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에 빠진 하늘과 달리 선하는 별 생각 없었다.(...) 조금 짓궂게 말한 감이 없잖아 있기 했지만 복잡한 생각을 거친 결과는 아니었다. 당황한 기색이 선하의 얼굴에 스친다. 대충 아무거나 연주해주겠지,정도의 가벼운 마음으로 제안한 것이었다. 사실 '아무거나'가 제일 어려운 주문인 법이지만 선하는 그걸 몰랐다. 반쯤 장난으로 시작한 연주는 진지하게 끝을 맺었다.
"너... 정말 피아노 좋아하는구나?"
그렇지 않고서야 자신의 즉흥적인 부탁을 저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일리가 없다. 떨떠름한 얼굴을 지워낸다. 불쾌감에 의한 것은 아니고 당황한 것을 말미암아 생긴 얼굴이었다. 선하가 듣기에 어색한 부분 없었으니 잘쳤다고 표현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와중에 노래도 퍽 마음에 들었다. "신기하지..." 습관적으로 입술을 손끝으로 문지른다.
음악시간 후에 피아노를 붙잡고 앉은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이 평범한 수준의 피아노 곡이나 칠 줄 알았는데 말이다. 깜짝선물이라도 받은 기분이었다. 이걸 뭐라하지? 피아니스트가 실력을 숨김? 한때 밈으로 유행했던 웹소설 제목을 떠올리며 선하가 답을 한다.
"아까는 잘치는지 모르겠다느니 뭐니 하더니 겸손하게 굴었네."
입꼬리가 미묘하게 올라간다. 아까처럼 마냥 밝은 웃음은 아니었지만 부정적인 느낌 역시 아니었다. 흥미가 생겼는지 선하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늘 뒤에 섰다. 팔짱을 끼고는 피아노 선반을 본다. 음악에 문외한이지만 악보 없이 곡을, 그것도 처음부터 끝까지 쳐내는 게 평범하지 않은 것쯤은 알고 있다.
자신의 손목에 묶여지는 네 리본을 멍하니 바라보다 왠지 돌이 된 것처럼 굳어서 좀처럼 떼어지지 않는 입술을 달싹여. 몇번이고 몇번이고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으면서도 자꾸만 무언가를 말하려 입을 달싹이다가 간신히 내뱉은 말.
"사랑해..사랑해..."
계속해서 말해주고 싶은데, 지금 자신의 눈 앞에 펼쳐진 이 상황을 몸이 받아들이지 못 하고 있는 탓에 떨리고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사랑해.
그때도 지금도 널 사랑하고 있었어.
사랑해.
사랑했었다니 그때도 지금도 마음은 변한 적 없었으면서
" 언제나 하고 있었어, 사랑. 네게 수줍게 방과후 귀갓길에서 고백을 했을 때에도, 너와 모두에게 숨기고 연애를 했을 때에도, 네가 날 두고 떠났을 때도.. "
" 단 한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까.. 사랑했었다는 말은 잘못 됐으니까.. "
천천히 몸을 움직여 무릎을 꿇고 있는 네게 다가가 팔을 뻗어 목을 감싸안고 교복이 더러워지건 말건 신경쓰지 않고 그대로 널 빈 교실의 바닥에 눕혀. 빈교실의 바닥에 비단이 펼쳐지는 것처럼 고운 네 분홍빛 머리카락이 펼쳐져. 그 모습을 눈에 담다가 천천히 바닥에 눕혀진 네게 고개를 가까이 해.
" 사랑해, 슬혜야. 쭉 그래왔어. "
이건 확실히 해야하는게 맞을테니까. 나는 널 내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답해. 애초에 단 한번도 널 향한 마음을 잊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네게 올곧게 전해. 어떻게 하면 네가 내 마음을 더 잘 알 수 있을까. 마음을 열어 보여줄 수 있다면 좋을텐데. 답답해. 그러니까..
행동으로 보여줄거야.
" 사랑해, 슬혜야.. "
나는 바닥에 눕힌 네 입술에 나의 입술을 가져가 겹치며 양손으로 네 손을 맞잡아. 부드러운 손을 내 손으로 감싸안고 내 사랑을 이 입맞춤으로 전해주려 애를 써봐. 어떻게 하면 좀 더 전해질지, 어떻게 하면 네가 좀 더 기뻐하고 행복해할지 고민하면서, 매달리듯 네게 입을 맞춰가.
시선을 돌려 바라본 눈은, 음울한 회색 하늘 아래에 잠겨서 마치 거기에 있어야 할 것이 없이 뻥 뚫려있기라도 한 마냥 검었다. 별빛 한 점 없는 밤하늘이 거기 있었다. 무언가 담겨있는 게 어색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소년에게 시력이 존재하는지마저 의심될 정도로 눈은 마냥 공허히 비어 있었다. 기대에 배반당하고 낙원을 잃어버린 사람의 눈이었다. 그러나 시점마저도 잃고 닿을 곳 없는 어딘가를 향하여 멍하니 놓여있는 것만 같던 그 눈길이, 지금 이 순간은 명백히 새슬을 마주보고 있었다. 새슬이 거기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것처럼.
새슬이 톡 꺼낸 장난스런 농담에, 문하는 처마로 돌리려던 시선을 다시 새슬에게로 돌렸다. 얼굴에 수건을 파묻고 나서, 다시 얼굴을 들어올리고 웃으며 농담이야, 하고 중얼거리는 것까지 다 들어주고 나서야, 문하는 늦은 대답을 꺼냈다.
"성립이 안되는걸, 내기."
당연하다. 여기서 보내는 시간이 줄어들면 그 차가운 독방에서 보내야 할 시간이 늘어나는데. 애초에 가당찮은 애걸을 해서 여기서 헤어졌어야 할 만남을 멈추어놓은 것은 문하가 아니었던가. 문하는 문득 고요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는 나직이 말했다.
"...여길 떠나서 집으로 돌아가게 되면 나는 또 혼자야."
그래, 분명히, 변덕이었는데, 친절이라는 자신에게 희박한 감정이 어디서 갑자기 날아와서 끼어들었다. 그렇게 된 걸로 하기로 정했는데. 나는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걸까.
친절이라고 써붙여둔 그것은 자기한테 붙은 이름표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문하는 다시 가방을 뒤적거렸다. 핸드폰을 꺼내고, 이어폰을 꺼낸다. 그리곤 자기가 하나를 귀에 끼고, 다른 하나는 새슬에게 건네주었다. 더 이상 말을 해봐야, 쓸데없는 소리들만 자꾸 나올 것 같아서.
"좋아해요. 이 시간대에 치러 올 정도로요. 그리고 겸손이 아닌걸요. 저보다 실력 좋은 사람들은 많은걸요."
제 아무리 피아노를 잘 친다고 한들 결국 정말 작정하고 연주하는 늑대 피아니스트에게는 미치지 못할 때가 많았다. 그 차이를 인정할 수 없어, 정말 끝없이 연습을 하나 그들이라고 어디 가만히 있겠는가. 실력의 격차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을 때가 많은 것은 사실이었기에 하늘은 그 점만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자신보다 실력이 좋은 이가 많다고. 조금 쓰린 표현이었으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피아노 건반 부분을 보고 있었기에 자신을 위한 연주를 해달라던 그녀가 지금 어떤 모습인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은 아니었기에, 다가오고 있다는 것, 자신을 향한 목소리마저 형턔를 못 느끼고 놓치는 일은 없었다. 자신을 향한 그 물음에 하늘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곡도, 다른 곡들도 치는 것은 많거든요. 일단 대회나 콩쿨 같은 것에 나가기도 해서. 꾸준히 연습해야하거든요. 이런 곡, 저런 곡, 클래식, 뉴에이지 등등."
오른쪽 손을 건반에서 떼어내며 하늘은 오른손 손가락 네 개를 접었다가 다시 펼치며 손을 건반 위로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