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학생의 말을 듣는 최민규의 미간이 좁아졌다. '아니, 뭐. 알겠는데. 쟤가 제멋대로인지 아닌지는 나는 잘 모르고. 불공평한 특혜를 준 쪽에 따져야지 왜 쟤한테 화풀이야.' 혀뿌리에서 뭉글대며 올라온 말을 아이스티로 삼켜 넘겼다. 동생한테 쟤 어떤 놈인지 나중에 물어봐야겠어, 흘러가듯 생각했다.
등 두어 번 토닥여주는 걸로 무마하려 했다. 그러려는데, 허락받고 있어요. 애초에 아무도 안 쓰는 조건 하에 사용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하늘의 말이 들려왔다.
"거 봐, 쟤도 허락받고 쓰고 있대잖아."
너는 여기서 열 내지 말고 교무실이나 가, 덧붙였다. 말하는 모양을 보니 교무실에 가도 별 성과는 없을 성 싶긴 했다. 최민규는 하늘이 사람들에게 일일히 사과하는 것과, 남학생이 홱 돌아서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천천히 흩어지는 모양을 보았다.
"응?"
최민규는 하늘의 질문에 잠시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 눈을 두 번 깜박였다.
"아니, 뭐.. 애초에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니고 말이야."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너한테 화낼 일도 아니잖아? 너는 허락받았으니까 쓰는 거고, 거기서 엄한 짓 하는 것도 아니고."
한숨을 푹 쉬었다. 어디든 이상한 곳에 화풀이하는 애들은 있었다. 뭐.. 최민규가 할 말은 아니지만. 머쓱한 기분으로 주머니를 뒤져, 사탕 하나를 꺼냈다. 레몬맛 사탕이다.
경아의 분위기가 조금 바뀌는 것을 눈치채고 괜한 말을 꺼냈나, 하는 후회가 밀려온다. 어렸을때 헤어지고서 다시 만났을때의 그녀는 어릴때와 다르게 좀 더 흐릿해져 있었고, 너무나도 많이 성숙해져있었다. 물론 너무나도 포근한 분위기의 그녀였지만 깊숙히 들어갔을때 안개에 가려진 벽이 그제서야 보일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물론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이 분위기의 변화는 착각은 아니었다.
" 그야 책만 읽고 있으면 심심하잖아. 가끔은 바람도 쐬고 해야한다고 생각했거든. "
어릴때의 경아는 책을 많이 읽고 어딘가로 잘 다니지 않았기에 내가 먼저 놀러가자고 제안한 뒤에 그녀를 데리고 다니곤 했다. 반대로 그녀와 함께 책을 같이 읽을 때도 있었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그때를 생각하는 그녀의 모습이 문득 처량하다. 분명 즐거운 이야기일텐데. 그리고 그녀와 마찬가지로 나도 이제는 추억에만 남겨져있는 그때 그 시간이 무척이나 그립다.
" 마지막 날에 가게 아저씨한테 갔더니 공짜로 아이스크림 하나 주시더라. 지금까지 와줘서 고맙다고. 너가 없을때도 자주 찾아갔었거든. "
골목길의 가게는 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없어지고 다른 가게로 바뀌어버렸다. 내가 그렇게 힘들어하던 그때 그곳에서 달달한 무언가를 사먹는 것이 조그마한 낙이었는데 없어진다고 하니 얼마나 아쉬웠는지. 마치 너와의 추억이 송두리채로 없어지는 기분이라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너를 추억할 수 있는 곳이 점점 없어질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너는 지금 내 눈앞에 있으니까 그것만으로도 좋은게 아닐까.
" 네 옆에 내가 있으니까 슬퍼하지마. 이젠 서로를 지켜줄 수 있게 되었잖아. "
손을 뻗어서 그녀의 머리를 살짝 쓰다듬어주며 얘기한다. 서로가 떨어져있을때 서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을 것이다. 만약 그때도 서로가 곁에 있었다면 조금은 바뀌지 않았을까. 완벽하게 막을 수 없을지는 몰라도 조금의 의지라도 할 수 있지 않았을까.
" 그리고 옛날이랑 키는 많이 안변했는데 말이야. "
큭큭대며 얘기하고선 케이크를 다시 한 입 먹는다. 어쩐지 씁쓸한 맛이 좀 더 느껴지는 것 같았지만 씁쓸함을 감싸주는 달콤함이 곧 올 것을 알기에 그것마저 즐겁다.
"하지만 보통은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의 편을 드는 이가 많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렇게 말해줘서 감사해요."
분명하게 감사를 다시 하면서 하늘은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가 다시 위로 올렸다. 명찰색도 그렇고, 선배임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뭔가 요즘은 선배들과 되게 많이 얽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하늘은 자신도 모르게 작게 웃음소리를 풋 내다가 순간 멈칫했다. 그러다가 크게 당황한 표정으로 두 손을 크게 휘저으면서 이야기했다.
"아니! 방금 그건 비웃거나 그런게 아니라요!! 그냥 요즘 이유는 모르겠는데 선배들과 뭔가 얽히는 일이 많아서!! 그러니까 선배를 비웃거나 한건 아니에요! 절대로!"
꽤 당황했는지 목소리 톤이 상당히 떨리고 있었다. 몸을 옆으로 돌려 입술을 꾹 닫은 후에 창피함에 붉게 물든 얼굴을 괜히 두 손으로 강하게 탁탁 두 번 친 후에야 하늘은 겨우 페이스를 되찾으며 다시 민규를 바라봤다. 그 와중에 자신에게 내민 사탕을 바라보며 하늘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두 눈을 깜빡이며 사탕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미소를 지으며 사탕을 받았다.
"딱히 당이 떨어진 건 아니지만 준다면 고맙게 받을게요. 2학년 1반, 강하늘이라고 해요. 피아노..연주를 하고 있어요. 오늘도 음악실을 아무도 안 쓴다고 해서. 조금 트러블이 생겼지만 그래도 잘 해결되었으니. 조금 쉬었다가 치러 가봐야겠어요."
그러는 선배는 어떻게 되나요? 물론 명찰을 보면 이름이야 알 수 있었으나, 그래도 이런 것은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게 좋다고 생각하며 하늘은 민규의 답을 기다렸다.
불꽃놀이... 음, 와글와글 친구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다같이 불꽃놀이를 보려고 하는데 둘만 은밀하게 손을 잡고서 보는거야 😎 그리고 불꽃놀이가 하이라이트로 향하면서 모두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을 때, 슬쩍 입을 맞춰주고 짐짓 아무것도 모르는 척 불꽃놀이가 끝나는 걸 바라보는거지. 그리곤 다들 해산할 때 슬쩍 둘이 빠져서 알콩달콩 이야기를 나누며 동네 한바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