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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원의 제대로 만들어내지 못 하는 말을 슬혜는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 신경 쓰고 있었느냐는 듯한 말투로 부드러운 미소가 얼굴에서 싹 사라지고 고압적인 태도로 주원을 내려다보며 그를 벽으로 밀어붙였다. 무섭다거나, 그런 것이 아니었다. 다만,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깨닫고 있었다.
"...그런 말을 들으면 누구나..."
주원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반박해보려고 하지만, 글쎄. 어쩌면 누군가는 흘려들을지도 모르지. 누군가는 그 분위기에서 흘러나온 말로 치부할 수도 있고. 주원처럼 올곧게,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적을지도.
문자 그대로, 별 의미 없었다. 하지만 주원에게만 할 수 있었던 말. 주원은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천천히 듣고 있었다.
슬혜는 손을 뻗어 주원의 턱선을 따라 손가락으로 훑어간다. 그리곤 피 맛으로 본능을 깨운 듯한 맹수와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인다.
"은혜... 나는..."
그녀에게 다가간 것은 어딘가 과거의 자신과 닮아있기 때문에. 그 이유가 중간에 조금은 바뀌었을지도 몰라도, 완전히 잊은 것은 아니었다. 슬혜는 옷 속에서 목걸이를 꺼내어 거기에 걸린 '열쇠'를 보여주었다. 돌려받지 못한 열쇠. 그리고 돌려받지 않겠다고 말 한 열쇠. 열쇠는 열쇠다. 얼마든 타인에게 줄 수 있고, 돌려받을 수 있는 열쇠. 하지만 타인에게 열쇠를 준다는 것의 의미는, 분명 마음 깊은 곳까지 '허락'한다는 의미겠지. 그리고 그것을 돌려받을 때는, 분명.
슬혜는 말을 이어갔다. 응당한 보상이 있으며, 그것에 충실할 뿐이라고. 자신을 끌어내 주려고 하지 않았냐며. 이어 그녀는 몸을 기울여 주원의 귓가에 속삭였다.
풀어준 댓가라고.
"대가..."
주원 작게 그 말을 되뇌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인가.'
"..."
주원은 쉽게 입을 뗄 수 없었다. 새콤달콤한 시트러스의 향기.그녀는 제대로 알약을 먹었을 터임에도, 주원은 팔에 그 늑대의 욕망을 제어하기 위한 패치를 붙이고 있었음에도 그 향기가 다시 자신을 감싸며 끌어당기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어쩌면 그것은 기억에서 되살아난 페로몬의 향기일지도 모르지. 그 날의 기억으로부터 새어나오는 향기.
그는 태생으로 늑대이고, 그것을 거스를 수 있는 늑대는 없다. 모든 늑대는 주박처럼 그 욕망에 사로잡히고, 그것을 채우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그것은 주원도 마찬가지이고. 하지만 단순히 배를 채우는 것 이상으로, 그가 추구하던 것은.
문득 방금 전 식사할 때를 떠올린다.
'아, 그렇구나. 나는.'
그것은 정확하게 주고받은 것이 아니었다. 비상시의,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잠시 '빌려주었을 뿐.' 그 상황이 충분히 달라질 수도 있었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주원은 마치 선택권을 주듯 애매하게 힘을 줘 밀어붙이는 그녀의 허리와 등에 두 팔을 둘러 부드럽게 안으려 했다.
만약 그녀가 별말 없이 안겨 온다면 주원은 그녀의 귓가에 속삭일 것이다.
"나는, 너와 거래한 적 없어."
은인이 으레 하는 말이 있지 않은가.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라고. 주원이 내뱉은 말은 그런 뜻일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그녀의 죄책감에서 온 행동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렇지 않을지도. 주원은 그녀를 부드럽지만 꽈악 하고 강하게 안아주려 한 뒤 놓아주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면 안타깝다고 해야 할까. 우선, 고마워. 그렇게 말 해줘서. 하지만 그 대가를 받아들일 순 없어. 그럼 늑대로서의 대가를 생각하고 너에게 다가간 게 되니까. 나는 네가 내 예전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어. 스스로의 마음을 죽이고, 상처입히지만, 그것을 그대로 보고 있을 뿐. 그렇게 죽어가는 자신과, 그걸 그냥 보고 있는 자신이 있을 뿐."
주원은 아직 그녀의 양 허리에 팔을 둘러 마주 본 채 말을 이었다.
"그런데, 잘 모르겠어. 슬혜 네가 아직도 그런지. 만약 더이상 그렇지 않다면, 그건 내가 무엇보다 바라던 것이야. 하지만 아직도, 그런 '진짜 자신'을 되찾지 못했다면..."
옆에 있기만 해도 얼굴을 붉히고 긴장하던 남주원이 맞는지, 그런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타이르는 것 같은 부드럽고 상냥한 목소리. 그리고 은은한 미소.
"난 네 옆에 있을 거야. 언제든. 절대 널 놓지 않아. 네가 아무리 밀어내도, 난 포기하지 않을 거야. 하지만."
주원은 한 번 입을 꾹 닫곤 슬픔을 삼켜내듯 침을 한 번 삼켜낸다.
"내가 네 빛이 될 수 없다면, 내가 네 옆이 있는 이유는 없어. 좋아한다던가, 그런 문제가 아냐. 사람마다 맞는 '자물쇠'와 '열쇠'가 있는 거니까. 내가 네 어두운 방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될 수 없다면."
그렇게 말하곤 한쪽 팔을 풀어 그녀의 목에 걸린 열쇠로 손을 옮겨 그것을 움켜쥐었다.
"다른 '열쇠'에게 맡기는 수 밖에 없겠지."
하고, 말을 줄인다. 하지만 마음의 자물쇠나 열쇠는 형태가 정해져 있지 않다. 절대 맞지 않는 열쇠처럼 보이더라도, 열쇠를 자물쇠에 넣다 보면 맞아들어가는 경우가 있고, 첫눈에 맞는 열쇠라고 확신하더라도, 그 열쇠를 자물쇠에 넣어가다가 어느새 더이상 맞물리지 않게 되기도 한다. 즉, 들어가는 부분까지 열쇠를 직접 넣고 돌려보지 않으면 그것이 열리지 않는지는 알 수 없는 것이다. 실체가 있는 열쇠와는 다르게. 마음의 열쇠는 말이다.
"하지만 내 열쇠나 얼마나 네 마음에 닿았을지, 솔직히 난 잘 모르겠어. 아무리 내 능력이라고 해도, 모든 것을 다 알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저 그 순간 순간의 느끼는 감정을 어렴풋이 눈치챌 뿐."
주원은 열쇠를 움켜쥔 손을 풀고 그녀의 팔을 잡아 이끌어 자신의 왼쪽 가슴. 즉 심장 쪽에 갖다 대려 했다. 만약 그녀가 그대로 이끌려 주원의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면, 조금은 가파르게, 그리고 확실히 뛰는 심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확실하게, 손에 그 진동과 리듬이 닿을 정도로.
"내 열쇠가, 네 어두운 방의 '열쇠'가 되고 있는지. 더이상은 맞지 않는지, 아니면 아직 모르겠는지. 아마 그건 슬혜 너만 알 수 있을 거야. 그리고 너라면, 거짓말을 하지 않겠지."
그가 말하는 것은 늑대와 양의 식사라던가, 서로 사귄든던가 하는 그런 단위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분명 그것은, 사람과 사람. 그리고 상처와 상처의 이야기. 그리고 슬혜라면, 자신을 꼭꼭 감추려 한 슬혜라면 분명 그것을 알 수 있을 테지.
(첨부된 이미지는 문하가 답례로 사물함 안에 넣어둔 팔찌와 비슷한 방식으로 짜여진 다른 팔찌입니다.)
문하는 가만히, 새로 시작된 다른 엉뚱한 컬렉션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무언가의 원석 같은 그것은 고래 모양으로 다듬어져 있었고. 이게 그 3개를 다 모으면 찾아온다는 행운인가? 하고 보면 또 다른 쪽지가 있었다. 어쨌건, 앞서 샀던 3개의 작은 진열 케이스 중 하나는 제 용도를 찾은 모양이다. 문하는 구석에 박아놓았던 아크릴 케이스를 꺼내서는 고래 모양의 원석 조각을 집어넣고 닫았다. 앞서 선물받은 3개의 수정 동물 조각 옆에 놓아두니 그럭저럭 볼 만했다.
─딱히 이야기나눌 사람이 없어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말이지만 문하는 반짝이는 것에 눈길이 이끌리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경향 때문에, 낙원이라고 생각한 반짝이는 무언가에 속아서 마음을 잃었고.
고래 조각과 장식품들을 내려다보는 입안이 새삼스레 썼다. 그게 자기의 바보같은 몰골을 거울처럼 비추어주는 것만 같아서.
의미하는 공통점이라는 건 무슨 뜻이고, 토템이라는 건 무슨 뜻일까.
무슨 뜻이건 무슨 의미이건 무슨 상관이랴.
자신의 삶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이다.
문하는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의 사물함에서 고개를 돌리면, 반에 으레 하나씩 걸려있곤 하는 상반신을 다 비추는 거울 하나가 걸려있었다. 오늘 치렀던 국가대표결정전의 여파로 문하의 얼굴에는 몇 군데의 상처가 나 있었고, 턱 한 쪽에 멍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얼굴에 나 있는 생채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망가져있는 것이 있었다. 자신은 손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모든 감상이 자기파괴적인 비관론으로 결부될 정도로. 자신은 그런 감상밖에 갖지 못하게 되었으며, 금속에 녹이 번져나가는 것처럼 그런 감상에 좀먹히는 것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메모지를 떼어서는, 조심스레... 한 글자 한 글자 최대한 가지런히 써서는 새로운 장식품 옆에 놓아두었다.
< 고마워. >
그는 이것 이외에 다른 말을 쓰지 않으려 부던히 노력했다. 잘 모르겠지만 자신이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것른 알았고, 녹이 다른 곳으로 번지는 일은 원치 않았다.
그는 고마워, 라고 적어둔 쪽지 옆에 파라코드로 엮은 팔찌 하나를 놓아두었다. 흰색의 테두리와 검은색의 바탕 위에 푸른색의 포인트가 들어간 그것은 코버넌트 노트 방식으로 짜여있었다. ...새로운 주인을 찾아주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자상한 마니또라면 새로운 주인으로 괜찮을 것이라고. 문하 멋대로 한 생각이었다.
눈짓으로 시아가 문을 닫는 것을 확인한다. 선하는 뒷짐을 지고서는 문고리를 만지작거린다. 이내, 딸각 소리와 함께 문이 잠겼다.
"이런, 내 말이 널 슬프게 하면 안되지. 당장 취소할게."
걱정마, 사탕처럼 달달한 냄새가 나니까. 선하의 눈이 찢어질듯 커진다. 저를 두 팔로 끌어안은 시아의 얼굴이 한 눈에 들어왔다. 우유처럼 하얀 피부에 초콜렛 같은 눈이 별빛처럼 박혀있었다. 볼에 이를 박고 질근질근 씹고 싶은 마음이 불처럼 쏫아올랐다. 선하는 시아의 팔꿈치를 슬슬 문지르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서로의 코가 거의 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글쎄, 내가 어설퍼서 쑥맥처럼 서툴면 어쩌지?"
넌 어쩔래? 속삭인다. 선하의 양 손이 등을 타고 올라가 시아의 뒤통수를 받친다. "아니면 참지 못하고 네 혀를 물어뜯으면 어떡할까?" 겁주듯 목소리라 낮게 깔렸다. 굶주린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했다. "걱정마, 난 신사적인 늑대거든." 장난이었다는 듯이 웃음소리를 흘린다. 이 역시 바닥 질질 기어가는 것 같았다.
"네 입 안도 네 향만큼이나 달달할까?"
그 말을 끝으로 그 누구도 대화를 나눌 수 없게 되었다. 망설임 없는 움직임으로 선하가 자신의 입술을 시아의 입술 위에 포갰다. 충분히 붙었으면서도, 선하는 뭐가 부족한지 자꾸, 자꾸 얼굴을 내밀었다. 자연스레 선하의 자세가 굽어지게 되었으나, 시아의 목과 뒤통수를 붙잡고 있는 손 덕분에 시아가 뒤로 넘어가는 일은 없었다.
허락을 받기라도 하듯 선하가 시아의 입술을 혀로 툭툭 두드리다가, 이내 천천히 입술 부분을 핥았다. 열어달라고 간청하는 태도로, 선하의 목대가 잘게 떨렸다. 속눈썹이 길었기 때문에 선하의 속눈썹에 시아의 얼굴에 아슬하게 닿아있었다. 선하가 눈꺼풀을 떨때마다 속눈썹이 시아를 간지럽혔다.
딸깍 하는 문이 잠기는 소리가 들리는 것 정도는 시아도 알고 있었다. 이미 이 창고 안으로 들어온 순간, 이렇게 되어버릴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것은, 아니 거부하지 않은 것은 무언가 이끌렸던 것일지도 몰랐다. 목에 가벼이 팔을 두르고 눈을 마주하자, 선하의 눈이 커지는 것을 알아차리곤 맑은 웃음소리를 흘린다. 두사람의 숨소리 외에는 고요하기 짝이 없는 창고 안에 시아의 웃음소리가 작게 퍼져나간다.
" 어머나, 가까워라. "
코가 닿을 정도로 고개를 들이미는 선하를 보며, 시아는 그저 즐겁다는 듯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체 장난스런 탄성을 뱉을 뿐이었다. 아까부터 선하에게서 느껴지던 향긋한 향이 더욱 짙어졌다. 아니, 이미 그 달콤함을 바로 눈 앞에 두고 있었다.
" 괜찮아요, 선배가 그다지 서툴진 않을 것 같으니까... 그래도 아픈 건 조금 곤란할지도. "
장난이었다는 듯 웃음을 흘리는 선하에게 키득키득 똑같이 장난스런 미소를 지어보이던 시아는 감싸안은 팔에 조금 더 힘을 준다. 재밌는 선배다. 왠지 이런 비밀을 앞으로도 몇번 더 만들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얌전히 자신의 뒤통수를 받치는 선하의 손길에 편하게 기대었다. 그리고 안그래도 가까웠던 선하의 얼굴이 좀 더 가까워졌을 때, 서툴게 시아는 눈을 감았다.
자신의 입술에 노크를 하는 선하의 행동이 퍽 우스웠지만, 시아는 망설이지 않았다. 노크에 화답을 하듯 장난스럽게 선하의 아랫입술을 오물거렸고 쪽 하는 소리를 내며 입술을 겹쳤다 떼어내곤 닫혀있던 문을 열어주었다. 간청을 하듯 선하의 몸에서 떨림이 느껴졌으니까. 천천히 잠겨있던 문을 열어준 시아는 선하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며 천천히 목을 감싸안고 있던 팔을 풀어 선하의 허리를 감싸안았다.
떨어지지 않고, 꺾여버리지 않게 의지하려는 듯 조금 힘을 줘서 끌어안은 선하의 몸에, 자신의 몸을 밀착 시키곤 파고들어오는 선하를, 성심성의껏 받아들이고 호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