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낭만적인 말이라 생각했다. 목적이 뜨거운 아이스아메리카노라는 점에서 낭만과는 수억 광년쯤 멀어지지만. 한 세 번쯤 다시 태어나면 그때는 팔팔 끓는 아메리카노 안에서도 얼음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걸론 부족하다, 공주야."
우유 더 먹고 오라는 식의 말투였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처음엔 뭐가 잘못됐는지 모르고 넘어갈 뻔 했다. 치아 당연히 중요하지만, 그것만 지키기엔 다른 것도 소중하지 않니. 차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 줄 알아? <자만하지 마세요, 공주님.> 덧붙이며 웃었다. 네가 자신해도 내가 못하면 우리는 사이좋게 황천길 건너는 거야. …끔찍한 상상이니 이쯤에서 집어치우기로 한다.
"부모님이 들어주셨을걸."
별생각없이 말하고 나니 불안이 밀려온다. 생명보험 얘긴 아니지? 뭐할 건데 전화까지 해? 저기 올라갈 건 아닐 거라 믿어. 우리한테는 계단이라는 좋은 게 있는데, 거길 뛰어올라가는 게 낫지 않을까? 동공에 지진이 난 채 입만 뻐끔대다 눈을 꽉 감았다. 꽉 잡으라는 말에 목을 더 끌어안고, 숨을 참았다. 정확히는 들이마신 숨이 안 뱉어진 거다. 살려줘.
>>6 괜찮아! 괜찮아! 위에서도 썼지만 꼭 돌리겠다 그런건 아니라서 이미 돌리는 이들은 일상에 집중해도 된다고 썼는걸! 원래 일상은 한가할 때 돌리고 그러는거다. 그리고 나 역시도 음악실이 아니라 다른 곳에서 일상을 돌려보고 싶은걸. 요즘 계속 피아노 연주하는 것만 했으니 말이야.
비랑의 무미건조한 태도에 선하는 별안간 앓는 소리를 냈다. "우리 사이가 고작 그정도밖에 안돼? 실망이다, 비랑아." 오늘 처음 본 사이 맞다. 다만, 미간이 한곳에 모이며 눈꺼풀이 슬픈듯 떨린다. 안 그래도 유약해보이는 인상인데 저렇게 울상을 하고 있으니 진짜 억울해보인다.
이내 손을 들어 이마 미간을 문지른다. 과도한 공복에 편두통이라도 도진 모양이지? 폼이 퍽 궁상맞다. 미묘하게 신경질적여보이기까지 한다. 그것도 잠시 느슨하던 꼴도 신경질적으로 찌푸려진 얼굴도 떡볶이 앞에서는 무지몽매해질 뿐이었다. 선하는 허리를 세워 자세를 잡았다. 내리간 눈이 평소보다 경건해보인다. 젓가락을 손에 집고 테이블위에 올려 높이를 맞춘다. 그 모든 과정이 고작 1초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일전부터 순대를 양념에 듬뿍 적셔 먹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미리 순대 몇개를 떡볶이 밑에 잠겨두었다. 떡볶이 떡이 사라질때 드러나는 영롱한 순대의 자태란. 비랑과 다르게 선하는 떡볶이 떡을 한 입에 먹었는데 차곡차곡 위장에 쌓아놓고 있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계적인 움직임이었다. 몹시 빠른 속도로 눈 앞의 음식이 줄어들어나가는 와중에도 수저와 그릇끼리 부딪히는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이상한 부분에서 식사 예절이 바랐다. 선하가 힐끗 비랑을 훑는다. 정확히는 비랑의 젓가락 끝에 달린 튀김을 바라보고 있었다.
"얘. 너 어디 학교 다니니?"
비랑에게 질문을 하여 잠시 이목을 분산시킨다. 너무 빨리 먹으면 제가 빼앗아 먹을 튀김이 없어질까봐였다. 그렇게 질문을 날리고서도 선하는 입에 음식을 집어 넣는 일을 멈추지 않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