역 안으로 사람을 쉽게 들이진 않지. 정말로 자신이 마음을 허락한 존재가 아니라면 말이야. 그래서 지금까지 사랑이라는 감정을 느껴본적이 없어. 그래서 그 감정을 느껴보고 싶지만, 정작 자신의 영역 안으로 들어온 이가 제대로 없으니 (소꿉친구나 가족 등 제외) 그대로는 사랑을 앞으로도 알 길이 없다고 신이 선언한다는 비설 같은 거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