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하는 화내는 모습을 보기가 어려워. 원판이 분노, 슬픔이 극단으로 치달은 나머지 감정을 다 소진해버리고 탈진해서 지쳐버린 잿더미만 남은 애니까. 그렇지만 특별한 계기라거나 하는 것으로 문하를 화내게 만들면... 뭐랄까 1페이즈는 냉기속성, 2페이즈는 화염속성, 3페이즈는 어둠속성이 되는 느낌. 말해놓고 보니 게임 보스같이 됐네.
약하긴 했지만 순간적으로 풉, 하고 웃음이 튀어나왔다. 너무 사랑한나머지 그런 부분까지 신경쓴다니, 대체 세상이 말하는 사랑이란건 뭐고 당신이 말하는 사랑이란건 또 무엇인가, 아니면 이 또한 이렇다할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오로지 당신만의 사랑이란 걸까? 그렇다면 그녀 역시 그것을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역시 당신이 무리하는 모습은 놓칠리 없는 걸까, 고양이는 모든 것을 예의주시하는 동물이니 당신에 대한 것도 언제나 유심히 지켜볼 것이다. 혹여 무리하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에.
"후후후후... 귀엽네요... 안아달라고 어리광부리는 모습도, 별것 아닌 손짓에도 이렇게나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어느것 하나 빠뜨리고 싶지 않아요..."
정말이지, 숨막힐 정도로 끌어안아버리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전에도 당신은 이러했을까? 거기까진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한가지 중요한 것은 어떤 당신이든 그녀는 모두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직접 입밖으로 꺼내는데에 익숙하진 않은 말이었다는듯 결국 두손으로 제 얼굴을 가려버리는 당신을 보며 그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또 다시 물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까? 이쯤 되면 자신이 정말 양이 맞는지, 양이라고 착각하고 살아가는 늑대가 아닌지 궁금해졌다.
당신의 그런 귀여운 모습, 진지한 모습, 조용히 무언가를 읊조리듯 속삭이는 모습 모두가 사랑스러웠다. 작은 입맞춤에 부끄러워하면서도 애틋한 시선과 함께 다시금 자신의 뺨에 손을 대어 이끌고선 망설임도, 쉴 틈도 없이 입술을 포개는 모습까지도...
"......"
순간적으로 심장에 싸하게 울리는 그 알싸한 고백까지도... 그 모든게 오로지 자신만이 느낄수 있는 것이라면... 이게 처음부터 짜여진 각본이었다 해도 나쁘지 않게 생각하는 그녀였다.
"고마워요. 그렇게 이야기해주셔서, 이런 저라도, 감히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허락해주셔서..."
그때 제대로 전하지 못했던 답과 함께 미소짓던 그녀는 그대로 두 팔을 당신의 목에, 허리에 감아 조심스레 일으키고선 힘을 주어 끌어안았다.
당신이 적당히 견뎌낼만큼만, 숨이 완전히 막히지 않을 정도로만,
"아아... 이걸 어쩌죠...? 견딜 수 없을만큼 사랑스러워서, 또 다시 물어버릴 것 같아요..."
양으로서의 본능,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닌 마음속 깊은 곳에 있던 무언가가 끊임없이 당신을 원하고 있었다. 몰래 숨어 둘만의 비밀을 만들어갔을 때, 처음으로 맛보았던 그 오묘한 체취가 떠올라 버릇처럼 손에 힘이 들어갔을까? 분명 그건 흔히 말하는 양의 페로몬은 명백히 아니었지만, 그 알수 없는 살내가 그녀를 이성에서 자꾸 끌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흠집 하나 나지 않고 굳어가고 있었는데. 굳어지고 나서 떨어져나가면 그 흉측하게 찢어져나간 모양 그대로 살이 덮이어 영영 그 모양 그대로 살게 될 흉터만이 남게 되었을 텐데. 새슬이 예기치 못한 무언가가 그것에 아주 작은 실금을 하나 냈다.
그러나 어떤 흠집도 없는 것과, 조그만 실금이 있는 것에는 중차대한 차이가 있다. 실금은 갈수록 벌어지기 마련이니까. 그러나 방금 처음 낸 조그만 실금에서 하나 툭 떨어진 그것은 정말이지 지독히도 쓰라리게 절망적이었고, 지독히도 가엾게 희망적이었다. 모든 희망을 포기하고 고요히 죽어가던 이의 눈앞에 떨어진 작은 별빛이 늑골 속에 고인 피웅덩이에 비치고 있었다. 선고를 기다리듯이 새슬에게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의 텅 비어있어야 할 눈망울 위에 별빛이 하나 맺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너무 과한 욕심을 부렸음을 통지받았다. 평생을 굶주려오다, 남들보다 한없이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 유배되어 그 어느 것도 새로 붙들지 못하고 어떤 의미도 찾지 못하고 그저 주어지는 삶을 조용히 죽어가고 있다가 그에게 반짝인 생각지도 못한 빛, 그런 것이 있었다는 줄도 잊고 있었던 마음을 깨워준 그 빛에 너무 목이 말라서. 마치 서투르기 그지없는 어린아이같은 욕심을 부렸다. 문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그것은 문하를 영영 등지지 않았다. 그것은 문하의 가슴 속의 열기를 어느 봄날의 신기루로 사라지게 내버려두지 않고, 다시금 문하의 품 속에 한 번 더 흔적을 남긴다. 마치 다시 한 번 자신을 찾아달라고 약속을 남기는 것처럼. 감은 눈은 뜨지 않았다. 문하는 새슬이 다시 안겨주는 온기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그리곤 서서히, 깊게 심호흡했다. 이것을 잊지 않겠다는 듯이. 깊이 각인해서 새겨두겠다는 듯이.
"...금방 갈게."
어느덧 산들바람이나 깃털이라도 된 것처럼, 가뿐히 바람에 날리듯 자신의 품을 빠져나간 새슬을 바라보며, 문하는 차가운 어둠 속에서 헤어지는 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 대신으로, 그는 쓸쓸한 웃음을 웃고 있는 새슬에게 다짐을 남겼다.
"기다려."
이것을 마지막으로 삼기에는, 어딘가 비어 있는 그 미소의 빈 자리의 모양이 문하에게 너무도 익숙한 모양이었다.
고고한 늑대 같은 비유적 표현으로 인식한 그는 이번에는 부드럽게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강X욱처럼 말 잘 들은 강아지에게 보상을 주듯 주머니에서 단 것들-하나같이 값이 나가는 것이었다.-을 한 움큼 꺼내 쥐여주려 한다. 강아지... 한 마리 더 키울까... 이번엔 붉은색으로......
"그렇지? 체육계가 되고 싶다면 종목은 빨리 정하는 게 좋을 거야."
연호의 폰을 건네받은 그가 톡톡톡 두들기면서 무언갈 조작한 뒤 부드럽게 웃으며 다시 건넨다. 화면에는 '신이현'이라고 저장된 전화번호가 띄워져 있었다.
"내 전화번호야. 만약 여러 종목 중에 무언가를 정하고 싶다고 결심하면 연락해줘. 우리 산하 재단에서 몇몇 테스트를 진행하고 여러 종목들을 체험할 수 있게 해줄테니까. 물론 그 외의 일로도 연락 넣어주면 언제든지 환영이야. 상담이어도 좋고!"
"땡~♪ 정답은...음...비밀이야!"
농담이고, 대대로 가업을 이을 거야. 으음, 이름을 알지 모르겠지만 좀-좀이 절대 아니다.- 큰 기업을 부모님께서 운영하고 계시거든. 그는 눈을 달처럼 휘고 어딘가 즐거운 듯 얘기했다. 사실 이게 끝은 아니지만, 그건 말하면 안 되니까. 우후후 웃으면서 연호의 발걸음을 맞춰 걷던 그는 손목에 차인 시계-한눈에 봐도 비싼 명품이었다.-를 확인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다.
"미안, 너와 이야기하다보니 즐거워서 잠시 시간을 잊고 있었네. 정말 미안하지만 내가 지금 가야할 데가 있어서, 이만 가봐도 될까?"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사과하는 그는 가도 된다는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허락이 떨어지면 빠르게 걸어가면서도 몇 번이나 뒤돌아보며 미안한 표정으로 웃을 것이다. 상냥히 손을 흔드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