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의 시선이 하늘의 손가락을 뒤따라간다. 제 손가락으로는 따라하지 못할, 그 유려한 움직임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태도였다. 슬그머니 손가락을 움직여 바로 아래 음을 두어번친다. 그러고는 다시 하늘을 바라본다. 원하는게 무엇인지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나서 무시하기도 힘들 것이다.
"그럼 걱정한 걸로 칠게. 나 걱정받는 거 좋아하거든."
지 좋을대로 해석하는 것에는 아주 도가 텄다. 선하는 앞에 맥락과 뉘앙스를 뚝 자르고 걱정한게 맞다는 결론을 냈다. 놀라울 정도로 단순한 사고 과정이었다. "그럼 난 네 걱정도 받고, 재미있는 구경도 하게 되니까 일석이조네?" 농담이랍시고 한 말에 저 혼자 하하 웃는다. 확실히 엉뚱한 구석이 있어보인다.
"그러면 원래 치려던 곡은 뭐였는데? 그것도 열심히 들어줄게."
선하는 피아노 위판에 팔 한짝을 걸치며 말했다. 벌레 하나 못 잡게 생긴 얼굴을 하고서는 비스틈히 기대어 서 있는 모습이 깨나 불량하다. 절 돌아보는 하늘의 움직임을 선하는 놓치지 않는다. 잠시 손톱에 머물던 시야가 올라가 하늘을 똑바로본다. 눈이 잠시 마주친 것을 발단으로 웃음을 작게 터뜨렸다.
"나는 특기생이라 크게 바뀐 건 없어. 대입 준비도 남들만큼 팍팍하지 않고."
최저 요건을 맞춘다느니, 대회에 좀 더 힘쓴다느니 작년에 비해 부쩍 바빠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선하 입장에서는 피곤해졌다기보다는 귀찮아졌다는게 더 옳은 표현이었다. 선하를 피로하게 만드는 건 잦은 능력 사용에 있었으나, 선하는 그걸 쏙 빼놓고 말을 이어나갔다. 구렁이 담 넘듯 넘겨버린 터라 퍽 자연스럽게 들렸을 것이다.
"아직 봄이잖아. 체력도 좋은 편이라 아직은 버틸만 하더라. 너무 걱정하지마. 다들 잘 버텨낼거야. 너도 그럴거고."
제 기억으로는 저뿐아니라 주변 학생들도 다들 심적 여유가 있는 상태였다. 6월 모의고사도 치루기 전이고, 따뜻한 봄볕에는 사람을 느슨하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아래 음을 두 번 치는 것에 하늘은 작게 소리없이 웃었다. 뒤이어 그 음에 이어지듯 피아노 곡 한 마디를 즉흥적으로 연주하며 그 마무리를 지었다. 고요한 바람을 연주하듯, 고요한 분위기가 살며시 피아노 위를 스쳐 지나갔다. 그 멜로디가 스스로도 마음에 드는지 머릿속으로 방금 어떻게 연주했는지 음을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하늘은 두어번 머리를 끄덕였다.
"원래 치려던 곡은 없어요. 그냥 가장 먼저 떠오른 곡을 연주했을 것 같거든요. 어쩌면 지금이라면, 벚꽃이 떨어지는 분위기를 연주했을지도 모르겠네요. 이미 벚꽃은 다 지긴 했지만, 그래도 역시 봄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더라고요. 벚꽃."
물론 벚꽃과 연관된 곡 역시 수가 많았으니, 정확히 뭘 연주했을 것이라고 장담은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하늘은 선배에게 연주한 곡이 원래 치려던 곡이었던 것 같다고 가볍게 말을 이어보이면서 작게 소리없이 웃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결국 가장 먼저 떠오른 곡이 바로 그 곡이었으니까.
특기생이라는 말에 작게 감탄사를 내뱉으며 하늘은 말 없이 선하의 눈을 바라봤다. 어쩌면 엄청난 선배를 만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하늘은 저도 모르게 또 한 번 감탄사를 내뱉었다.
"저도 특기생이 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어서 말이에요. 애초에 동아리를 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혼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을 뿐이고, 그렇다고 학교의 이름으로 어디 나간 것도 아니어서요. 자세한건 좀 더 찾아봐야 알겠지만..."
거기서 말이 잠시 끊어졌다. 애초에 그 요강들이 자신과 상관이 있을지. 자신이 그것을 사용할 수 있을지는 확실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자신은.... 그 이상의 생각을 더 이상 하지 않으며 하늘은 머릿속의 '그것'을 지워없앴다.
"그렇다면 지금 선배의 그 말 한번 믿어볼게요. 그 다들에 선배도 물론 포함되어있는거겠죠? 아예 모르는 사람이면 모를까. 이름도 어떤 이인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응원 정도는 할게요. 그 이상은 잘 모르겠지만."
피아노 연주를 들어준 답례라는 명목을 살짝 붙이며 하늘은 그렇게 말을 마무리지었다. 지금은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느끼면서. 괜찮을까요? 정도의 확인문이 이후 살짝 덧붙여졌다.
>>69 하늘이는 오너피셜로도 멋진 아이는 아니기 때문에 그 계약은 부당한 부정계약이 분명해! 나는 그런 계약에는 싸인하지 않아! 사실 그냥 천재도 아니고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지만 노력으로 모든 것을 커버하는 그런 캐릭터를 해보고 싶어서 만든 것 뿐인지라. 그게 전부다!
당신의 말에 경아는 작게 웃는다. 아니, 준다면 감사히 먹어야지. 장난기가 깃든 목소리로 답한다. 당신의 말마따나 당사자의 용인이 있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나.
이윽고 케이크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단 것을 좋아하는 경아였지만, 그렇다 하여 무작정 달기만 한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다. 한마디로 꾸덕한 초콜릿 케이크는 경아의 취향에 꼭 알맞았다. 여기에 우유가 있었다면 정말로 좋았을 텐데, 하고 생각할 정도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와중에 당신이 말이 들린다. 경아는 별다른 답을 하지 않는다. 그저, 푸르른 숲과도 같은 눈이 올곧게 당신을 향한다. 자신에게는 털어놓아도 좋다는 듯 온화하다.
당신이 하는 말을 듣고 생각이 많아진다. 당장 작은 동아리 하나를 이끄는 일도 쉽지 않다. 하물며 제각각 자신의 길을 준비하는 고등학교 3학년에 학생을 대표하는 일을 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들까 싶어. 경아는 한참을 고민하며 말을 고르다 이야기한다. 특유의 조근조근하고 차분한 목소리다.
"...같이 있는 시간만이라도 네가 편히 있다 갔으면 좋겠어. 내가 줄 수 있는 도움이라곤 그런 것 뿐이니까."
말을 마치곤 순하게 웃어보인다. 경아는 늘 투명한 사람처럼 보였다. 그 진심을 그대로 내비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그리고 그 투명한 호의는 지금 오롯이 당신을 향해 쏟아진다. 그래, 쏟아진다는 말이 어울린다. 마치 피할 수 없는 비처럼.
경아는 당신이 먹는 모습을 보며 저도 포크를 들었다. 작게 한 조각을 떼어내어 먹는다. 달달한 것 앞에서 한껏 풀어지고 마는 것은 정말로, 불가항력이다. 케이크의 단 맛을 만끽하는 경아는 그제서야 어른스러움을 내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헤실 웃으며 맛있다...하고 중얼거리는 모습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