왠지 장난기가 솟아서 여러번 예쁘다는 말을 돌려주니 뭔가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소리만이 들려온다. 사실 소리가 들려오진 않았지만 잠시 멈춰버린 사고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입꼬리가 씰룩거리는 것을 보아하니 시아는 자신의 선택이 그닥 나쁜 것은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기분이 좋아보이는 것 같으니 분명 나쁜 것은 아니겠지.
" 맞아요, 그냥 편하게 시아라고 불러주시면 된답니다. 사하 선배. "
시아는 고개를 기울이며 눈을 맞춰오는 당신에게 눈웃음을 부드럽게 지어보이며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눈 앞의 선배도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으니 밤의 산책이 지루해질 일은 없을 것 같단 확신이 들었다. 역시 여행지의 밤은 무언가 있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 내일은 꼭 보도록 해요. 낮의 매력과 밤의 매력은 많이 다르거든요. "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당신의 말에 놀란 듯 잠시 눈을 크게 떴던 시아는 이내 평소처럼 잔잔한 눈매로 돌아와선 조곤조곤 부드럽게 말을 이어간다. 부디 사하가 밤과 낮의 바다를 즐길 수 있기를 바란다는 마음이 물씬 들어간 듯한 목소리였다. 슬그머니 시선을 사하의 발로 향하는 건, 슬리퍼를 신은 그녀의 발이 무리가 가지 않게 걸음의 속도와 걷는 코스를 생각해두는 모양새였다.
" 놀려고 왔어요, 후후. 왠지 여기까지 와서 공부하는건 아쉬우니까 공부는 잠깐 뒤로 미뤄두고.. 뭐, 3학년 선배님한테 공부를 미뤄두라는 무책임한 말은 하는게 좀 그러니까... 후배로서 선배한테 공부 생각보단 잠깐이라도 후배를 봐달라고 하고 싶지만요. "
서툴게 눈을 찡긋해보이는 당신의 모습에 작게 웃음을 터트린 시아가 옆으로 한걸음 더 다가가선 부드러운 목소리로 상냥하게 말을 이어간다.
" 물놀이 좋아해요. 뭐, 그렇게 떠들썩하게 노는 편은 아니지만.. 맘이 맞는 사람이랑 물놀이를 하는 건 즐거운 일이거든요. "
안그래요? 하고 묻는 것처럼 시아는 자연스럽게 사하와 눈을 마주하며 대화를 이어간다. 두사람의 걸음걸이는 어느샌가 슬리퍼를 신은 사하의 발에 전혀 무리가 가지 않도록 느릿해져있었다.
새하얀 오버핏 셔츠와 검정색 돌핀 팬츠를 입은 시아가 어느샌가 다가와 파라솔 아래에서 공책의 페이지를 넘기며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는 슬혜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자그마한 맑은 웃음소리. 가느다란 손이 천천히 다가와 슬혜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 혼자서 뭐하고 있어. 나 보고 싶었어? "
깔끔하게 기다란 검정색 머리카락을 뒤로 묶은 시아가 상냥하게 말을 던진다. 슬혜를 바라보는 초콜릿색 눈동자엔 바라보는 슬혜를 향한 애틋한 마음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슬혜의 뺨을 쓸어내린 가느다란 손가락은 천천히 머리카락을 타고 올라가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빗어내렸고, 천천히 시아는 슬혜의 목을 뒤에서부터 감싸안았다.
" 나, 슬혜랑 물놀이 하고 싶은데... 해줄거지? 그다음에 아이스크림이던 팥빙수던, 문어다리던... 같이 즐기자. "
해줄거지? 하고 물어보면서도 속삭이는 귓가에 쪽하고 소리를 내는 것은 분명 함께 하자는 듯 유혹의 손짓을 하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다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을 때 마음을 먹었던 것. 조금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기. 이것이 조금 정도가 아닐지도 몰랐지만 적어도 후회할 일을 만들고 싶진 않았기에 자신이 먼저 슬혜에게 다가가보는 시아였다.
" 저어쪽으로 가면 사람이 없는 쪽이 있더라. 아무래도 편의시설이랑 멀어서 그런가. "
그리고 나, 수영복 입고 왔거든. 슬혜의 귓가에 자그맣게 짓궂은 속삭임을 던지곤 천천히 몸을 떼어낸 시아가 장난스레 새하얀 티셔츠를 팔랑거린다. 그래봐야 보이는 것은 새하얀 배가 아주 잠깐 보일 뿐이었지만.
한창 머릿속의 레시피들과 실랑이를 벌이던 도중 귓가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그때서야 눈이 트인 것인지 당신쪽으로 눈길이 갔던 그녀는 제 뺨을 쓸어내리는 부드러운 손길과 함께 전해진 작으면서도 맑은 웃음소리에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답해주었다.
"간단하고 누구나 즐길수 있을만한 요리를 생각하고 있었죠? 그리고..."
공책을 덮고서 똑바로 바라보자 눈에 띄는 깔끔하게 묶인 검은 머리카락도 그렇고, 해변가에 딱 맞는 옷 덕분에도 오늘따라 유달리 예뻐보인건 마냥 기분탓이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이런데까지 왔는데, 어떻게 안보고 싶다 거짓말 할수 있겠어요?"
새삼스레 느끼는 감상평일 수도 있겠지만,
상냥한 말과 애틋한 눈길에 잠깐 시선을 마주하다가도 천천히 머리카락을 타고 올라가 다시 빗어내리는 손길에 고양이가 그러하듯 눈을 감아 골골거리는 소리를 따라하던 그녀는 자신의 목을 감싸안은 당신을 가볍게 끌어당겼다.
"물놀이라... 싫어하는건 아니니까요. 게다가 그대야 부탁인데 들어주지 못할 이유도 없구요?"
먹거리는 그 다음에 즐기자, 라는 살짝 유혹이 가미된 말을 어떻게 거절할수 있을까. 보다 적극적인 푸시에 부러 눈을 휘며 웃어보이던 그녀는 장난스러운 손짓과 함께 팔랑거리던 티셔츠 안에 보이는 새하얀 살결에 살짝 놀라다가도 당신의 짓궂은 속삭임에 그리 쉽게 넘어갈 생각은 아니었는지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를 흘려냈다.
"후후후... 다들 몰려있는 곳에서 굳이 떨어져나온다니, 그러다 큰일난다구요? 뭐... 그동안 저도 꽤나 성장했으니까. 대결이라면 지지 않을 거지만요~"
라고 당당하게 말은 해도, 그녀는 지금껏 그부분에서만큼은 이긴적이 없었다. 심지어 참가인원이라곤 단 두명뿐인 수영복 대결에서,
패착요인이라 꼽자면, 그녀가 심플하기 그지없는 홀터넥 비키니를 몇년째 고수하고 있단 것일까? 그것도 뻔하디 뻔한 검은색이었으니 말이다.
당신이 공책을 덮고선 똑바로 바라보자 시아는 장난스런 눈웃음을 지어보이며 나긋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나른한 표정을 짓는 그 모습 마저도 사랑스럽다고 느껴지는 것은 자신도 꽤나 유별난 사람이 되어버린 것 같다고 생각해버리고 만다. 아무튼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 보고 싶다니 조금 이따가 그 기대에 부응해줘야 할 필요가 있겠다고 생각하는 시아였다.
" 후, 들어줄 때까지 조르려고 했는데 슬혜가 빨리 들어줘서 다행이야. 사람도 많은 곳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아도 될테니까. "
자신을 가볍게 끌어당기는 당신의 손길에 얌전히 딸려가며 장난스런 목소리로 대답을 돌려준다. 정말로 어린애처럼 졸랐을지, 아니면 그냥 포기하고 말았을지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냥은 이 기회를 날려버릴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적극적인 움직임에 미소를 지어보이던 슬혜가 흘끗 보였을 살결에 놀라는 모습에 맑은 웃음을 더하는 것은 덤이었다.
" 큰일이라... 슬혜한테 당하는거라면 딱히 나쁠 건 없을지도? "
겁을 주듯 말하는 슬혜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아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자신의 아랫입술로 가져가 꾹 눌러보이며 입꼬리를 살며시 올린다. 고혹스런 미소, 그것을 지어보인 시아가 천천히 손을 내민다. 앉아있는 슬혜에게 일어나라는 듯.
" 자, 그러면 얼른 가볼까? 그대야? "
부드럽게 손가락을 움직여보이며 손을 내민 시아가 방긋 눈웃음을 지으며 속삭인다. 장난스럽게 슬혜가 자신을 부르는 호칭을 따라하면서.
새슬이 혼잣말하듯 던진 말에 문하는 고개를 들며 질문을 던졌다. 딱히 대답을 바란 것은 아니었던지, 대답 대신에 자신은 잘 잤냐는 반문이 돌아오자 문하는 별말없이 새슬의 질문에 대답했다.
"나는 나쁜 꿈을 많이 꾸는데... 방금은 꿈 없이 푹 잤어."
문하는 양반다리를 하고 앉아 자신의 종아리를 팔로 짚어 상반신을 기댔다. 그는 조금씩 평소의 표정을 찾고 있었다. 얼굴 근육이 그 상태에 익숙해져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영 처음 인상처럼 굳어들어가지 않았다. 원래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잊어버리기라도 한 듯이. 이상할 정도로 조각상같은 얼굴이 있던 자리에, 조금 잠이 덜 깬 것 같고, 시무룩해 보이는 인상의 소년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새슬이 잊게 해 주었던 것들 중 일부를, 새슬이 본의아니게 다시 문하의 머릿속에 되살려주었다.
"돌아간다고 해도 말야..."
그게 그에게 나쁜 일이라는 뜻은 아니었다. 그가 잊어서는 안 될 의문이었기에... 그를 그로서 존재하게 해줄 수 있는 의문이었기에. 그러나 한 사람의 존재를 힘겹게나마 지탱하고 있던 그 의문은 그만큼 어려운 것이었다.
"어디로 돌아가야 되지?"
그는 버려진 떠돌이 늑대개였다.
그의 얼마 안 되는, 이젠 기억마저 흐릿한 황금같은 유년기를 제외하면, 그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집에 있다' 는 생각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그게 그에게 서류상의 집이 없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분명히 아버지의 명의로 된, 이 도시에 남아있는 작은 주택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것을 house라고 부를 수는 있어도 home이라고는 부를 수 있을까? 문하는 문득 강철 대문의 삐거덕 하는 음울한 소리와, 집 안의 고요히 죽어 있는 공기를 떠올렸다. 자신이 지금 숨을 쉬고 있는지도 의심되는 삭막한 석관 같은 풍경.
문하는 의문문으로 끝맺은 말에 뭔가 더 입을 열어 하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고개를 들고 가만히 새슬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차마 말하지 못할 것 같아 바라보고만 있는, 그런 슬프고 겁먹은 눈. 흐려지지도 젖어들지도 않았으나 오히려 반대로 메말라서 생기를 잃은 눈. -그가 평소에 하고 있는 눈빛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