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지는 않는데 실력을 기를 수 있는 일이란 건, 결국 위험한 일이란 게 아닐까. 턱 위에 손가락을 올려 괜히 하는 행동으로 턱을 몇 번 쓸던 은은 축객령을 내리는 교수의 말을 따라 얌전히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 얼마나 지났던가, 은은 학교 앞 숲으로 가는 길에 섰다. (딱히 그러고 싶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지팡이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서)소중히 챙긴 지팡이를 꾹 쥐고서. 요즈음은 꽤 말을 잘 들어주는 듯했으나, 붉은 손자국 같은 괴이를 마주쳤는데 주인이 끌려가는 것보다야 잠깐 말을 들어주는 게 나았다는 의지일 뿐이었을 것이다. 이 지팡이, 진지할 줄을 모른다. 번쩍번쩍 하는 효과만 화려하고.
은은 좀 더 생산적인 생각을 해보기로 했다. 다른 사람도 여기 왔을까? 만티코어...를 잡으러. /이것만 쓰고 잠깐 다녀올게요!
이상한 사고에 휘말린 여파는 조금 길게 이어졌다. 기분을 달랠만한 것도 없으니 더 그랬다. 하필 그 날 왜인지 기타줄이 일제히 끊어진 탓이다. 그런 와중에 들을 수업이 천문학 하나 뿐이라니. 점수고 나발이고 방구석에서 이불 뒤집어 쓰고 잠이나 자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 하고 수업에 나가는 그녀가 있었다.
수업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단지 끝났다는 말만이 귀에 쏙 들어왔다. 아, 드디어. 칼 교수가 말을 하던 말던 그녀는 가장 빠르게 교실에서 빠져나왔으나 그대로 기숙사로 돌아가 틀어박힌다는 예정은 이룰 수가 없었다. 빌어먹을 괴수를 잡아야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
불만을 숨기지 않고 드러낸 얼굴은 구긴 것처럼 일그러진다. 쯧! 하고 혀를 찬 것도 모자라 아랫입술을 깨물며 치렁치렁한 머리를 올려묶는다. 탄력 좋은 머리끈으로 포니테일을 하자 평소보다 인상이 사나워졌다. 손바닥으로 미간을 꾹 눌러 풀어놓긴 했지만 그래도 분위기가 사나운 건 그대로다. 그 상태로 그녀는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평소 가볍게 들던 손짓에 비하면 지금은 지팡이로 찌를 듯이 쥐고서, 성큼성큼 걸어 학교 앞 숲으로 갔다.
학생 몇이 이상한 일을 당했는데 수업은 여전하다. 백정의 권유로 잠을 자긴 했지만 그마저도 30분정도 지나니 눈이 저절로 뜨여 하루를 꼬박 새웠다. 다크서클이 좀 사라지나 싶으면 이런 일이 생기니 환장할 노릇이다. 한참 옆에서 낯선 숨소리를 듣다 평소 일어나던 시간에 맞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니 천문학 수업이 있는 날이다. 하늘로 운세를 점친다는 자체가 그로서는 다른 세상 이야기다. 구름과 별, 달의 움직임이 대체 어떻게 미래를 예측하는지 모르겠지만 오늘도 칼 교수는 예언을 했다.
사람이 가장 화가 난다는 순간이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말을 하다 마는 것이고……. 아무튼 그렇다. 그렇지만 달리 화는 나지 않는다. 이젠 아! 뭐 일이 터지려나보다! 하는 생각이 당연하게 됐다. 고작 몇개월만에 적응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젠 스트레스를 탈에게 푸는게 당연해진 것 같았다. 만티코어를 잡기 전 준비해야할 것이 몇가지 있어 그는 기숙사로 잠시 들어갔다.
"만티코어를 잡을 예정이다. 위험할 지도 모르니 오늘은 데려가기 어렵겠구나. 그래도 따라올 것이면 창문을 통해 나오려무나. 혼자 있고 싶다면 안에 오레오가 있으니 먹으면서 기다리렴. 오래 걸리진 않을 게야. 다만 달링이 괴롭히면 바로 말해야 한다."
뭔가 삼킨 그는 머리를 틀어올린다. 헐겁게 틀어올린 머리카락 뒤로 그가 지팡이를 챙겨 기숙사 밖으로 나선다. 따라오든 말든, 만티코어 패는 일이 더 중요했다.
아성은 열심히 주위를 둘러보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니플러들만이 고개를 내밀고 있을 뿐. 혜향교수는 절룩거리며 학생들에게 다가왔고 아성은 혜향교수의 전적이 있는 터라 그를 경계했다. 그의 본성은 나쁘지 않음을 알고 있음에도 어쩔 수 없다. 그는 한때 탈의 일원이었으니.
가증스러운 얼굴. 저 위선자. 레오는 입술을 살짝 깨물곤 가만히 노려보았다. 뒤에 있다 이거지. 몸풀이 상대따위가 아니라 잘못하면 정말로 크게 다치거나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신비한 동물이라면 관심이 있는 과목이라 열심히 공부했었고, 그 교수님도 좋았.. 아. 쓸데없는 생각이 든다.
" 비켜 "
레오는 두 눈을 똑바로 뜨고 혜향교수를 노려보며 그 앞에 섰다. 그리곤 어깨로 툭 치고 지나가며 저 쪽에서 자고있다는 만티코어를 찾아나섰다. 또 가슴이 아프다. 뭔가가 쿡쿡 찌르는 기분이 들었다. 뭔가가 너무나도 불편한 기분. 몸 속에서 파도가 치는 기분. 레오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넘겼다. 머리가 많이 길었구나. 자자, 중요한건 이게 아니지.
빨리 빨리 해치우던가 하고 돌아가고 싶은데, 막상 학교 앞 숲까지 나오니 안 보인다. 그 만티코어, 작은 크기도 아니라 쉽게 보일텐데 어디로 숨은 건가. 다시 주름 잡히려는 미간을 눌러 펴놓고 한숨을 푹 내쉰다. 오는 동안 씹은 입술은 붓다 못해 너덜하다. 그래도 괴롭힐 부분이 그것 뿐이었으니 계속 입술을 잘근대다가 혜향 교수와 마주쳤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표정을 구겼다가 펴고 예의상 고개만 꾸벅 숙였다 들었다.
"네."
친절하게 그 위치를 알려준 혜향 교수에게 단두대로 싹뚝 자른 것마냥 짧은 대답을 하고 가르쳐준 방향으로 걸어갔다.
어딜 갔나 했더니 처자고 있었다 이거지. 팔자가 늘어졌네 아주. 지팡이가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만 손을 쥐었다 풀기를 반복하며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만티코어가 보이지 않는다. 니플러를 본 그는 자연스럽게 손가락의 반지를 숨긴다. 6년동안 모노클을 수십개나 헌납했고, 더이상 뺏기고 싶은 마음은 없기 때문이다. 저 작고 귀여운 두더지를 닮은 생물 때문에 얼마나 많은 갈레온을 소비했는지! 간식비를 훌쩍 뛰어넘을 것이다. 혜향 교수를 본 그는 이해하는 양 대충 두어번 고개를 끄덕인다.
"잔다니, 팔자 한번 좋군요."
숲 안으로 들어가며 그는 지팡이를 꽉 쥐었다. 새삼 생각해보니 대체 원내에 왜 만티코어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검은 단발머리 가진 조막만한 지팡이 심 제작자 녀석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라며 방방 뛸게 뻔하다. 지금은 자기 집에 돌아가서 은둔생활을 한다지? 어디 있을까. 그는 일단 무작정 걷기로 했다. 그리고 신중하게. 발소리 없이 걷는 건 익숙하다.
보이질 않네. 얼타서 두리번거리던 은이 빼꼼 고개를 내미는 니플러를 보기 위해 희미한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숙일 때, 혜향 교수가 그쪽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프우퍼에게 먹이를 주는 것을 보니, 동물들에게 먹이를 주고 있던 양으로. 만티코어의 위치를 알려준 것에 은은 예의 갖춰 고개를 숙이고 숲을 향해 걸었다. 자고 있을 때 급습할 수 있다면 비겁하긴 하지만 그만큼 좋을 게 없다.
그렇지만, 역시 숲은 무섭다. 모르고 나뭇가지를 밟는 작은 소리에 놀라고, 숲을 서식지 삼은 동물들이 뛰쳐나오는 게 무섭다. 몸을 움츠리지는 않고, 지팡이가 어디든지 금방 겨눠질 수 있도록 긴장이 팽팽하게 드러난 손 안에 모순적으로 느슨하게 잡혀 있다. 조심스럽게 안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