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침대에 눕지도 못했고, 베개는커녕 변변한 이불 하나 덮지 못했건만, 그것은 작년에 맞이한 종말 이래로 문하에게는 처음으로 취해보는 고문이 아닌 달디단 숙면이었다. 눈을 감아도 어떤 얼굴도 떠오르는 일 없이, 어떤 악몽을 꾸는 일도 없이, 길어봤자 서너 시간이었겠지만 문하에게 그것은 정말로 고요한 잠이었다.
그렇게 내내 때려부었음에도, 아직도 가랑비가 질기게 한두 방울씩 톡톡 떨어지고 있었다. 소리가 나지 않을 정도의 비. 조금이라도 몸을 틀면 계속 내린 비로 쌀쌀한 비바람이 느껴질 테지만, 져지와 와이셔츠에 감싸인 채로 기대어져 있는 품 안은 그런대로 따뜻했다. 새슬이 잠꼬대하듯 따뜻한 품 안으로 파고들자, 품의 주인은 뭐라 별 말 하지 않고 새슬의 어깨를 감싸안은 단단한 팔에 좀더 힘을 주어 새슬을 품 안으로 끌어당겼다.
"더 자려고?"
그는 새슬의 곁을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딘가에 기대어안겨있는 새슬의 머리를, 굳은살투성이의 손이 조심스레 살며시 쓰다듬어주기 시작했다. 새슬이 웅얼거리듯 흘리는 말에, 그는 새슬의 머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면서 대답했다.
"그렇게 해."
문하는, 새슬이 나직이 흘리는 잠꼬대를 받아안았다. 의문 같은 것은 진작에 씻겨나가고, 그새에 이것은 서투르나마 당연한 일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는 문하 스스로도 다 흘리지 못한 잠꼬대를 살며시 새슬에게 포갰다.
"이대로 있어줄 테니까."
네가 일어나건, 더 자건. 너도 지금 나와 있어주고 있잖아. 새슬의 어깨에 씌인 자신의 져지며 와이셔츠가 흘러내리진 않았는지 한 번 추슬러주고, 문하는 새슬은 품어안은 채로 정자에 앉아 새슬이 잠에서 깨기를 기다렸다. 아니 어쩌면 새슬과 함께 다시 잠에 들려고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대로 털고 일어날 수도 있고 또 잠들 수도 있는데, 밤중이라 새슬이가 헤어지기 싫어한다거나 하면 문하가 자기 집에서 하룻밤 재워주려 할 수도 있다는 점 말씀드리고.. 답레 두고 갈게..
'참 이상도 하지...' 그녀의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지난 1년간의 공백에서 쌓아올린 벽이 단 하루만에, 아니... 단 하루도 안되어서 무너져내렸다.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가? 하고 되물어도 알 수 없었다. 당장의 자신이 품었던 마음도 제대로 설명 못하는 주제에 어떻게 이 의문을 수학자나 철학자마냥 풀어낼 수 있단 말인가,
이렇듯 인간의 마음은, 인간의 감정은 그녀에겐 정말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었다. 감정의 소용돌이에 살지 않는 것을 다행으로 여겼었다.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이들에게서 눈을 돌린지 오래되고, 더이상 아무도 무어라 하지 않을즈음, 그녀는 자신의 앞에 쌓아올려진 벽을 보고서 뿌듯해했다.
적어도 당신을 다시 만나기 전까진...
"재밌네요. 이런 상황도, 그대야의 진심이 느껴지는 사랑고백도... 거짓말은 하고 싶지 않은데, 스스로 거짓말을 하는 것처럼 생생하게 와닿아요... 무언가에 취한 것처럼, 약을 과하게 먹었을 때처럼...
참 이상하죠? 그대야도 알겠지만... 분명 저는 이런것들을 느낄 수가 없었을텐데..."
그런데도 버젓이 느끼고 있는,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하지 못하는 자신이 있었다. 이 감각과 감정 모두가 또렷하게 자신의 것처럼 느껴졌다.
뻗어진 당신의 팔이 제 목을 감싸왔고 그러면서도 그 손길에 맞게 스르르 바닥에 눕기 시작했다. 교복이야 좀 더러워질 수 있다지만, 그녀는 여느때와같이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당신의 옷이 더럽혀지지 않으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기꺼이 드러누울수 있을 배짱 정도는 그녀에겐 얼마든지 있었다.
가까워진 얼굴, 떨리는 목소리, 그러면서도 올곧은 당신의 말들. 당신은 전해지지 않는것 같아 답답해하겠지만, 이미 그녀는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고마워요. 그대야... 이런 제게 가치있다 해줘서, 이런 제게 사랑한다 해줘서..."
이미 그 말 한마디로 속죄받은 기분이거늘, 거듭해서 겹쳐진 입술과 살며시 맞잡은 손의 감촉이 자양분이 되어서 온몸에 흐르는 것 같았다.
처음으로 자신에게서 살아있음을 느꼈다. 사랑받은건 이번이 두번째지만, 처음으로 사랑할수 있었다. 그녀는 확신했다. 당신을... 이시아라는 사람을 사랑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그대야는 제가 행복해지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했죠? ...저도 마찬가지니까요.
그러니 부디... 저를 마음대로 부려주세요. 하고 싶은 것들 모두, 제게 이야기해주세요. 얼마든지 들을 거고, 얼마든지 따를테니..."
물론 그때의 기억이 한순간에 괜찮은 일로 바뀔리는 없었다. 사람은 그 의심과 서러움을 한번에 거두어낼 수 없다. 그것은 누구보다도 냉정한 그녀가 더 잘 알고 있겠지. 둘중 한사람이 느리다면, 상대의 페이스에 충분히 맞출 준비는 되어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천천히 시작하기로 했다. 비록 무너진건 한순간이라 해도 자신이 받아들일 이 감정을 다시 조립할 필요가 있었고, 당신이 받았던 상처를 조금씩 보듬어줄 필요가 있었다. 굳이 서두르고 싶진 않았다. 서두르다가 또 다시 당신을 상처입히면 모처럼의 의미가 사라질테니,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전엔 하지 않았던, 하지 못했던 행동들을 하나하나 익혀나가야 했다. 분명 다시 하는 사랑인데도 그녀는 모든 것이 서투를 것이다. 그도 그럴게, 그동안은 제대로된 표현조차 해본적 없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