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하는 곧바로 이어지는 하늘의 연주에 다시 한 번 다른 음을 쳐볼까하는 충동이 일었지만 꾹 참아냈다. 한 두번이야 재미있지 세번째부터는 뇌절이다. "잘하네." 선하는 무의식적으로 중얼거렸다. 칭찬하려는 의도는 아니었고 아부하려는 의도는 더더욱 아니었다. 가끔 거짓말을 새처럼 지져기고는 하지만 지금은 순수한 감상이었다. 단순히 노래를 들었을때에는 막연히 잘한다 정도의 감상이 이런식으로 직접 경험했을때 새롭게 다가왔다.
"흐음, 그래? 아쉽더라. 벚꽃. 다 져버렸잖아."
벚꽃이 한창 피어났을때에는 소원을 빈다던가하는 이유로 학교가 시끌벅적 했던 것 같은데, 비가 온 후 죄다 져버렸다. 다들 소강 상태에 접어버린듯 다시 조용해졌다. 철 지난 이야깃거리를 다시 꺼내본다. "너도 소원을 빌었니?" 별 기대 않고 물은 질문이었다. 선하는 소원을 빌지 않았다. 선하는 터무니 없는 소원 빌기에는 흥미를 잃은지 오래다.
"...난 그냥 하라는 대로 하거든. 대회나, 연습이나 그런거. 그런 식으로 감탄할 거리는 아니야."
선하가 어깨를 으쓱인다. 수영이 싫다는 건 아니었다. 다만 이 비루먹을 짐승 머리는 만들어진 체계나 규칙에 무지했다. 어디에 나가서 뭘 해야 장래에 도움이 되고, 최소한 이정도 성적은 받아와야 대학에 갈 수 있고... 머리에 거울이라도 박은 듯 제대로 들어먹지를 못했다. 선하는 그냥 수영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마치 교육받은 경주마와도 같지,라는 생각을 했지만 눈치껏 그말을 입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경주마 취급이 싫지도 않았다.
"나?"
선하는 의외의 포인트에서 눈을 크게 떴다. 하늘의 말을 이해하기 위해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단어를 하나하나 이해하고, 그 말에 담긴 뉘앙스를 파악하고... 이윽고 그게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선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만지작거렸다. 입술을 이로 슬쩍 물고는 고개를 한 번 털어낸다. 하, 결국 웃음을 터뜨린다. "상냥하기는." 굳이 이해하지 않아도 그 말이 자신을 기쁘게 하는 것쯤은 알고 있다.
"양선하야. 3학년 1반. 기왕이면 내 이름을 아는 사람한테 응원을 받고 싶어서 말이야. 그리고, 날 응원하는 사람의 이름 정도는 알고 싶고. 친구 이름은 뭐야?"
소원을 빌었냐는 물음에 하늘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자신이 정말로 이루고 싶은 소원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 소원은 누군가에게 빌고 싶지 않았다. 오로지 순수하게 자신의 힘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진 알 수 없었으나 자신의 힘만으로 이뤄내지 않으면 의미가 없었으니까. 그렇기에 그는 소원을 빌지 않았다.
"그렇게 따지자면, 저도 그냥 건반을 쳐서 음을 연결하는 작업의 연속일 뿐인걸요. 선배에게는 아닐지 몰라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충분히 감탄거리라고 생각해요."
적어도 자신에게는 그렇다고 생각하며 하늘은 약한 반박을 보였다. 물론 그는 그녀가 뭘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허나 대회, 연습. 이런 것으로 보아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뿐이었다. 실기가 중요한 무언가. 자신처럼 음악일지, 아니면 체육? 그것도 아니면 요리? 어느 쪽인진 알 수 없으나 특기생이라면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은 추측을 잠시 멈췄다.
"2학년 1반, 강하늘이라고 해요. 선하 선배란 말이죠? 다른 학년이고, 자주 볼 순 없겠지만 그래도 후배 하나로서 마음속으로 응원할게요."
꼭 좋은 대학 가기에요. 그렇게 장난스럽게 덧붙이며 하늘은 가볍게 두 손을 탈탈 털었다. 다시 몸을 돌려 피아노를 제대로 바라보며 두 손을 움직여 도레미파솔라시도를 연주한 후에, 빠르게 역으로 친 후 하늘은 다시 두 손을 들어올렸다.
"선배는 무슨 특기생이에요? 그냥 개인적인 궁금증인데, 답하기 꺼려진다면 얘기 안해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패치를 안 붙인다고 해도, 그냥 감정에 휩쓸려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게 전부잖아요. 물론 그런 행동들이 증후군 보유자를 위험한 상황으로 몰아갈 수도 있긴 하지만, 증후군 그 자체가 사람의 건강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못 들었는데." "늑대 증후군자에게 패치가 배급되지 않는 건 언제나 심각한 상황이지만, 이번 케이스는 그 특성상 상황의 심각성이 더 커. 신체강화 계통의 케이스이긴 한데, 근육이나 골조직 같은 게 활성화되거나 하는 게 아니라 중추신경이 과활성화되는 케이스거든." "중추신경이 과활성화되면 어떻게 되는데요?" "뉴런을 통과하는 전기신호들의 처리속도와 처리량이 비정상적으로 폭증해서, 시간이 훨씬 느리게 가는 것처럼 느껴지지. 온 세상이 슬로우모션 비디오가 되는 거야." "어, 그러면, 지금까지 이 학생은.. 집에 마련해둔 지하실에 자기를 묶어놓고 버텼다고 했잖아요. 약 이틀 정도의 만월 기간 동안." "그렇지." "그리고 만월 기간 동안에는 자신의 늑대 증후군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고 하셨죠." "그래. 그게 무슨 의미일까?" "그렇다면, 그 학생이 지하실에서 느꼈을 체감 시간은 이틀보다 더 길었을 수도 있다는......?" "네가 생각한 게 맞아. 잘 유추했어." "얼마나 길게 느꼈대요...?" "본인의 증언에 따르면, 때마다 다르지만 보통 체감시간상으로는 두 달 정도래." "그런, 그건, 잠깐만요... 지금까지 이 학생한테는 초등학교 때부터 행정상 누락사항 때문에 패치가 지급되지 않았잖아요. 그러면 그 때 이후로 지금까지 매달마다......?" "그렇게 봐도 무방하겠지. 고등학교 1학년 여름즈음 해서 어떤 양과 친밀한 관계를 갖게 되어서, 약 7~8개월 동안은 충분한 케어를 받았다는 모양이지만... 그 관계가 작년 말에 끝났고, 그 외에는 딱히 다른 양과 충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단서가 없으니까. 그 때 이후로 보름달이 뜰 때마다 이 친구는 체감시간상 두 달 정도에 육박하는 독방형을 정기적으로 받았다는 거야."
서류를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과 멀리 떨어져있는 한 주택의 지하실에서, 하얀 머리 소년은 지하실 안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창고로 쓰였었던 것 같은 지하실의 풍경을 그는 가만히 바라보았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이틀 동안 물 한 모금 못 마시는 갈증을 고스란히 느껴가면서. 이틀 동안 채워지지 않는 기아를 참아가면서. 혼자서 어두운 지하실 안에서 외로움과 두려움을 견뎌가면서. 그것을 매 달마다 두 달씩... ...고독사했어도 이상하지 않을걸?"
소년은 무릎을 쭈그리고 앉아, 주먹만한 사슬마디를 쥐고 들어올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래서 기관에서 이 특이 케이스를 예의주시하고 있는 거고, 우리가 그 학생을 케어할 필요가 있다는 거야. 패치가 제대로 지급되도록 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떠한 정신적 피해가 남아있지는 않은지. 돌발행동을 하지는 않는지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