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태의 어둑하게 가라앉은 암적색 눈동자가 각시탈의 말에 그쪽으로 움직였다. 이러한 상황에 놓였을 때 누군가가 구해주러 왔던 적이 있던가. 단태는 각시탈이 하는 말에 담겨있는 것을 이해했으나 납득하기 힘들었다. 어째서 저런 말을 하는걸까.
각시탈이 허공에 거꾸로 매달리는 모습에 단태는 겨누고 있던 지팡이를 아래로 늘어트리며 눈을 깜빡인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나타난 것은 할미탈이었고 그는 각시탈을 설득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느리게 깜빡여지는 단태의 눈동자에 숲 안쪽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두 짐승들을 바라볼 뿐이었다. 단태는 말이 없었고 각시탈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연인을 끌어안고 있던 팔에 힘은 풀릴 기미가 없다.
레오는 켕! 하고 우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서 이리저리 굴러 털에 붙은 불을 끄기위해 움직였다. 대충 비껴나가게만 하면 충분했는데 하필 이 정도일줄은 몰랐는데. 바닥에 한참이나 몸을 비비자 불길이 잦아들었고 화끈거리기야 했지만 이 짐승의 피부는 생각보다 강인했다. 그래도 아프기야 아팠는지 레오는 절룩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어떻게 보아도 공격하려던 레오가 실수로 공격을 대신 맞는 그림이었으니 의심할 이는 없으리라.
레오는 학원의 사람들 곁에 섰다. 이 곳이 자신이 있을 곳라는 것처럼. 자리를 잡고 앉아 마법을 맞은 부위를 연신 핥아주다가 새로운 인물의 등장에 금새 경계를 취하며 몸을 낮추고 으르렁댔다. 언제라도 공격할 수 있게끔, 어둠속에 몸을 낮추고 두 눈을 빛내며 이빨을 드러냈다.
대화를 하자곤 하지만 이 상태론 대화를 할 수 없는데다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목을 물어버리고 싶었다. 버니의 명령이라면 각시탈을 도와주라는 것이었지 저 녀석은 아니었으니까. 으르릉, 하고 다시 낮은 울음소리를 낸 레오는 주변을 서성였다. 처음은 이노리의 곁에 서서 주변을 돌며 보호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했고 다음은 단태와 주양의 곁을 돌며 대신 경계해주는듯 했고 마지막으로 스베타의 곁을 돌며 언제라도 공격하겠다는듯 이빨을 드러냈다. 마지막으로 자리를 잡은 곳은 진영의 중앙이었다.
또 핵꿀밤 맞고싶어?! 하고 윽박지르기는 했으나, 그것이 당신의 행동의 의도를 눈치채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저 중간에 공격 동선이 꼬인것이라 판단하고 평소 늘 하던 것처럼 나올 뿐이었다. 얄미운 탈에게 가하려던 공격이었기에 그 위력도 꽤 강했을테니 나름대로의 걱정도 섞여 있었다. 주영의 신경은 숙적과 탈에게서 오래 유지되지 못했다. 제 연인은 자신을 놓아줄 생각이 없어보였는데,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들었으니까.
".. 우리 여보. 괜찮아? 내가 아까. 너한테 꽤 심한 짓이라도 한거야?"
숨기는거 없이 사실대로 전부 이야기해줘. 그렇게 말하는 주양의 목소리는 묘하게 침울한 느낌으로 가라앉은 상태였다. 조종을 당한 것은 어쩔수 없다고 하지만. 자신의 행동이 제 애인에게 큰 피해를 입힌 것이 아니기를 빌었다.
"늘 중간에서 중재하느라 수고가 많아~ 적대심이 없는 사람에게 딱히 악감정은 없으니, 내 이야기는 여기까지."
지금은 상황을 정리하러 나타난 할미탈에게 신경을 기울일만한 상태가 아니기도 했고. 그래도 짧은 말 한 마디는 아끼지 않고 건네는 것이었다. 탈 몰살을 강행하게 된다면, 지금의 태도를 잔뜩 비틀어 드러내야겠지만 그것은 먼 미래의 일이 될 것이다.
너는 각시탈의 공격이 그대로 스베타를 향하는 것을 본다. 익숙한 광경이 겹쳐보인다. 피끓는 소리를 내며 죽어가던 너. 너는 높은 비명을 내지르며 헐레벌떡 그쪽을 향해 달려갔다.
"스베타! 안 돼요, 스베타, 안 돼…… 괜찮아요? 안돼, 피가 나요? 안 돼..아무도 죽어서는 안 돼, 다쳐서도.."
너는 정신없이 상처를 살피려고 했다. 그리고 마법을 쓰려 했다. "Vulnera Sanentur." 하는 것이 치유 주문이다. 이윽고 각시탈을 휙 바라봤다. 지팡이를 겨눴을 때, 할미탈이 나타났다. 너는 그 모습을 절대 잊지 않았다. 원내에 태연하게 들어와서 수업을 하고 갔기 때문이다. 네가 주문을 쓰려던 순간 각시탈은 피묻은 두마리의 동물과 함께 사라졌다. 허망한 결과다. 죽일 수 있었는데 못 죽였기 때문이다.
"자네는 사람이 죽었는데 싸우려고 온게 아니라며 말로 하라는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가오?"
너는 곁에 누가 있어도 이제 상관치 않는다는 듯, 네 친구와 아주 닮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 자네와 함께 하던 사람이 죽었소. 이 일은 유감일세. 다만 그것이 무엇 때문에 일어났는지는 전혀 고려치 않고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구려. 자네 주인은 지금 악수를 두는 것이 아니!!!. 탈도, 학생도 몇이나 더 죽어나갈 지도 모르는 상황이오. 고작 학생 몇 더 죽이겠다고 남의 목숨을 쓴다고?! 갈!!!"
목에 핏대가 섰다. 사람이 죽었다. 더는 바라지 않던 것이 계속해서 일어난다. 졸업은 커녕 생존을 고려해야 한다. 이 상황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 너는 기어이 갈! 하고 외쳐 꾸짖는 것이다.
"그래, 자네 주인은 대체 무얼 바라고 이 원내에 계속 공격을 가하는 것이오? 복수요? 심상의 복잡함 때문이요? 그래서 죽였소? 양심이 있소? 혼자서만 잃었소? 누구는 위협을 가만히 받아들이고 죽어야 옳은 게요? 그러면 대체 왜? 대체 왜!! 이대로면 어느쪽이든 파멸로 갈 수밖에 없소!!! 원내의 학생을 몇 죽이는 걸 대가로 자네 주인은 모든 패를 잃어야 만족하오? 현명한 사람 아니오!!! 원내의 사람을 죽여놓고 이만하면 됐다, 저만하면 됐다!!! 경중이 가장 중한 것을 두고 깃털보다 가벼이 여기는 것이 말이 되냔 말이야-!!!"
고작 학생따위가 무엇을 아냐는 말이 나와도 괜찮다. 이미 죽음을 겪었고 위협은 사절이다. 계속 나오면 금지된 마법을 쓰는 수밖에 없다. 아즈카반에 가기 전에 죽어버리면 되는 일이다. 너는 오늘 가면을 써서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니면 분노 때문에 일그러진 얼굴이 보였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군...말도 안 돼. 이딴 상황은 바라지도 않았어. 평범하게 졸업하고 싶었을 뿐인데 그게 대체 무얼 잘못한 것이라고……."
남들을 생각하기에 앞서, 나 역시 생각해야 했었는데. 간신히 신음을 삼킨 채, 스베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그대로 다시 무너진다. 차라리 기절이라도 했으면 좋았을 걸. 그렇다면 이렇게 고통을 느끼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눈물이 뺨을 타고 투둑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 때문에, 시야는 마치 불투명한 유리 판을 끼고 있는 것 같았을까. 잠깐 초점이 또렷해지면 자신의 주변을 돌고 있는 당신과, 절 호명하며 다가오는 선배를 본다. 치유주문을 받자 스베타는 잠시 비틀거리며 낮고 길게 신음하다, 간신히 몸을 일으킨다.
윤이 펠리체의 등을 쓸어내리려 하며 말했습니다. 그는 할미탈에게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습니다. 할미탈은 그런 모습에 속으로 욕을 내뱉었습니다. 지금내가누구때문에이고생을하는데 ' ..... '
그는 지팡이를 휘둘러, 당신들에게 디터니 원액을 전달했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이노리의 분노를 전부 들었습니다.
' 아쉽게도 주인님은 너희가 우리 중 누군가를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예상을 못하신 모양이야. 우리도 마찬가지지. 특히, 이매는 주인님이 특별히 아끼시던 녀석이거든. '
조용히, 낮게 말하던 할미탈은 자신의 머리에 꽂힌 지팡이를 빼냈습니다. 공격할 용도는 아닙니다. 그는 다시금 자신의 머리를 틀어 올려 묶었습니다.
' 주인님은, 타인의 목숨을 아무렇지 않게 여기시거든. 쓸모가 있는 상태에서 죽어버리면, 그것에 분노를 느끼시니까 그 분 입장에서는 이게 벌주기 같은 거겠지. 쓸모 있는 도구가 죽었으니까. 너도 알겠지만, 각시의 애완동물은 인간을 먹고 우리는 너희를 죽일 수 없으니까. 주인님 다운 발상이지. '
주인님 다운 발상, 할미탈이 어깨를 으쓱였습니다.
' 지금은 무슨 생각이신지 나도 모르겠네. 그저, 이 상황을 하나의 유희로 즐기실지도. 애초에 우리도 왜 이 학원을 골랐는지 모르니까. 아무 의미 없이 골랐는지도 모르고. '
할미탈은 거기까지 말하곤 한숨을 작게 내쉬었습니다.
' 그리고 난, 동물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
레오를 동물로 인식한 모양입니다.
' 나도 이 학원 학생들은 제법 마음에 드는데 말이지. 한 번 뿐이지만, 가르치는 재미가 있었고. '
점술 수업을 떠올린 듯 할미탈이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탈을 똑바로 썼습니다.
' 나름 나도 구한다고 구했는데 전부 구하지는 못했네. 그건 미안하게 생각해. 그나마, 각시가 나머지 한 마리도 데리고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되도록이면, 내 쪽에서 너희들을 치지 못하게 막기는 해보지. '
정말로 미안한 건지, 그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았습니다. 할미탈도 사라졌습니다. 조용할 뿐입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다들 고생하셨습니다!!!! 절반을 날렸어요..... 대강 이 정도면., 나름 했다고 생각합니다......(우럭)
한서는 이로하를 기숙사 방에 데려다두고 반지를 손가락에서 빼 옆에 뒀다. 반지는 팔찌와 얇은 은 사슬로 결속 됐는데, 이대로 디터니 원액을 바르면 은이 닿아 상처가 곪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팔찌까지 모조리 빼고나서야 한서는 이로하의 목에 디터니 원액을 바르고 주변의 피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아무리 학교 차원에서 학생을 보호한다고 해도 목에 섹튬셈프라를 쓸 줄은 몰랐다. 분명 아팠겠지! 웃는 모습으로 우는 소리를 낼 때는 몰랐는데,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던 것 같다. 그때는 가주님이 재갈을 채웠다. 혀를 깨물었다고 들었다. 어린 시절에는 부모님을 따라 엉거주춤 비웃기만 했는데 이젠 아니다. 지켜야 할 범주에 있기 때문이다. 한서는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아무 일도 없게 해달라는 기도를 끝마치고 도망치듯 자리를 빠져나오느라 손에 늘 휘감고 다니던 독특한 형태의 반지를 놓고 나온 것도 몰랐다. 한서가 팔찌와 반지가 사라진 것을 알게 된 건 기숙사 방에 돌아온 직후였지만, 이로하가 회복되면 알아서 보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났다. 하지만 팔찌는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혹시 버린건 아닐까 싶어서 쓰레기통 주변을 살폈는데도 없었다. 한서는 초조했다. 어릴 때부터 함께 했던 거라 그만의 부적이었다. 나쁜 것에서 지켜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잘때도 몸에 떼놓지 않았던 것인데! 결국 한서는 패밀리어를 쓰기로 했다. 마침 패밀리어는 물 한사발을 싹 비우고 기분 좋게 발라당 누워있었다. 한서와 눈을 마주치자 슬슬 시선을 피할 정도로 아주 영민하다. 한서는 패밀리어의 이름을 불렀다. "보리야, 이보리."
패밀리어는 이름을 듣자마자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 예감하고 싫다는듯 몸을 이리 틀고 저리 틀어대며 반항했다. 군데군데 불만스러운 소리를 내는 걸 들어보니 확실히 싫은 것 같다. 하지만 한서가 품속에서 커다란 간식을 꺼내자 좋아서 펄쩍 뛰었다. "네가 로하의 기숙사 방에서 내 팔찌를 찾아오면 이걸 줄게. 다녀와. 알겠지? 들키면 안 돼." 하고 당부했다. 들키면 곤란하기 때문이다. 심한 경우에는 도둑으로 몰릴지도 모른다. 내 물건을 찾으러 갔다가 정학이나 퇴학을 당하고 싶지 않았다.
"야, 인마. 이보리. 누가 이런거 물어오래. 응?"
그런데 왜 이렇게 됐지? 한서는 패밀리어의 코에 딱밤을 놓았다. 패밀리어는 불만스럽게 우우 울었다. 다시 돌려놓으라 하기엔 시간이 늦었다. 내일 아침에 몰래 가져다두는 수밖에 없겠다. 한서는 패밀리어를 노려봤다. 하지만 개가 무슨 잘못이 있을까? "에휴, 뭐라도 가져왔다는게 다행이긴 한데."
한서는 약속했던 간식을 입에 물려주며 노트를 손에 쥐었다. 이 안을 절대 열어봐서는 안 될것 같았다. 하지만 이 안에 단서가 있을 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한서는 한참 고민하다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노트를 펼쳤다. 이러고 싶지 않았다. 해서는 안 될 일이지만 석연치 않은 점이 한둘이 아니라 어쩔 수 없었다. 한서는 최근 순혈주의 사상에서 머글과 혼혈을 위하는 개혁파의 편에 서게 됐다. 하지만 그 이유가 속죄와 살해의 위협 때문이었는데, 뭔가 더 있는 것 같았다. 그날 기숙사로 돌아와 잠들었다 깨니 뺨에 피가 묻어있던 것도 그렇고, 이로하가 한서를 때렸던 날, 도저히 기억나지 않는 것은 지웠지만 오블리비아테를 썼다는 기억만은 생생하게 남겼던 것도 있다. 그 의문이 여기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용은 예상과 달랐는데, 이것저것을 잡다하게 적어둔 노트였다.
"닭죽이 나왔다. 맛있었다.. 고양이랑 친해졌다, 노마지 친구가 자기한텐 하악질을 하더니 나는 인간 캣닢이라며 이를 갈았다..뭐야, 안심해도 되겠네. 그냥 내일 가져다 둬야. 이건?"
─ 6월 25일, 수업 출석. 어둠의 마법 방어술 - 에반스 그린폴드 크루시아투스 저주의 역마법을 구상중이다. 시전학 전 미리 통각 자체를 차단하는 방향으로 개발하면 될 것 같다. 이론이 들어맞는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 마법의 역마법을 개발하면 내 통각이 돌아올 지도 모른다. 마법의 비약적인 발전은 동기라는 이름의 연쇄적인 연결고리가 있기에 이루어진다. 여담이지만 도련님을 때렸다. 그때의 일은 기억나지 않는다. 이노리는 화를 내지 않도록 마음을 다스려도 참지 않던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한서는 한장 뒤로 넘겼다.
─ 금지된 숲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문카프를 관찰하고 싶었지만 기회는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또 네 잘못이 아니라는 중얼거림이 들려서 쑥을 피웠다. 고모님은 아무것도 모른다. 알면 또 재갈을 물려서 다 나를 위한 것이라고 할 지도 모른다. 덕분에 친구가 생겼다. 가끔은 이런 상황도 도움이 되는 법이다. 후부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커지는 날이다. 하지만 내 모습을 보면 경멸하겠지. 나는 누군가와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시 한장.
─ 세스트럴을 보여주었다. 과연 그 존재가 부단히 노력하여 보이는 것인가 의문이 든다. 누군가 죽는 걸 봤다는건 좋은 일이 아니니 함구하기로 했다. 가족의 언급을 할 줄 몰랐다. 순수한 무지는 상처가 되어 돌아온다.
또 한장.
─ 백정, 홍마노, 탈로 추정된다. 한서에게 당한 상처를 치료해줌. 주인이라는 언행을 하였음, 단죄를 자처함, 이노리를 닮았음. 무지한 것으로 추정됨. 사탕은 왜 입으로 넘겨주는 거지? 비밀을 유지해주는 대가로 당과점에 가서 케이크 한판, 사탕과 젤리를 사줬다. 이정도면 좋은 거래다. 혜향 교수의 패밀리어로 추정. 나중에 만나면 떠봐야하나?
─ 교수가 탈이 맞았으니 패밀리어는 백정이 맞다. 읽었던 책에서 나온 배신자가 교수가 맞았다. 죽여서는 안 된다. 원내의 흉흉한 사건이나 시선으로 보아 이 교수는 위협을 받을 것이 뻔하다. 지켜야 한다. 조만간 계약을 청해야겠다. 거절한다면 거절할 수 없게 만들면 된다. 나는 졸업해서 후부키로 돌아가야 한다.
대체 왜 후부키에 이렇게 집착하는 거지? 한서는 다음장을 넘겼다.
─ 택영이는 아무것도 모른다. 미안해진다. 나를 보면 경멸할게 뻔하다. 속았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동안 쌓아온 신뢰가 무너지겠지. 괜찮다. 감내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내가 이리 남에게 상처를 주느니 차라리 평생 이노리의 모습으로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니, 나는 이미 이노리다. 그날 이후로 나는 이노리가 되기로 맹세하지 않았나. 여담. 문카프도 후부키의 친화력이 통하는 날임을 깨달음.
문카프가 원내를 뛰어다녔다는데 로하의 짓이었구나 싶어 뒤로 넘긴다.
─ 즐거우면 됐다. 무슨 짓을 하고 어떤 사상을 접해도 그 사람의 선택이다. 파멸할 길을 걷는다면 단 한번 막아서주고 그래도 간다 하면 작별을 고하는게 당연하다. 자연의 순리를 따르라. 날 경멸해도 상관 없다. 죄인에게 무슨 말이 필요할까. 덕분에 들개를 길들였다. 한서가 졸업 이후 온건파를 모조리 몰살하면 관심이 돌아갈 것이다. 그 틈을 타 나는 후부키로 돌아가면 된다. 나는 이씨 가문에 있으면 해만 될 뿐이다.
또 한장. 홀린듯이 한서의 눈과 손이 바삐 움직였다.
─ 위험하다. 원내의 초빙교수로 탈이 들어왔다. 이런 기본적인 위협조차 지키지 못한다.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하루 빨리 기숙사 점수를 올려서 외박을 신청해야한다. 이대로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끝날게 뻔하다. 그 새끼를 찾아야 한다. 찾으면 이노리..나? 모르겠다. 찾아서 뭘 어떻게 해야하지? 죽여야 하나? 하지만 그 사람은 해야할 일을 했을 뿐이다. 발렌타인은 아직도 연락이 없다. 아무래도 시체로 발견된 건 아닌 것 같다. 살아있다면 끝까지 찾아낼 것이다.
아! 그때 점성술 교수가 초빙 교수라고 했는데. 설마. 한서는 다시 뒤로 넘겼다.
─ 내기를 좋아하는 후배. 연인이 있다. 기필코 찾아서 간식을 배불리 먹여줄 것이다. 많은 것을 배웠다. 서로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에 그 안을 전부 헤아릴 수는 없지만 아이를 아끼는 것은 확실하게 알 수 있다. 하지만 아이를 아끼는 것은 이노리에 국한된 것이라 내가 아니니, 이노리의 모습으로나마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 너를 아끼는 사람이 이렇게나 많은데 너는 이미 져버린 꽃이다. 나는 언제까지 살아야 하는 걸까.
그리워 하는 건가? 다시 한장. 이번 장은 휘갈겨 썼다. 일기같지 않고 추측만 난무하는 글에 한서는 아찔함을 느꼈다. 대체 뭘 이렇게 많이 써둔 걸까? 해서는 안 되는 일임에도 계속 한글자씩 읽게 됐다.
─ 윤현성. 현궁의 수치. 사감을 공격 ->아바다 케다브라까지 서슴지 않음. ─ 원내에 탈이 넷? 백정(패밀리어), 중(혜향 교수, 아군?), 윤의 패밀리어, 저번에 출입한 할미탈. 이번에도 계속 온다면 확정. ─ 윤의 패밀리어로 변신하고 있던 크루시오를 맞았음. 고통이 느껴져서 이후 섹튬셈프라로 실험한 결과 여전함. 크루시오에 국한된 것으로 추정. 역마법을 개발해서 빨리 내 통증을 되찾아야 함.
"말도 안 돼...그때 섹튬셈프라를 목에 썼던 이유가 고작 통각을 확인하기 위해서였다고..?"
한서는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다시 내용에 집중한다. 왜 통증을 되찾으려 하는걸까 하는 의문을 뒤로 한다. 지금은 내용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 대치 끝, 이매의 자살. -> 시체가 환히 웃었던걸 보니 본인이 행복할 선택을 한 것 같음. 좋은 일, 본받을 것. 사인은 경추 골절로 인한 즉사로 추정. 목을 잡아 뜯던 순간 골절된 것일 가능성 높음. 과다출혈 가능성 없음. 주양의 기도 이후로 자살, 신? 무슨 사이? 신관? ─ 매구는 대체 무슨 목적으로 원내를 공격하는가? -> 백정을 원내에 들여보낸 이유는? 중에 대한 것을 모르나? 알고도 받아준 것인가? 어느쪽이든 석연치 않음. 원내에 무언가 있거나 불만이 있는 것이 분명함.
신관이니 뭐니 하는 글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저 읽으면 단서가 나오지 않을까.
윤 -> 의심. 지금까지 들어온 소문과 본것을 종합하면 탈끼리의 사이는 그렇게 좋지 않음. 당장 이매라고 불렸던 윤의 패밀리어와 현성만 봐도 서로 친해보이진 않았음 그런데 왜 집착하는 거지? 양반이라 불렸다는 탈도 윤에게서 손 떼라는 말을 했다고 학생 사이에서 말이 나돔. 수상함. 그때 현성의 공격에 윤도 괴로워 했다고 말했음. -> 내가 모습이 변했을 때 임페리오에 맞았는데도 사감은 전부 신경 X? 탈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건 맞는 것 같지만 사감까지 불신할 정도의 인물? 아니면 상황이 상황이었나? 윤조차 탈이라면 원내에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된다. 내부자가 가장 깊이 있다는 것은 좋은 의미가 아니다. 죽거나 죽이는 건 누군가의 선택이라 넘겨야 하지만 내 행복도 위해야 할 때가 있는 법이다. 윤과 탈이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같다.
한서는 헉 소리를 내며 고개를 쭉 빼들어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기숙사 방 안이라 누군가에게 들킬 상황은 아니지만 불안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큰 비밀을 알아도 되는 건가 싶었다. 사실 누구나 이런 의심은 가지고 있었다. 지난번에 윤이 현성이 공격받자 같이 고통스러워 했다는 것도 그렇고, 이상한 소문도 낟돌았다. 학생이 이렇게 의심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 이로하마저 이렇게 의심을 한다는 건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한서가 아는 이로하는 늘 덤덤하고 차분하면서, 의심 한치 없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한서는 마법으로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렸다.
─ 두렵다. 나는 언제까지 불안을 안고 살아야 하는 걸까. 이대로라면 죽을 지도 모른다. 새삼 후부키로 돌아가려면 무슨 일이라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 후회가 된다. 차라리 죽는게 더 나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올까봐 두렵다. 더이상 네가 없는 삶은 의미가 없는걸 불현듯 깨닫기도 했다. 내가 후부키로 돌아가면 뭐가 달라지지? 내가 네 삶을 살고 있는데 내가 돌아가서 내 삶을 제대로 살 수나 있을까? 모르겠다.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네 곁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차라리 내가 대신 죽었어야 했는데… 아니다. 그랬다간 너도 나와 같이 수백번의 선행을 하더라도 한번의 악행이 평생이 남을 것이다. 너는 여린 사람이니 내가 대신 이 죄의 값을 다 이고 가야하지 않겠는가. 차라리 악인이 되는게 좋겠다. 미안해, 이노리. 내가 이런 사람이라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어. 우리가 행복하려면, 자연보다 더 잔인한 이곳에서 살아남으려면 이 방법 뿐이야. 내가 여기서 강하게 살아남을게. 그리고 그새끼를 꼭 찾아서 네 복수를 해줄게. 금지된 마법을 쓰는 한이 있더라도 내가 반드시 복수할게.
한서는 마른 침을 삼키며 다음 장을 넘겼다. 노트가 손에서 힘없이 떨어졌다. 한서는 입을 틀어막고 시선을 이리저리 굴리고는 공포에 젖었다.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 이걸 찾는다면 다 읽으신 것이 분명하지요. 함구하십시오. 그리고 다시는 제 눈에 띄지 마십시오.
반절 남은 자리를 파내고 그 속에 팔찌와 반지가 담겨있다. 패밀리어의 모습이던 이로하가 어느새 곁에 다가와 뒤에서 한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귓가에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