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늘게 떨리던 어깨가, 다행스럽게 가라앉았다. 내 어깨의 주인은 나인데, 내가 생각해도 웃길 정도로. 양을 상대하기만 하면 이렇게 긴장하는.. 나쁜 버릇은, 싫지만, 버릴 수가 없다. 나는 가까스로 웃으면서 별하의 곁에 다가붙었다.
별하의 머리카락에서, 나뭇잎을 뚫고 너울거리는 햇빛처럼 샴푸 향이 흘러나와 코끝을 적신다. 샴푸 향은 샴푸 향이 풍기는 나름대로 떨리지만.... 이 정도라면 괜찮을 것이다. "갈까? 별님." 어수선함이 모두 빠져나간 대회장의 정적은 두 사람만 걷는 길을 위해 자리를 비킨 채였다.
그러고 나서 별하가 쥐여 주는 자기 손을, 나는 진주처럼 감싸쥐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회장의 대문을 나와서 처마 밑을 벗어나자 빗방울이 비닐 우산을 가볍게 두들겼다. 작은 어깨가 젖지 않게, 우산을 별하가 서 있는 쪽으로 살며시 기울여 주면서,
"근데 나 찻집은 전혀 몰라!"
헤헤, 하고 대책없이 웃음소리를 냈다. "별하가 가자는 데로 가 보자! UFO!" 꼭 감싸쥔 별하의 손을 마치 우주선의 조종간을 당기듯 장난스럽게, 그러나 부드럽게 당기며 이끌고 가려 한다. 언제나 해 왔던 평범한 장난들의 일환이었다.
오늘 처음 만났기 때문에 여자는 홍현이 원래 과묵한 성정인지, 곤란한 상황에서 사람을 맞닥뜨려 말을 아끼는 것인지, 둘 다인지 가늠할 수 없었다. 그래서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선 표정이나 제스쳐에 의존하는 수밖엔 없었기에 눈꺼풀이 살에 빠르게 숨겨졌다 드러났다 하는 모양새를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잘 관찰할 수 있었다.
홍현이 가지고 있는 약이 진짜 억제제고 그 약을 실험에 사용한다고 해서 본인에게 해가 되는 건 일절 없었지만 여자의 솔직한 감상을 빌리자면 상대의 반응은 보는 재미가 있었다. 순간의 재미와 여흥, 공부하는 사람만이 남아 삭막한 기운이 감도는 기숙사에서 홍현은 유일한 재미처럼 다가왔고 당혹스러움이 떠올랐음에도 상대의 대답을 느긋이 기다리는 이유가 된다. 반쯤 걸고 있던 답변이 나오자 고개를 끄덕였다.
"양이구나. 이렇게 물어봐서 당황했니? 그럴 의도는 없었는데 미안해."
있었다. 그럴 의도. 말하면서도 양심의 가책을 느꼈기 때문에 상대의 소위 재미있는 반응을 보기 위한 일련의 행동을 그만두기로 했다. 나도 양이면서 이러면 안되지. 시험기간이 되니 엉뚱한 곳에 흥미가 붙는 것 같아 혼자 슬쩍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이번엔 순수한 걱정에서 우러나오는 질문을 했다. 가는 길목이었으니 이 질문만 하고 보내줘야지 생각하며.
"복용할 억제제는 충분한 거야? 더군다나 이렇게 섞어 두면 제때 먹는 게 힘들 것 같은데."
아쉬워하는 톤이 그의 귓가에 들렸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이 그녀의 휴식에 있어 그렇게 방해되는 일은 아니라는 것에 하늘은 안도할 수 있었다. 피아노 소리는 적어도 자신의 귀에는 아름다우나,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저 의미없는 음의 연속이었다. 그녀는 어느 쪽이었을까? 전자일까? 아니면 후자일까. 적어도 전자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하늘은 가볍게 두 손을 털어냈다. 지금은 점심시간. 너무 오래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방과후라면 또 모를까.
고개를 돌리니 그녀는 자신의 책상을 치고 있었다. 여기서 기다린다는 그 말에 하늘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마찬가지로 막 닫은 피아노 건반 뚜껑을 살며시 손으로 톡톡 쳤다.
"그렇다면 저는 여기서 피아노를 치면서 기다릴게요.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으면 좋겠네요."
자신의 연주를 들어준 사람. 그리고 끝나는 것에 아쉬움을 보이는 사람.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면 좋겠으나, 그렇다고 더 미련을 가지는 일은 없었다. 다음에 만날 수 있다면 또 만날 수 있겠지. 딱 그 정도로 생각을 하며 하늘은 꾸벅 허리를 굽힌 후, 그녀에게 인사했다.
"오후 수업 수고하세요. 선하 선배."
또 언제 음악실에서 피아노를 칠지는 알 수 없었다. 사실 피아노가 아니더라도 얼굴을 혹시 보게 되면 인사 정도는 하는 것도 좋겠거니 생각을 하며 하늘은 음악실 밖으로 나섰다. 잠시 매점에 가서 음료수 하나를 사서 마신 후에 교실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아침에 잠깐 시간을 내서 내 쪽에서 이렇게 막레를 내릴게! 일상 수고했어! 그리고 나는 이렇게 답레를 올리고 바로 밥먹고 출근하러 간다! 오늘은 개운해서 좋네! 다들 하루 힘내자!
" 빠뜨리고 싶지 않다면 그렇게 하면 되는거야. 빠뜨리고 싶지 않은 것들을 모두 품으면 되는거야. 내가 그렇게 할 수 있게 해줄테니까. "
슬혜의 말에, 빠뜨리고 싶지 않다면 자신이 그럴 수 있게 도와주겠다는 듯 부드러운 미소를 지은 체 속삭였다. 분명 슬혜가 그렇게 하고 싶다고 말한다면 자신은 그런 슬혜가 자신의 모든 모습들을 품을 수 있게 몇번이고 자신을 보여줄테니까. 그것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 될지 모른다고 하더라도, 그것에는 망설일 생각이 없었다. 슬혜를 위해서라면 조금 부끄러워지는 것이 대수일까.
수줍게 얼굴을 가려보기도 하고, 진지하게 속삭이기도 하다가 결국엔, 과거 두사람의 하굣길에서 용기를 내어 고백했던 말을 다시 한번 꺼내보았다. 시아는 생각했다. 과거로 돌아간다면 자신은 그곳에서 고백을 할 것인가? 하지만 고민은 길지 않았다. 아니, 고민이 떠오르자 마자 답을 나온 상태였다. 분명 그때와 마찬가지로 안간힘을 쓰면서 슬혜에게 고백했을 것이다. 이건 변치 않는 결과였다.
" 슬혜가 어때서.. 슬혜는 엄청난 가치를 가진 사람인걸.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부족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그러니까 감히 라는 말은 쓰지 않아도 괜찮아. "
자신을 일으켜 안아주는 슬혜의 품에 안긴 시아는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듯 가볍게 팔을 둘러 슬혜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따스한 슬혜의 품, 그곳에서 시아는 행복한 듯 미소를 짓고 있었다. 분명 이것이 행복이라는 것은 틀린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신을 끌어안은 슬혜의 힘이 강해지는 것을 느꼈고, 압박이 느껴졌지만 그 압박 역시도 너무나도 기뻐서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슬혜의 이성이 점점 끌어내려지고, 그 안에 숨겨진 본능이 얼굴을 내비치려 하는 것을 느낀 것인지, 아니면 그것까진 알지 못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아는 슬혜의 뒷머리를 살살 쓸어내리며 억지로 슬혜가 참을 필요가 없다는 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다독였다. 참을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자신의 곁에 있어준다고 했는데, 이젠 떠나지 않겠다고 했는데.
" 하고 싶은게 있다면.. 망설이지 말고 해줘, 나는 슬혜의 모든 모습을 사랑해. 지금처럼 이성적으로 사랑한다 말해주는 모습도,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며 슬퍼하는 그 모습도, 그리고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본능에 어떻게 해야할 줄 모르는 지금의 모습도 모두 좋아하니까. 자, 내게 와줘 - 슬혜야. 와준다면 분명 기쁠거야, 난. "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때때로 이성이 아닌 본능에 충실해도 된다는 듯 슬혜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 어떤 모습이든 자신은 슬혜를 품어줄테니까. 그렇게 속삭이던 시아는 혹시 슬혜에게 출발을 알리는 신호탄일도 필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고, 조금 고민을 하다가 살며시 슬혜의 볼에 입을 맞춰주곤, 귓가로 입을 가져가 속삭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