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무슨 모순덩어리의 말인가. 용감하면서 겁쟁이라니. 근데 또 이게 어감이 나쁘지 않은게 괜찮아 보이기도 하고... 모순적인 배열만큼 모순적인 느낌을 주는 말이었다. 그는 자신이 만들어낸 말이 뭔가 괜찮다고 생각했는지 웃음을 머금었다.
" 그럼 사하 왕자님인걸로. "
그는 사하는 어딘가 왕자라는 호칭이 어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어째서인지 설명하라고 하면 어물쩡거리면서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건 그냥 연호의 주관적인 느낌이었다.
" 공주님은 백마가 필요 없으니까? "
그의 머릿속에서 공주란 어떤 의미일까? 어쩌면 딱히 공주나 왕자는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아무나 하기 힘든 발상을 저리 마구 내뱉을 수 있는거겠지. 그게 아니라면, 그냥 생각이 없는거거나.
" 저로 충분하시다면, 기꺼이. "
사하가 내민 손을 살포시 잡고서, 마찬가지로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끌어와 다리를 팔로 받치며 공주님 안기로 안아들려했다. 원래 백마란 모름지기 등에 타야하겠지만, 그녀가 연호의 등에 올라타면 역으로 보기 안좋을것 같았다. 그래서 대신에 그는 왕자님을 공주님 안기로 드는 것으로 타협했다.
"그럼 괜찮아요. 간혹 있잖아요? 좋아하지도 않는데 분위기 때문에 어쩔수 없이 좋아하는 척 하고 맞춰주는 그런 거. 저는 그런 건 싫어요. 그러니까 선배는 아닐 것 같지만, 혹시나 그런 건 신경 안 쓰셔도 괜찮아요. 솔직하게 싫다고 해도 신경 안 쓰니까요. 오히려 그게 편해요."
오히려 괜히 신경써주는데 왜 너는 그러는거냐. 이런 말을 듣는 것이 하늘로서는 더 싫었다. 신경 써달라고 한 적도 없고, 좋아하는 척 해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자기 마음대로 그렇게 행동을 하고 자신에게 댓가를 요구하는 행위보다 차라리 싫은 것은 싫다고 하는 것이 더 편하다고 이야기를 하며 하늘은 고개를 두번 위아래로 끄덕였다.
아무런 말 없이 민규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만 듣기 싫어하는 모습은 아니었다. 오히려 미소를 잃지 않고 고개를 한번씩 천천히 위아래로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다 자신에게 전화번호가 적힌 포스트잇을 받아든 하늘은 번호를 눈으로 훑었다. 뒤이어 스마트폰을 꺼낸 후에 그 번호로 전화를 건 후, 2번 소리가 울릴 쯤에 종료 버튼을 눌렀다. 아마 그의 핸드폰에도 하늘의 번호가 저장되었을 것이다.
"제 번호에요. 마찬가지로 볼일이 있거나 한다면 전화해주세요. 바쁘지 않으면 받을테니까요."
태연하게 이야기를 한 후, 스마트폰을 주머니 속으로 집어넣으며 하늘은 뒤이어 들려오는 말에 다시 두 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러다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선배 고 3이잖아요. 고3이면 아예 안 바쁠 순 없다고 생각하는데 아닐까요? 그러니가 찾아가기 전에 전화할게요. 아. 정말로 바쁜게 없다면 죄송해요. 그래도 역시 아예 신경 안 쓸 순 없다고 생각해서요."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면서 하늘은 괜히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민망함이라도 느꼈는지 고개를 피아노로 홱 돌렸다. 그리고 아무런 의미 없는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울리면서 제 목을 긁적일 뿐이었다.
아메리카노라. 갑자기 생각난거지만 얼마전 마니또가 생각났다. 분명 그는 '아메리카노' 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었지. 다만 커피가 아니라 칵테일이었다는게 다른 점일까.
" 재밌는 말이네. 나중에 한번 만들어주라. "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어떻게? 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떠올랐지만 이미 그는 생각하는걸 그만두었다. 생각없이 내뱉은 말이니 사하가 굳이 귀담아 들을 필요도 없을테다.
" 그런거야? 탈것은 거의 타본적이 없어서... "
하지만 말은 타본적이 있더랬다. 그렇게 오래된 기억도 아니었다. 다만 말은 그를 등에 태우면 어딘가 불안해하는 모습을 보였었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있지만 또한 포식자의 본능을 가지고 있는 소년 덕에 말 본인도 모르게 위축된것일테지만, 연호는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말타는걸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덤으로 다른 동물들도.
" 차 사면 나 태워줘! "
연호를 옆자리에 태우면 암울한 미래밖에 안보인다. 분명 창문으로 머리를 내미는건 일상다반사로 일어나겠지. 차 안쪽으로 끌어들이는데 고생 깨나 할것이다.
" 걱정마. 내가 평판이 좀 좋아서. "
그게 사하의 걱정과 어떤 관계가 있는진 잘 모르겠다. 자기 평판이 좋으니까 자기가 안고가는 사하의 평판도 좋아질거라는 의미인걸까? 아무튼 그는 사하가 불편하지 않도록 가볍게 자세를 고쳐서 안고 느긋하게 발걸음을 옮긴다.
" 선택지가 있어. 이대로 느긋하게 올라가는거랑.... "
첫번째 선택지는 무난했다.
" 고속 코스랑.... "
학교의 벽을 살짝 보았다. 아마 손을 안쓰고 올라가기 편한지 확인하려는 눈빛 같다. 조금 불안하다....
재능으로는 부족한 일이다. 초능력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다. 그런데 다음 생에 초능력 가지고 태어난다는 보장이 있나? 그러니 안 하겠다는 소리와 다름없다. 헛소리니 신경 쓸 필요 없는 말인 것이다.
"보험 들고 오면 태워주지."
무시무시한 표정과 함께 살벌한 말을 했다. 반쯤은 진심이다. 능숙해질 때까지는 저도 자신을 믿을 수 없었는데, 뭘 믿고 덥썩 태워달라 하는지 모르겠다. 얘도 참 겁 없다 싶었다. 물론 부탁했으니까 안전하게 모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기야 하겠지만. 공주님 귀한 몸이신데, 털 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해드려야지.
"너 평판 좋아? 오케이."
뭐가 오케이인지는 자기도 모른다. 상관없다는 듯 말하길래 순순히 받아들인 것이다. 뭐, 끼리끼리의 법칙이라는 것도 있다니까 대충 연호의 좋은 평판에 묻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내가 살아있다면 말이지. 연호의 시선이 향한 곳은 벽, 그 다음은 국기게양대. 설마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설마한테 당할까 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연호의 눈을 가리려 손을 뻗었다. 뭔데. 뭘 보는 건데. 무슨 일이 일어날 예정인데.
"……빠를수록 좋긴 하지?"
시간은 금이라고들 하니까. 일단 솔직한 생각을 뱉는다. 점심시간도 이제 거의 끝나가거든. 근데 현명한 선택이었는지는 모르겠다. 불안한 눈치로 연호를 쳐다봤다. 살려달라는 뜻이다.
최대한 부드럽게 웃으려 노력하며 말을 이었다. 요즘 후배들하고 이야기할 일이 잦아졌다. 자연스럽게 웃는 것도 어떻게든 적응해야 할텐데, 영 어렵다.
"1년이라 해도 내 쪽이 선배다보니까.. 혹시 싫은 것도 넘어갈까봐 해서. 그러지는 말아줘."
상대방이 싫은데 일방적으로 들이대는 것보다 부담스러운 관계는 없다. 나중에 커서는 별 의미 없는 1년 나이 차라 해도, 지금은 엄청나게 크게 느껴지기 마련이니까. 괜히 선배라 해서 쪼는 후배들도 종종 봤다. 최민규는 그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지만, 괜히 미안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아.. 잠시만."
핸드폰을 꺼내, 하늘을 저장했다. 아마 이름은 '2학년 피아노: 강하늘' 정도로 해놓지 않았을까.
"너도 할 말 있음 연락해. 답장 늦어져도 기다리지 말고.. 웬만해서는 바로바로 받으려고 할텐데, 안 될 때도 있으니까."
차마 게임할 때 연락은 못 받는다고 할 수는 없었다.
"나는 대학 갈 생각이 없어서 말이야."
멋쩍게 웃었다. 뭐, 그래도 그렇게 봐줘서 고마워. 덧붙였다. 괜히 또 아이스티나 한 모금 더 마셨다. 부끄러운 일도 아니고, 누군가 강요한 일도 아니지만, '대학 안 갈 거다'라는 말 자체가 가진 무언가가 있었다.
물론 어느 정도 예의는 지키긴 하나, 싫은 것에 대해서는 명백하게 선을 긋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하늘은 쓴 웃음소리를 냈다. 이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자신은 선배의 말이지만 그것을 완벽하게 받아들이진 않지 않았던가. 물론 오늘 있었던 것은 그냥 생각나누기에 불과했지만. 이전에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던 그 말을 떠올리니 하늘의 입가에선 한 번 더 쓴 웃음소리가 절로 나왔다.
아무튼 들어보고 싶다는 그 말에 하늘은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다시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친 후에 자세를 잡았다. 들려오는 것은 아련한 감이 있으나, 마냥 그렇진 않으며 조용하면서도 마음이 놓이는 그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그건 하늘이 민규에게서 느낀 분위기를 나름대로 표현해보고자 한 곡이었다. 물론 자신은 작곡을 하지 못했기에, 인터넷에서 들은 곡을 따라 연주하는 것 뿐이었다.
나름대로 분위기를 살려보려고 하면서, 하늘은 절로 눈을 감았다. 두 손가락이 건반 위를 춤을 추듯 일정한 박자를 맞춰 부드럽게 움직였고, 멜로디는 끊기거나 흔들리는 일 없이 일정한 느낌으로, 그리고 속도로 가닥가닥을 이뤄 계속 나아갔다.
일부러 조금 더 부드러운 느낌을 살리려고 하며 하늘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오늘 만난 그에게 들려주고 싶은 곡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신에게 느끼는 분위기. 당신에게 받는 느낌. 그 모든 것을 담아 두 손으로 마지막까지 흔들림 없이 확실하게 연주한 후, 그는 두 손을 건반에서 떼어냈다.
그리고 보이는 것은 아무런 말도 없으나, 조용히 들려오는 작은 미소였을 것이다.
/좋아. 막레다! 민규주에겐 평소에 고마운 마음도 컸으니 하늘이 입장에서 느끼는 민규의 분위기는 이런 느낌인 것으로! 아무튼 일상 수고했어!!
문하는 무표정한 얼굴로 아랑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문하가 생각한 시퀀스는 아랑이 빼빼로를 쥐어주고 아랑 몫의 간식을 고르는 거였는데, 아랑이 어딜 쪼르르 가버리는 게 뭔가 싶어서 바라보았을 때는 이미 아랑이 그걸 계산해버린 뒤였다.
링 위에서 0.01초를 넘나들며 상대방의 피부 표면에서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을 보고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해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링 위의 냉혹한 카운터펀치 머신이, 18살의 조그만 동급생에게 멋지게 한 방 먹었다. 평소의 무표정과 다를 것이 없었지만, 항상 비스듬히 숙이고 있어 눈가에 드리운 그늘이 지금은 아랑을 주시하느라 조금 들려올라와있어 옅다. 그 작은 차이가, 무표정한 얼굴을 멍한 표정으로 만들었다.
"...이러면 내가 사주는 게 아니라 서로 사주는 거잖아."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말투인데 왠지 퉁명스럽게 들린다. 문하의 눈매가 살짝 찌푸려지는 게 보인다. 그러나 자기 과자도 사줄 거냐고 능청을 피우는 아랑을 보고 문하는 그냥 픽 웃고 말았다. 그가 뭔가 이렇게 표정을 보이는 건 꽤 드문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