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말에 경아는 흐드러지게 웃는다. 그 말 하나가 정말로 기쁘다는 것처럼. 더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사람처럼. 그렇다면 다행이야.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경아는- 경아에게 당신이란 사람은, 정말로 소중한 사람 중 하나다. 그런지라 경아는 어떻게든 당신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제가 가진 재주라곤 기껏해야 이런 것이었으니, 잠시의 안식처라도 되기를 소망했다.
"아무렴 어때. 지금도 충분히 맛있는 걸."
어깨를 으쓱인다. 빈말은 아니다. 적당히 씁쓸하기까지 한 케이크는 경아의 마음에 쏙 들었다. 오늘 하루의 피로를 전부 내려놓고 지금의 시간을 온전히 만끽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 당신에게 잠시의 안식처가 되어주고픈 경아는, 당신과 함께하는 시간 속에 그 자신도 휴식을 취하고 있다. 참으로 성실하지 못한 태도이나 이 곳에서 그 점을 지적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 경아는 분명하게 안정을 취하고 있었다. 어쩌면, 글쎄. 적어도 또다른 말이 들려오기 전까지는. 경아는 옅게 미소지었다. 씁쓸하고, 조금은 쓸쓸한 기색이 맴돈다. 당신은 어떤지 모르겠으나...경아는 그 시절이 그리웠다. 그 시절만큼 행복한 때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 확신할 정도로.
"그랬지. 그때는 그냥, 흘러가는 구름 하나 보고도 깔깔 웃었는데. 내가 책만 읽고 있으면 네가 와서 놀러가자고 할 때도 있었고."
작은 웃음소리가 뒤따른다. 마치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처럼 따스하고, 동시에 처량하다. 모순적이다. 그토록 찬란했던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이제와 괴롭다는 사실이.
"오랜만에 와보니까 바뀐 곳도 많더라. 너랑 자주 갔던 골목길의 구멍가게 있잖아, 기억나? 자주 아이스크림 사먹던...거기 이제 다른 가게가 들어선 거 있지. 그래도 우리 자주 가던 놀이터는 여전하더라."
당신과 함께하던, 더이상은 돌아갈 수 없는 날들의 이야기를 하는 경아는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고, 그럼에도 슬퍼 보인다. 입가에는 언제나와 같은 미소가 걸려있다. 으레 짓곤 했던 부드럽고도 여린 종류다.
"야. 진짜 누구는 좋겠네. 재능이 아주 좋아서 중학생 때 동아리 들어와서 그렇게 멋대로 할 거도 하고, 고등학생 되어서는 음악부도 아닌데 음악실에 들어와서 피아노도 마음대로 치고 말이야."
"지겹지도 않냐. 그냥 서로 신경 끄면서 지내면 안돼?"
음악실 부근에서 하늘은 자신을 바라보며 비꼬듯 이야기하는 동급생 남학생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대는 일부러 비꼬듯 네에- 네에- 톤을 이어가면서 팔짱을 꼈다. 적어도 하늘에게 있어서 그다지 좋은 감정이 있는 이는 아닌듯 보였다.
"근데 내가 틀린 말 한 건 아니잖아. 너 이거 엄청 특혜인건 알아? 꼬우면 음악부 들어와서 쓰던지. 아. 또 개인연습이니 뭐니 그런거 때문에 활동 제대로 안하고 쫓겨나겠네. 그럼 특혜라도 잘 쓰려고 해야지. 안 그래?"
"적어도 연습도 하지 않고 몇몇 친한 애들하고 놀기만 바빠서 기량도 안 키우는 너에게 그런 소리 들을 이윤 없는데?"
하늘이라고 마음이 그렇게 넓은 편은 아니었다. 꽤나 적대적인 목소리를 내는 것에 상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나오는 것은 비꼬는 톤을 없앤 적대적인 목소리였다.
"네가 그렇게 잘났냐? 그렇게 잘났냐고. 좀 몇몇 사람들이 띄워주니까 남들 평 막 할 수 있고 그럴 것 같아?"
"못할 건 뭐야. 그런 평 듣기 싫으면 너도 연습을 하면 되잖아. 아니면 어차피 해봐야 안 될거라고 생각해서 음악부인데 음악은 하지 않고 놀기 바쁜거야?"
살기가 도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다지 사이가 좋지 못한 사람의 다툼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 딱 좋았다. 어느 한 쪽은 과거 행적이나 지금의 '특혜'일지도 모를 무언가를 비꼬고 있었고 다른 한 쪽은 실력이나 음악에 보이는 열의를 단적으로 끄집어내며 비난하듯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연히 이런 것은 말리는 사람보다 구경하는 사람이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사진으로 찍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고 동영상으로 찍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나마 다행인건 둘 다 주먹을 들거나 하진 않고 그저 말로만 다투고 있을 뿐이었다. 애초에 보는 눈이 많은 이상, 주먹을 드는 일은 없을지도 모른다.
최민규가 그 자리를 지나가게 된 것은 순전한 우연이었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아마 담장을 넘어 사서 돌아왔겠지- 아이스티를 마시며 자리를 지나가고 있었을 뿐이다.
'야. 진짜 누구는 좋겠네. 재능이 아주 좋아서 중학생 때 동아리 들어와서 그렇게 멋대로 할 거도 하고, 고등학생 되어서는 음악부도 아닌데 음악실에 들어와서 피아노도 마음대로 치고 말이야.'
음악실 방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뭘 잘못 들었나, 최민규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린 채 그 쪽 방향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잘못 들은 것이 아니라면, 저 목소리의 주인은 자신과 면식이 있었다. 동생 다니는 학원에 다니는 애였지, 분명. 가끔 오가면서 인사 정도는 하는 사이였다. 하지만 저런 말을 하는 줄은 몰랐는데.
'적어도 연습도 하지 않고 몇몇 친한 애들하고 놀기만 바빠서 기량도 안 키우는 너에게 그런 소리 들을 이윤 없는데?'
이건 모르는 목소리다. 최민규는 몰려든 인파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만 더 욱하는 성질이었다면, 무슨 구경이라도 났냐고 비꼬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다행히도 최민규는 그런 성격은 못 되었다. 대신, 인파를 비집고 들어가, (아마 카메라를 든 사람들에게 눈치를 줬을지도 모른다) 자신이 얼굴을 아는 쪽 사람의 어깨를 툭 건드렸을 뿐이다.
"뭔데?"
아이스티의 얼음이 달각거렸다.
"내 대충 들어서 뭔지는 잘 모르겠는데, 불만이 있으면 음악 선생님한테 따지는 게 낫지 않나."
쟤도 허락받고 하고 있을 거 아냐? 어깨를 으쓱였다. 하늘이를 한번 바라봤다. 괜히 미안한 마음을 담았을지도 모른다.
민규가 어깨를 툭 치는 것에 놀랐는지 하늘과 대치하던 남학생은 깜짝 놀라 고개를 홱 돌려 민규를 바라봤다. 뭐냐는 물음과 불만이 있으면 음악 선생님에게 따지는 게 낫지 않냐는 그 말에 그는 괜히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투정부리듯 이이야기했다.
"아. 형! 형이 쟤를 몰라서 그런다니까요! 쟤가 얼마나 지 멋대로인 애인데! 피아노 좀 잘 친다고 말도 안되는 특혜나 받기나 하고! 그래서 음악실을 사용하기도 하는 음악부의 멤버로서..."
"허락받고 있어요. 애초에 아무도 안 쓰는 조건 하에 사용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말을 끊어버리면서 하늘은 자신에게 들어온 말에 조용히 대답했다. 그것은 분명히 그리 옳은 자세는 아니었으나, 그다지 상대에게 그 정도의 배려나 예의를 지킬 생각은 없는 듯 했다. 그 또한 그의 단점이라면 단점이었다. 허나 그런 것은 상관없다는 듯이 하늘은 태연하게 자신을 노려보는 남학생의 시선을 무시하면서 그 대신 민규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해요. 조금... 음악실을 쓰려고 하는데 이런저런 시비가 걸려서. 소동을 피워서 죄송했습니다. 다른 이들도 모두 죄송해요."
고개를 하나하나 숙여 주변 사람들에게 사과를 하는 모습에 남학생은 기가 막히다는 듯이 가슴을 치면서 그냥 홱 돌아섰다. 어후. 내가 상대를 만다. 상대를 말아. 그런 말을 남기는 것으로 보아 정말로 제대로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물론 하늘은 그에겐 그다지 시선을 주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싫어하는 이와는 이야기를 그다지 나누지 않는 그의 버릇이었다. 그 대신, 민규를 바라보다 조용히 입을 열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