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하다.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그림자가 느껴지진 않더라도 눈에 선히 보이는데. 귓가에 비웃는듯한, 무엇이 기쁜지 그렇게 웃어대는 소리가 선히 들리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이유라면 여러가지가 있게지만 가장 큰 이유는 압도적인 공포때문이었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 무슨 짓을 해도 이기지 못하는 것에 대한 공포.
" 하..지마.. 하지마.. "
도망쳐야하는데. 움직여야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어릴때부터 이런 일이 있으면 항상 어디선가 아빠가 나타나서 도와주었다. 나무에서 떨어졌을때, 눈이 보이지 않았는데 어디선가 나타나서 도와주셨지. 그리고 지금은 날 무조건적으로 믿어주겠다는 사람도 생겼다. 물론, 그 녀석은 나쁜 사람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레오에게는 무조건적인 지지자였다.
" 이,러지,마, 하,지마.. "
도망쳐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도 계속 이런 잡생각들이 머리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은 처음 겪어보는 초자연적인 현상과 그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데서 오는 공포 탓이었다.
벗어날 수 있게 되었을때 레오는 헙, 하고 숨을 들이마셨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 숨을 들이마시는 것을 기점으로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로는 그냥 내달렸을 뿐이다. 자신이 돌아왔던 방향으로 뛰었다. 슬리퍼를 끌고 나온탓에 뛰는 것이 영 쉽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뛰었다. 눈물 때문인지 눈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주먹을 쥐고 눈물을 훔쳤다.
그게 눈물 탓이 아님은 금방 알 수 있었다. 눈물을 닦아내고 닦아내도 눈 앞이 계속 하얗고 뿌얬으니까. 숨이 턱까지 차오를만큼 달리다가 슬리퍼를 신고있던 것이 화근이었는지 발이 걸려 넘어져 버렸다. 보기좋게 넘어진 레오는 눈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당황했지만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일어섰다.
" ...가야해.. "
이 쪽으로 가는 것이 맞는지, 정말 내가 왔던 곳으로 돌아가고 있는것이 맞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넘어진 다리가 아파서 뛸 수가 없었기에 레오는 기어서라도 이 곳에서 나가려했다. 자신이 왔던 곳으로, 이곳이 맞는 방향이길 빌면서 레오는 느리다면 느릴 속도로 기어서라도 도망치고 있었다.
은은 마침내 덮고 있던 이불을 벗어던지고 지팡이를 꾸우욱 쥐었다. 이런 걸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제 손으로 열어주는 것 또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면 싸우든 싸우지 않던 제대로 맞을 준비는 해야 하지 않겠나. 때로는, 무지가 용기를 만들기도 했다. 그 용기가 만용에 불과할지라도.
나는 너를 맞아들이지 않는다. 하의 사람은 손님을 귀이 여기니, 손님이 되지 못한 것을 어찌 받을까? 그러니 들어오거라, 불청객.
덜컥거리는 소리가 강해질 때마다 그 용기도 공성병기에 부딪치는 성벽처럼 흔들리고 있다만, 아직은 버텨 서고 있다. 아직은.
백궁 내부는 조용했다. 조용해도 너무 조용했다. 그녀 밖에 없는 것처럼, 그녀만 남은것처럼.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이곳이 그녀가 4년간 머무른 곳과 같은 곳이라고 느껴지지가 않는다. 그녀 혼자만 뚝 떨어져 같지만 같지 않은 곳에 떨어진 것 같다. 과연 여기에 윤이 있을까? 찾는다고 만날 수 있을까?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의 반복에 불안이 점점 쌓여간다. 언제라도 넘쳐흐를 듯이.
"......"
그리고 뒤에서 들려오는 부름에, 그녀는 또다시 몸이 굳었다. 굳은 채 가만히 있다가.... 천천히...
먹고싶은 것이 분명하다. 미친 것! 먹어서 뭘 하려고? 그는 이대로 문을 열려고 문고리를 잡다가, 뒤로 돌아 백정을 쳐다본다. 만약 내가 여기서 도망쳐버리면 내 아이는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한 손에 지팡이, 다른 손에 문고리. 그는 한참을 침묵하다 문고리에서 손을 놓고 두어걸음 뒤로 물러나고 주문을 외칠 준비를 한다. 저번에 뭐라고 했지. 패트로누스? 그래.
부르는 소리에도 레오는 답하지 않았다. 뛰지 못한다면 걷고 걷지 못한다면 기어서라도 가야지. 간신히 벗어난 곳은 어디였던가. 레오는 비틀비틀 걸어와 적당한 자리를 찾아 털썩하고 앉았다. 차라리 상대가 무엇인지 알았더라면 맞서 싸울 수 있었을텐데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오는 공포는 생각보다 큰 것이었다.
" .... "
학교도 뭔가 이상해. 레오는 어떻게할까, 하고 고민했다. 눈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고 여전히 패닉상태에 빠져 정상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레오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 숲으로 향했다. 기숙사나 다른 기숙사, 학교로 가는 것이 이상적이겠지만 굳이 숲으로 향한 까닭은 항상 그 곳에서 자신을 믿어주는 사람을, 자신의 조력자를 만날 수 있었으니까.
" 버니... 도와줘.. "
도망치는 와중에 슬리퍼는 어딘가로 사라졌다. 이제 레오는 맨발로 풀과 흙을 밟으며 천천히 숲으로 향한다.
밖으로 나서자 보인 것은 비정상적으로 생긴 무언가였다. 그 생긴 것에 근원적인 공포감을 느끼며, 천천히 뒤로 물러난다. 그러다 그것과 눈이 마주쳤을까. 행동을 멈춘 그것을 따라 발을 멈춘다. 뒤돌아 달려야 할까. 아니면? 생각하던 도중 그것이 웃으며 달려들자 빠르게 부적을 꺼내 쥔다. 아니, 저것이 학원을 돌아다니게 할 수는 없다. 불로 태워버릴 것을 생각하며 부적을 내던진다.
뭐야. 저게, 뭐야. 좀 더 커진 실루엣, 저것을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집어삼키려는 것만 같다. 차라리 이 상황을 누군가의 장난으로 믿어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그래서 아무렇지 않게 모두 해결되었으면 좋겠단 같잖은 희망사항이 있었다. 꼭 쥔 손이 장갑을 끼지 않아서 꽤 아파왔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더라면 마땅히 들여야 했겠지만, 창문 밖에서 말하는 상황에서 결코 열어 줄 리가 없었다. 은은 속으로 생각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로. 그 입 틀어막힌 것에, 두려움 또한 없었다곤 못 했다.
레오는 반쯤 정신이 나간것처럼 비틀비틀 걸어다니다 숲에 도착했고 웃음소리를 들었다. 정상적인 판단이라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텐데 레오는 살짝 미소를 띄곤 눈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음에도, 신발을 신고있지 않음에도 비틀거리며 손을 휘적였고 그러면서 웃음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향했다.
" 버니, 너야? "
너구나. 그렇지? 레오는 비틀비틀 그리로 향하다가 문득 머릿속에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저건 그 목소리가 아니야. 그리고 버니는 저렇게 웃지 않아. 저렇게 웃는건, 내가 아는한 하나밖에 없어.
" ... "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때, 레오는 뒤를 돌았다. 그리고 자기가 왔던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 보인 것은 커다랗게 벌린 입과 돌아가선 안 되는 방향으로 돌아간 사지와 그것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겹쳐져 정신을 후벼파는 무언가는 위험한데 위험해 도망 아니 몸은 움직이지 않고 목소리도 나오지 않고 누군도 도와주지 않고 누구 누구 누가 아무나 아무나 아무나라도 거기 여기를 여기에서 저거 저거 저거-
"윽!"
그녀는 아까 깨물었던 혀를 다시 깨물어 정신을 붙들었다. 굳음이 풀린 손을 꽉 쥐며 뒤돌아 도망쳤다. 잘 움직여지지 않는 다리를 강제로 끌어 밖으로, 백궁 밖 어디로든 도망쳤다. 혀의 쓰라림 때문인지 영문 모를 상황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숨찬 흐느낌이 다문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귀신이 깔깔 웃었습니다. 그것이 목을 길게 빼어서, 바로 당신의 코 앞으로 얼굴을 들이밀었읍니다. 거꾸로 내려다보는 얼굴이, 천천히 다시 돌아가서 당신을 똑바로 마주했습니다.
어때, 아성아? 마음에 들어? 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깔
웃음소리가 당신의 귀를 시끄럽게 합니다.
' 거기 누구니? '
뒤에서 건 선생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가위 눌림이 풀렸습니다. 귀신도, 당신이 들고 있던 거울 조각도 당신과 바닥을 흥건하게 적신 핏물도 더 이상 보이지 않습니다. 루모스 주문으로 지팡이 끝을 밝게 비춘 그는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당신을 바라봅니다.
문이 열리자마자 은은 거기에 지팡이를 겨눴다. 스스로 열린 문 너머엔 아무도 없었다. 긴장했을 때가 아니라면 놀라지도 않았을 일이지만, 지금은 상대가 어디에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문 밖에 아무것도 없다면, 설마 뒤─
창문을 뒤흔들며 찍히는 손바닥 자국에 은의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허공을 갈랐다. 손에 힘이 풀릴 뻔했지만, 겨우 붙잡을 수 있었다. 지팡이만은. 한동안은 쭉 눈앞에 붉은 손자국이 어른거릴 것 같았다. 공포를 억누르기 위해서 자신은 무장해 있다는 걸 끊임없이 되새기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
도망은... ...상대가 열어 놓은 문으로 하거나, 멀쩡한 벽을 부수거나. 잡히고 싶지 않다는 생각, 맹목적인 공포, 이성적으로 생각하려 들지만 무엇이 옳은 답인지 알 수 없는 머리. 정신을 차렸을 땐 " 봄바르다─!! "를 창문을 향해 외친 후, 무작정 문으로 뛰어 달아나고 있었다.
아아, '인센디오 조절 수업' 같은 걸 할 시간에 더 쓸만한 걸 가르쳐 주지, 이런 수상쩍은 상황에 무섭게 목소리는 왜 나오냔 말이야. 그런 원망이 방울방울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