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태는 설렁설렁 복도를 걷고 있었다. 두번, 딱 두번 페인트 볼을 터트렸지만 그 터트리는 감각이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에 자신해서 페인트 볼을 찾아 걸음을 옮기는 중이였다.
이 성격만 보면 왠지 청궁에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청궁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쑥덕거리며 무슨 장난을 칠지 열심히 의논하는 모습을 보다가, 단태는 걸음을 다시 옮기려 했다. "엇! 조심!" 갑자기 청궁 학생들이 모여있던 곳이 소란스러워지더니 누군가가 소리치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던 단태는 눈앞으로 날아오는 것을 바닥에 패대기쳤다.
올해로 7살난 소녀는 자주 아픈 아이였다. 툭하면 아파서 외출하는게 금지에 가까웠다. 그래도, 가끔 아프지 않은 날은 밖에서 노는 것을 허락받곤 했는데. 오늘이 그런 날이라 소녀는 집 뒤의 숲에서 놀고 있었다. 그래봐야 집 뒷편의 정원 같은 곳에서 클로버더미를 헤집거나 떨어지는 나뭇잎을 잡으려 하거나 하는게 전부였다.
"......"
안색이 창백한 소녀는 치맛자락을 꼭 쥐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고개를 돌릴 때마다 머리를 묶은 리본이 달랑거린다. 자신은 분명 집의 뒷문이 보이는 정원에서 놀고 있었는데, 어느새 주변이 처음 보는 곳으로 바뀌어있었다. 숲은 숲인데 분위기도 나무도 전부 다른 숲이다. 게다가 저기 멀리서는 많은 사람들의 소리도 들린다. 소녀의 집은 항상 조용하고 적막한 곳이라 사람소리는 낯설 뿐이었다.
하지만 소녀는 울지 않았다. 대뜸 낯선 곳에 떨어진게 무서워 울 법도 한데, 울지 않고 생기 없는 눈으로 이리저리 돌아보기만 한다. 그런 아이였다. 그녀의 어린 시절은.
그러던 중 그녀의 등에 맞았던 니플러가 정신을 차리며 삐익 울었고, 그 소리에 소녀가 뒤를 돌아보았다. 아직은 본적 없는 니플러였지만 어쨌든 동물이란 점에서 저항감은 덜 드는 듯 했다.
삐익? "......" ㅃ...삑...? "...삑삐이...?"
난생 처음 보는 동물의 이름을 몰라, 울음소리를 딴 이름을 불러보자 흠칫 놀란 니플러는 서둘러 수풀 사이로 숨어들어갔다. 그 빠른 움직임에 소녀도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이내 고민하듯 숲과 학교 쪽을 번갈아본다. 처음 보는 숲과 사람 소리가 들리는 학교. 둘 중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치맛자락을 놓고 작은 구둣발을 옮겼다. 사박사박 걸어간 곳은 어두컴컴한 숲이었다.
가문에서 편지가 왔다. 어머니의 패밀리어인 Dear가 보낸 것이 아닌 엉클 잭¹의 것이다. 큰까마귀가 아닌 조그마한 까마귀는 달링의 몸집에 부리나케 도망간다. 편지를 뜯어 읽어본 그의 등에 돋아난 검은 날개는 제기능도 하지 못하는 장식품이지만 일정한 시간동안 잠깐 틈만 벌려 살랑거렸다 다시 접기를 반복한다. 마지막에 적힌 잉크 자국까지 다 읽고나서야 그는 입을 열 수 있었다. "잠시 나갔다 오마. 순찰 시간이 다 되었으니. 달링, 이리 오렴. 이 오라비와 함께 간만에 나가자꾸나."
달링이 어깨에 신이 나서 앉는다. 그는 가장 먼저 청궁 근처로 향한다. 가깝기 때문이다. 청궁 다음으로는 주궁, 그 다음으로는 백궁에 가고, 다시 현궁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손에 쥔건 처음 보는 장신구다. 그가 휴학 이후 복학하며 늘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가느다란 은줄에 로켓²같은 무언가가 하나 매달려있다. 막 세공한 건지 아직 변색되지도 않고 반짝거린다. 달링은 로켓에 관심을 가지다 그 안에 든것이 무엇인지 잘 알기 때문에 대신 그의 뺨에 부리를 부볐다.
"그래, 이 예쁜 것. 네가 내게 맞춰줄 이유는 없지. 사랑스러운 여신아, 네가 나의 단 하나뿐인 까마귀임을 누가 모를까."
그는 로켓 부분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달링을 손으로 쓸어줬다. 달링은 잽싸게 날개를 펼쳐 어딘가로 날아간다. 그는 능숙하게 손을 뻗는다. 곧 달링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낚아채온 것은 쥐다.
"내게 주는 거니?" "Yes." "영특하고 사랑스러운 것."
아직 살아있어서 찍찍대는 쥐를 그는 손 위에 올리고 가볍게 쓰다듬었다. 쥐는 꼬리가 길 뿐이지 아주 사랑스러운 동물이다. 그의 날카로운 손톱은 쥐의 등을 친절하게 쓰다듬었다. 청궁 주변 숲에 도착하고는 주변을 둘러봤다. 여전히 타니아는 없다. 그의 인생에서 영원히 퇴장한 것이다. 그는 청궁 주변을 천천히 돈다. 쥐를 적당한 곳에 놓아주려는듯 하는 것 같기도 했다. 달링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고 그의 귀를 애교스럽게 깨문다.
"그래, 자네는 통금 시간이 다가오는데 무얼 하고 있는겐가?"
그는 그렇게 말하며 생명력이 가득한 청궁에서 쥐의 경추를 엄지로 눌러 부러트렸다. 똑 소리를 뒤로 쥐는 축 늘어져 즉사한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한끗차이다. 당신을 바라보는 눈은 여전히 예민하고, 독기가 차있으며, 표독스럽다. 단 한번도 변함없는 눈은 혼혈과 머글, 그리고 순혈을 가리지 않았다.
단태와의 대화를 이어가며 그녀도 느낀 것이 있다. 저번엔 지금보다 말투가 좀더 능글맞았고 말을 받아치는 것 역시 조금더 능숙, 하다고 할까. 뱀이 기어가듯 매끄러웠는데. 여기 온 뒤로 느껴지는 단태는 정반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 때와 다르다. 여기 와서 마주쳤던 눈빛, 그녀가 뒤를 돌아 마주한 눈빛이 괴리감을 좀더 짙게 만들었다. 어둠 속에서 떠오르는 붉은 안광-
아, 그녀는 그것을 이전에도 보았다. 저주에 걸린 채 다 죽어가는 마법사를 상대할 때였다. 그 날도 오늘처럼 가득 찬 달이 뜬 날이었지.
상념으로 빠졌던 그녀의 정신을 돌아오게 한 건 단태의 경망스런 웃음소리였다. 정신을 다잡은 김에 제가 무어라 말했는지 되짚어본다. 그러니까, 그래, 어느 본성에 대해 얘기했었다. 소유욕. 원하는 대상의 전부를 제 것으로 하고 싶어하는 비뚤어진 욕구는 당연한 것이라고. 단태는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며, 보통 여자아이들은 다르지 않느냐 말했다. 그 뒤에 따라온 비유인지 뭔지 모를 말에 그녀는 못 참겠다는 듯 소리를 내어 웃었다. 소리를 내었다고 해도 후후, 하는 얌전한 웃음소리다. 단지 그 소리가 낮아 읍습하게 울렸을 뿐이다.
"글쎄요. 누군가는 그렇겠지만, 일단 저는 아니라서요. 제가 태어나서 가장 먼저 느낀 건 말랑하고 아름다운 세상 따위 없다는 거였어요."
말 뒤에 구구절절한 사연이 붙을 만도 하지만 그녀의 말은 뒤가 없다. 단태가 그녀와의 친분이 얕음을 알고 관계에 대해 묻지 않는 것처럼 그녀도 의미 없는 사람에게 자신의 얘기를 술술 털어놓지 않는 것이다. 그만한 얘기를 들었다면 모를까. 그래도 서로 이러는 편이 좋을 거라 생각하며 느릿하던 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금줄 가까이까지 왔기 때문이었다.
"선배가 그렇게 생각하시니 원하는대로 하시면 되겠네요. 부외자가 너무 껴들어도 민폐니까요. 그닥 궁금하지도 않고."
그들의 연애는 그들의 것이니 더 말을 얹어봤자 폐만 될 테다. 그러니 이 이상 그에 관련해 말은 않겠다며 어깨를 으쓱였다. 자기 일만 생각하기에도 짧은게 인생이다. 금줄 앞에 서서 그 너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몸을 돌려 금줄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번엔 다른 질문을 해볼까 하는데, 대답하기는 선배 마음대로 하세요."
금줄에는 절대 닿지 않으며 그렇다고 너무 멀어지지도 않은 일정거리를 유지하며 그녀가 말을 덧붙인다.
"선배가 그런 불안정한 모습을 보이는 걸 이번으로 두번째 본 거거든요. 저번에, 반 시체 같은 마법사가 습격해 왔을 때에도 그랬잖아요. 생각해보니 두 날 모두 보름날인데, 그저 우연인 걸까요? 아니면 뭔가 있는 걸까요. 저주라던가."
조그마한 니플러를 쫓아 작은 소녀가 열심히 수풀 사이를 헤쳐들어간다. 바스락바스락, 바스락바스락. 정신없이 들어가다보니 어느새 숲의 한중간이라. 앞도 뒤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나무들 사이에서도 소녀는 울지 않는다. 몇번을 두리번거리다가 근처 나무등치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을 뿐이다.
"......"
얌전히 앉아있다보니 소녀가 쫓던 니플러가 수풀 속에서 고개를 내밀었다. 소녀는 일어나지 않았고 니플러도 가만히 있었다. 기묘한 대치를 이어가다가, 니플러는 다시 수풀 속으로 사라졌다. 파사삭! 하는 잎사귀 사이로 자그마한 공이 굴러나왔다.
알록달록한 공은 소녀의 발치까지 굴러왔다. 멀리도 아닌 바로 앞까지 온 공을 보고, 손을 뻗어 잡아본다. 말랑하니 감촉이 제법 좋다. 잘 때 안고 자는 인형의 느낌 같았다. 비슷한 느낌이다보니 한참을 만지작거리는데, 어느 순간 손톱이 잘못 찌른 탓일까. 퍽 하고 작은 손 안에서 페인트공이 터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