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니또용 위키 http://threadiki.80port.net/wiki/wiki.php/Bite/%EB%A7%88%EB%8B%88%EB%98%90 <<< 마니또 이벤트는 위 위키에서 갱신됩니다! 수시로 확인 부탁드리고, 마니또 답변은 가능한 위키에도 기재해주세요.
유독 눈이 좋은 탓에 선하는 하늘의 집착을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하늘의 집요한 시선을 은밀히 따라간다. 먼지를 막기 위해 덮어진 휘장이 거두어져있다. 매끈하게 빛나던 뚜껑이 열리고 그 안에 드러난 하얗고 검은 건반들의 정열들이란. 아마도 하늘은 그걸 보고 있을 것이다. 방음이 되어있는 탓에 음악실안에는 적막이 깔린다.
"난 그보다도 특출나지 못한 관객이라서 듣는 귀가 좋지 못해. 보아하니 피아노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냥 쳐. 그렇게 좋아하면 못치지는 않겠지."
선하가 싫어하는 종류의 연주는 엇나가는 박자와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높은 음정도가 될 것이다. 극히 초보가 아니면 잘 하지 않는 실수들이었다. 선하는 자세를 바로잡고 자리에 앉았다. 배꼽위에 올려놓던 손깍지를 책상위로 올리고 허리를 쭉 폈다. 상대가 자신을 신경쓰고 있다면 저 역시 신경써줘야함이 맞았다. 학습된 배려가 선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네 선택에 내가 그다지도 중요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선하가 그리 말하며 말꼬리를 늘였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 상대의 행동이 변하는 건 지금 당장 구미당기는 일이 아니었다. "기어코 나를 관객으로 만들어놓겠다는거니? 그래, 듣고 싶어. 대신 날 위해 연주해줘야할거야." 그래서 선하는 조건을 내걸었다. 자신을 선택의 갈림길로 이끌었다면 이정도 부탁은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음악 자체에는 관심 없을지언정, 그 음악이 저를 위한다면 그 가치가 달라진다. 선하는 빙그레 웃으며 손깍지에 제 턱을 올렸다.
마치 과거로 돌아간 느낌, 사람들 앞에선 숨어다녔지만 단 둘이 있을 때만큼은 오롯이 자신이 만끽하던 그 온기가 어느샌가 다시 자신의 품으로 돌아온 것을 느끼며, 한순간 눈시울이 붉어질 것만 같은 시아였다. 안돼, 이러다 미소가 무너질지도 몰라. 시아는 어떻게든 짓고 있는 미소에 힘을 주어 지켜내며 꼭 감싸안았다.
자신을 더욱 단단하게 안아주는 그 팔에, 조심스럽게 힘을 풀어 자신의 몸을 기대어보면서 천천히 슬혜의 얼굴을 올려다 보았다.
" ... 내가 할 줄 아는 건 이런 것 뿐이니까. 내가 해줄 수 있는건 그때나 지금이나 이런 것들 뿐이라서. "
그때의 내가, 지금의 내가 그당시의 너에게 무언가를 해줄 수 있었다면 이렇게 1년이 넘는 세월을 빙빙 돌아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 말을 입에 삼킨 체로 희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꾸만 뜨거워지는 눈시울 탓에 무너지려는 미소를 애를 쓰며 지켜내려 했다. 왠지 슬혜에게 완전히 우는 모습을 보여주면 안될 것만 같아서, 그래서 꾹 참아낸다.
그리곤 자신의 목을 무는 슬혜의 행동에, 그저 자연스럽게 자신의 몸을 맡긴다. 그걸로 슬혜가 기뻐할 수 있다면, 기분이 좋아진다면 얼마든지 내어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슬혜가 문 목덜미에서 전해져오는 정신이 아늑해지는 감각에 그저 시아가 할 수 있는 것은 슬혜의 몸에 매달리듯 안는 것 뿐이었다.
용기를 내어 입술을 오물거리던 자신에게 몇번인가 무는 시늉을 해오는 슬혜를 보며 시아는 맑은 웃음을 흘렸다. 왠지 2년 전의 두사람으로 돌아간 것만 같아서, 오늘 하루로 끝날 꿈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은 행복했노라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막상 갑자기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자신에게서 떨어지려는 슬혜를 바라보며 마음 한켠이 아파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행복했노라 말할 수 있음에도 멀리 하고 싶지 않은 것은 역시 그녀 또한 욕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증거리라.
" 어...? "
이젠 슬혜가 돌아가려 떨어졌다고 생각을 하던 시아는 한순간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갑작스레 자신의 발치에 무릎을 꿇는 슬혜, 그리고 자신을 올려다보며, 손을 매만지고 예쁘장한 입술이 열리며 흘러나오는 말. 그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애써 짓고 있던 희미한 미소 마저도 사라진 체 멍하니 홀린 것처럼 슬혜를 내려다보던 시아는 비틀거리더니 그대로 주저 앉았다. 애써 무릎을 꿇은 슬혜에겐 미안하지만 한순간 다리에 힘이 풀려버린 것이었다.
" .....나 이번엔 다시 놓지 않아도 되는거야..? "
주저앉으면서 큰 소리가 났음에도, 멍하니 슬혜를 바라보고 있던 시아가 천천히 입술을 연다. 파르르 떨려오는 목소리가 지금 시아의 동요를 보여주는 듯 했다. 슬혜에게 내어주지 않은 손을 자꾸만 쥐었다 폈다 했고, 눈을 자꾸만 느릿하게 감았다 뜨며 조용히 속삭였다.
" 나 이번에는 나를 내버려두고 가는 슬혜의 뒷모습을 보지 않아도 되는거야..? 나 이번에는 슬혜가 나를 두고 멀리 가버리는 것을 잡지 못하고 지켜보는 것도 안해도 되는거야..? 이젠 언젠가 슬혜를 만나면 사랑했었다고 제대로 말해주고 싶다는 걸 생각만 하지 않아도 되는거야...? "
더이상 미소를 지을 힘도 없는 것인지, 천천히 일그러지는 얼굴로 시아는 조용히 속삭이듯 물어왔다. 더이상 참지 않아도 되냐고, 더이상 혼자서 아파하지 않아도 되냐고, 이젠 맘 편히 슬혜에게 안길 수 있는 것이냐고, 울먹이며 묻고 있었다. 그자리에는 언제나 부드럽고, 평온하고, 잔잔하던 따스한 소녀는 없었다. 그저 더이상 홀로 아파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는 여린 소녀가 있었다.
" 놓지 말아줘... 나를 놓지말아줘... 역시 나 그런건 싫으니까.. 그날도 싫다고 말했어야 하는데...응, 몇번이고 몇번이고 마음속으로만 말했었는데... 나...놓지마아... "
싫어, 그런거... 이젠 혼자 아파하는 건 싫어..
시아는 울었다. 슬혜의 손을 혹시라도 이게 꿈이라서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릴까봐, 두손으로 강하게 움켜쥔 체로 엉엉 울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슬혜에게 어리광을 부리기 시작했다.
문하의 반문이었다. 이상할 정도로 붕 떠있는 소녀만큼이나 이상할 정도로 착 가라앉아있는 소년도 이상하게 보이긴 마찬가지였으니까. ...다만, 이제 그런 것까지 일일이 돌팔매질 치부하기에는 이제 그런 것에 너무 무뎌졌을 뿐이다. 비루먹은 개답게 사람들 주변을 어설프게 맴돌거나 무심코 가까이 다가갔다가 쫓겨나는 건 이제 딱히 특별한 사건도 아니고 일과 같은 것이었기에. 그렇게 익숙한 일이기에 문하는 어떤 선이 그어졌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코너를 돌아 걸어가는 발걸음이 차박차박 차갑다.
공원을 찾는 새슬의 말에, 기억을 더듬어볼 필요도 없이 공원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매일의 로드워크로 학교 주변 지리는 꽤 익숙했다. 새슬이 어느 공원을 말하는 건지 알 수 있다.
"알았어."
가만히 선을 긋는 축객령에 문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설픈 동질감 따위에 눈이 멀어 선을 넘고 싶지는 않았다. 그 공원에 비를 피할 만한 장소나 부스 같은 게 있던가?
"─대신에 비가 그칠 때까진 같이 있게 해줘."
...그렇기에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다.
같이 있어줄게, 가 아니라 같이 있게 해줘, 라고. 일부러 그렇게 말했다.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금방 그칠 소나기니까, 그 공원에 도착하면 거짓말처럼 이 소낙비가 멈출지도 모르지만, 만일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문하는 새슬을 빗속에 그냥 놓아두고 가는 게 왜인지 겁이 났다. 그것도 겁이 났고, 새슬을 빗속에 버려두고 혼자 우산을 쓴 채로 터벅터벅 독방형을 받으러 돌아가는 길의 고독도 겁이 났다.
아닌데. 이게 아닌데. 문하는 한 박자 늦게 자책했다. 자꾸 이성이 입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네 선택에 자신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그건 지금도 유효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연주를 할 거면 자신을 연주해라. 즉, 알아서 센스를 보여봐라. 답일지 아닐지 모를 그런 추측을 하며 하늘은 피아노 의자에 앉았다. 마치 자유롭게 곡을 연주하는 자리가 된 것 같아 괜히 침을 삼켰다. 자유롭게 연주하는 것이 어쩌면 제일 어려운 일이었다. 곡이 정해져있으면 그 곡을 연습해서 포인트를 살리면 되나, 자유곡은 곡의 선정부터 시작해서 그 곡을 연구하는 것까지 자신이 해야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를 위한 연주가 되고 곡이 될 것인가. 결국 하늘이 낸 답은 하나였다. 자신이 느끼는 것과 분위기. 그것을 피아노로 연주할 뿐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어울릴만한 곡은 무엇인가. 머리로 계산을 하며, 멜로디를 그려내며 하늘은 조심스럽게 피아노 건반 위에 자신의 두 손을 내렸다.
두 손이 만들어내는 곡은 화려하지도 않았고 현란한 곡이 아니었다. 조용하고 차분한, 밤공간을 연상시키는 곡이었다. 밝고 시끄러워서 이 음악실로 왔다면 그나마 덜 시끄럽고 밝지 않은 차분한 밤공간을 묘사한 곡이면 어떨까. 물론 피아노 음 자체가 시끄럽다면 자신으로서는 할 말이 없었다.
눈을 감고, 최대한 차분함을 살리려는 듯 손을 가볍게 움직이며 하늘은 미소를 약하게 지었다. 마지막 음 하나까지 흐트러지는 일 없이, 박자가 흔들리거나, 분위기가 깨지는 일 없이 정말 마지막까지 흔들림없이 손을 움직이다 여운을 그리는 듯, 마지막 음을 괜히 길게 누르다가 그 음이 천천히 작아지는 것을 느끼며 하늘은 두 손을 떼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