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게도... 저항하지 않았다... 허리 붙잡히고 휙 올려진 자세는 불편할 법 했지만, 마른기침만 짧게 뱉었을 뿐 그 자세가 썩 자연스럽기라도 한 양 두 팔을 들어 연호에게 밀착하려 한 것이다. 그러니까... 손가락 사이로 붉은 머리카락을 빗질하듯 느릿느릿 움직이고, 그대로 팔을 목가에 둘러 껴안듯이. 성공했다면 그대로 자버릴 것처럼 머리 기대며 눈을 감는다.
"박력 있고 좋네."
? 대사 선정을 잘못한 것 같다...
"느긋하게 기숙사까지 데려다줘. 도중에 간식도 사주고. 도착하면 피곤할 테니 마실 것도 물려줘. 네가 입힌 여독이 가시면 이불 덮어주면 좋겠어. 그리고 잠들 때까지 도닥거려줘. 나갈 때는 소리 나지 않게."
나만큼이나 경아에게도 어린 시절의 추억은 소중한 것이겠지. 아니, 계속해서 이 지역에 살고 있던 나보다 떠나있던 그녀에게는 더 소중한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때 놀던 친구들은 더 있었지만 결국 서로의 기억에 강하게 남은 두명이니까. 지금 이렇게 추억을 공유하는 것도 좀 더 의미가 있는 일이 아닐까 싶다.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그녀가 환히 웃는다. 저런 웃음을 계속해서 짓게 해주고 싶어. 썩어 문들어진 마음 속에서도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니 새삼 놀랍다.
" 슬퍼할 시간에 더 행복해질 방법이나 생각하자. "
그녀의 말대로 우리는 좀 더 행복해질 필요가 있으니까. 슬퍼하기엔 시간이 모자라다. 그러다 내가 키 이야기를 꺼내자 입을 좀 삐죽이는게 살짝 삐지나 싶었지만 장난스럽게 응수하는 것을 보면 그런 것도 아닌가보다. 약간 아이 같은 모습을 발견하고선 기뻐져서는 작은 소리로 숨죽여 웃다가 자연스럽게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놓는다. 손에 느껴지던 감촉이 사라지자 무언가 허전해 한두번 손을 쥐었다 편다.
" 어릴땐 나보다 컸는데 말이야. 그래도 지금은 내가 지켜준다는 느낌이 있으니까. "
이젠 내가 그녀보다 크니까. 무엇이 되던간에 그녀를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 마치 손을 달라는듯이 그녀쪽으로 살짝 뻗어서 손을 뒤집어둔다. 아무래도 손이 비어있는 느낌이 계속해서 허전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시 한번 케이크를 작게 잘라서 내 입으로 가져가려다가 문득 그녀가 눈 앞에 보여서 그쪽으로 포크를 가져갔따.
" 먹을래? "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경아를 바라본다. 정말 아무런 생각 안하고 행복할 수 있는건 네 앞에서만이 아닐까.
짧게 납득했다. 사실 피아노를 더럽히면 안된다, 하는 이유까지는 미처 생각이 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탕을 먹지 않을 이유는 그것 말고도 많지 않던가. 배가 부를 수도 있고, 단 게 안 당길 수도 있지. 나중에 먹고 싶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피아노 소리가 울려퍼졌다. 눈을 감아야 하나, 잠시 고민했다. TV에서는 음악 감상하는 사람들이 죄다 눈 감던데. 잠깐 눈을 감으려다가 말았다. 영 어색했다. 그냥 나대로 듣지 뭐. 반짝반짝 작은 별, 아름답게-, 입 모양을 빠끔댔다. 그러다가 멈췄다. 멜로디가 바뀐 탓이다.
무언가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아름답다.
열정 또한 아름답다. 이는 퍽 오래 유지된 최민규의 지론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것에 열중하는 사람은 존경스럽다. 그러니까 최민규는, 제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이에게서 레일 위 땀방울, 헐떡임, 빠르게 움직이는 그림자 따위를 보았다. 바삐 움직이는 달음박질, 뜨거운 햇볕 또한 보았다. 이게 원래 이런 곡이구나. 모차르트의 곡이란 것은 어렴풋이 들어 알고 있었지만, 자세한 곡의 흐름은 알지 못했다.
통통 튀는 것 같네, 멍하니 생각했다. 곡이 끝나고 박수를 치지는 않았다. 괜히 민망해서가 변명일 것이다.
얘, 지나친 겸손도 별로란다. 자기 가치 떨어뜨려 좋을 게 뭐가 있어. 얘기하려다 말았다. 뒷일 생각도 않고 고개 숙이는 제가 할 말도 아니고, 무엇보다 잔소리 같잖아. 잔소리 하는 사람은 좋은 사람 탈락일 확률이 높아지니까. 좋은 사람으로 남기 위해 무해한 웃음을 지어보인다. 효과 있었는지는 미지수다.
"포기하는 것도 용기래."
깨물지 않기로 한 연호 보고 말한다. 연호 모를 꼬리표에 단어 하나가 더 추가된다. 이번엔 <용감함>이다. 내내 웃음기 머금은 눈으로 보던 사하가 연호의 인사에 입 벌리고 웃는다. <우리 공주님, 우아하기도 하시지.> 장난기 짙은 말이다.
상상 속의 샹들리에는 허공에도 잘만 매달려있었다. 어디까지나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일이니 그럴 수밖에. 근데 현실의 샹들리에는…… 어디다 어떻게 달겠다는 거지. 사하가 눈가를 찌푸리며 고민했다. 시간이 길지는 않았다. 다 방법이 있으니까 말을 꺼냈겠지. 본인은 생각 없이 말 뱉으면서 속 편하게 넘겨버린다. 그러다 질문이 날아오니 입을 꼭 다물고 있는 것이다. 머리를 부지런히 굴려보긴 했다. 파라솔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 편의점 야외테이블에서 뽑아온다. 둘, 해수욕장 가서 뽑아온다. 둘 다 실현가능성 떨어지는 것들이다. 역시 파라솔은 무리인가. 괜히 무시당한 게 아니구나. 뒤늦은 반성을 했다.
"포기하자."
결국 용감한 사람이 되기로 결정한다. 근성없는 말을 내뱉은 주제에 표정만큼은 명쾌한 해결책을 내놓은 사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