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상반되고 때론 상호적인, 포식자의 입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늑대에 대한 사전조사는 필수였다. 동등하게 바라본대도 가질 수 있는 건 기껏해야 피소유권이 전부인 양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양 자체가 일종의 감정 억제제가 될 수 있는 요소를 이용해야 했으니까, 라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모두가 알지만 회피하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니. 뺨에 닿는 손의 감촉에 눈을 감으며 손바닥 안쪽에 부드럽게 뺨을 비볐다가 다시 바로 마주한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는데 누군가의 피소유자가 되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쁘지 않지. 그런데... 현재 너만 볼 수 있는 곳에 자국이 남는 걸론 안될까?"
너만이 아니라 나도 볼 수 있겠지. 나 혼자 있을 때 그걸 볼 때마다 너를 생각할 거야. 감언이설이라 하던가, 듣기엔 좋은 말을 뱉으며 소유욕 깃든 성음을 음미한다. 듣는 것만으로도 태초의 고독이 해소되는 것 같은 느낌에 참을 수 없었다. 그럼, 당연히 안아도 되지. 정다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외로움으로부터의 해방이 목전에 있는 것 같아 바로 일어나 벤치에 앉아 있는 네 앞에 마주 서 몸을 살짝 굽히고 네 목에 팔을 감았다.
폭렬하는 본능의 수치가 페로몬화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지금 시각화된다면 스며나오다 못해 왕비가 양딸을 해하려 사과에 묻힌 독처럼 표면을 타고 흘러내릴 터다. 해인아, 네 재능을 질투해. 동시에 네가 필요해. 자세가 고정되면 뒤늦게 입을 연다.
"누군가를 목줄을 걸고 싶거나, 목줄에 걸리고 싶으면 훨씬 많은 걸 줘야 할 거야."
그건 일개 기질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큰 리스크일 거야. 네 재능은 쓰지 않기엔 굉장히 유용하고 나로선 그 재능을 이용하고 싶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 테니까.
천천히 생각해봐. 확인시키듯 읊조리며 아까 전보다 가라앉아 보이는 보랏빛 머리칼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오늘은 사하가 부실을 청소하는 날이다. 그래서 많이 귀찮았고, 조금은 슬펐다. <명색이 고3인데 청소 하나를 안 빼주네.> 공부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괜히 시간 아까운 척 중얼거린다. 그냥 귀찮은 거다. 의욕없이 걸어가 의욕없이 부실 문을 열었다.
…이상하네. 우렁각시가 왔다가 갔나?
기분 탓인가. 굳이 청소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부실을 쓴 사람이 양심적이다 못해 도덕성이 하늘을 뚫었던 걸까? 사하의 눈썹이 가파르게 꺾인다.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데. 의문은 쉽게 풀렸다. 세 번만에 익숙해진 필체와 말투. 뽀송한 이불이다. 가방을 뒤적거려 포스트잇을 꺼낸다. 필기용은 아니고, 마니또에게 답을 보내기 위해 며칠 전에 샀다. 검정 볼펜으로 한 글자씩 또박또박 글씨를 적어나갔다.
<뽀송아, 넌 짱이야.>
어디에 나타날지 몰라 부실 책상에 하나, 다음 날 교실 책상에 하나 붙였다. 다정한 간섭에 절로 웃음이 샜다.
그가 톡을 보내도 그녀는 답이 없었다. 원래도 목적은 일부러 안읽씹을 하는 것이었겠지만...
몰래 그의 집 붙박이장 안에 숨어들었다가 들어올 때쯔음 놀래켜주려는 상황이었을까?
하지만 너무 일찍 와서인지 그가 오는데엔 생각보다 시간이 걸렸고, 설상가상으로 개어놓은 이불이 너무나도 포근했기에 그대로 고로롱하고 잠이 들어버렸다 볼수 있었다. 덕분에 요리를 하는데에 훈수를 두진 않게 되었으니 그에겐 다행이었을 수도 있지만... 아마도 다른 차원의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가령, 그가 고민하다가 제대로 카레를 완성하고 다시금 답장이 있었는지 확인할무렵...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붙박이장이 밀리듯 열리며 무언가 검고 분홍색인 커다란 것이 굴러떨어진다던가 말이다.
더욱이 고양이같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으..."
머리를 감싸쥐며 주변을 둘러보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무렵, 빠르게 시선을 굴려 주변 스캔을 마친 그녀가 태연하게 말을 걸어왔다.
한적한 시골에서 농사나 짓고 사는 삶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곳은 사람들의 주목도 적을테고 혼자서, 혹여 가족을 이뤘다면 가족끼리 단촐하게 지낼 수 있을테니까. 근데 요즘 땅값도 비싸다는데 민규가 준 땅을 받아서 팔면 ... 이라는 상상을 혼자서 해본다.
" 그나마 수학을 제일 잘하니까. "
말을 잘하는 것과 언어라는 과목을 잘하는 것은 별개의 영역이었다. 수학은 A 이면 B 라는 명확한 대답이 나오니까 공부하는 맛도 있었지만 언어는 그렇지 않았고. 그리고 최대한 내가 가진 재능을 이용하지 않는 영역으로 진로를 정하고 싶었다. 그게 마음대로 안될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야.
" 학생회실로 가자. 점심시간 끝나려면 시간이 좀 남았고 거기엔 찬물도 있으니까. "
사적인 용도로 사용하기엔 좀 마음이 찔리긴 했지만 뭐라고 할 사람도 없으니까. 다행히도 근처에 학생회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민규를 데리고 학생회실의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에어컨을 틀고서 정수기에서 찬물을 떠다 민규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 그럼 너는 귀농하는거야? 졸업하면 농사 지으러? "
지금은 운동을 하고 있는데, 운동에 대한 재능이 아깝지 않을까 싶었지만 곧 '진짜' 재능을 가진 이들이 운동계에도 포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굳이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나도 어쨌든 그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니까.
홍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오자 당황하였다. 분명 본인이 조금 늦게까지 있긴 했지만 분명히 슬슬 해가 노을로 변하는 시간대에 불을 끄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보통 이렇게 불가능한 미스터리에는 진정하고 곰곰이 생각해야 효과가 있겠지만 홍현은 불안함에 진정이 전혀 되질 않았다.
"그.. 그건 제가 한 게 아닌데요.. 잠깐만요..."
홍현은 급하게 책상 위에 놓여있던 강장제를 따더니 어린이용 감기약에서 볼 것 같은 플라스틱 계량컵을 꺼내 따르고 빠르게 들이켰다. 지금이 딱 필요한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너무 남용하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강장제를 마신 홍현은 진정이 되자 한숨을 쉬고 애써 조금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아마 여기 안에 있는 물건들 중 하나에서 빛이 나서 그런 걸 거예요.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아까 제가 마신 건 그냥 제가 직접 만든 딸기맛 강장제에요..! 위험한 건 아니고, 혹시 드셔보시겠다면 드셔도 돼요..!"
요리를 하는 내내 기대했던 폰으로부터의 알람은 없고, 듣지 못했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폰을 확인해도 여전히 답장은 없었다. 답장이 없는 정도인가, 들어가보니 [1]도 지워지지 않은 상태이지 않은가. 이건 중대한 문제다. 물론 보내자마자 읽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요리할 시간정도면 읽지 않을까, 답장을 주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던 것이었다.
"하아."
주원은 멍하니 슬혜와의 톡을 켜둔채로 한쪽 손으론 카레를 젓고 있었다. 원래 요리를 할 땐 딴생각을 하거나 딴짓을 해선 안 되지만, 오늘정도는 방황하는 남학생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않겠는가. 그리고 운 좋게도, 카레도 타지 않고 더 저어야 했기에 결과적으로 문제가 되진 않았다.
"됐어. 나 혼자 먹지 뭐. 쳇."
어느정도 카레를 저어갈즈음, 갑자기 무너져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붙방이장이 열리며 무언가 굴러 떨어지는게 아니던가!
"으아아아아아악!"
주원은 너무나도 갑작스런 상황에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어버리고 말았다. 안심하시라, 카레는 멀쩡하니. '뭐지? 귀, 귀신? 아니 아직 한낮이잖아! 그럼 도둑? 제발 귀신이나 괴물만 아니길!'하고, 이 나이가 되도록 비과학적인 것들을 믿는 주원은 떨어져 내린것이 무려 도둑이기를 바라고 있던 것이었다.
불행이라고 해야할지, 다행이라고 해야할지. 떨어져 내린것은.... 검분홍색의 큰, 아주 큰 '고양이'였다.
"..."
그것은, 아니 그녀는 고양이가 놀랄 때와 같은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떨어져 머리를 감싸고 주변을 둘러보다 그만 주원과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그녀는 태연하게 주원에게 물어왔다. 카레가 다 되었냐고.
언젠가 둘이 함께 들었던 탁장시계의 초침 지나가는 소리. 바깥에서 부우우우웅하고 차가 지나가는 소리. 그리고 꼬마들이 서로 장난치며 외치는 소리. 그리고... 보글보글 카레 끟는 소리. 몇가지 소리가 지나간 후,
"........."
주원은 대답 없이 일어나 카레의 불을 끄고 카레를 몇 번 저어보았다. 다행이 타지는 않았다. 오히려 아주 적절한 시간에 불을 끈 것이 된 것이었다. 이것을 고양이의 도움이라고 하던가? 아무튼. 불을 끈 주원은 고개를 숙인채 털벅턱벅 그녀에게 다가가
"네가 왜 거기서 나오는건데!!!!"
하고 잔뜩 찡그린 얼굴로 말하며 그녀의 양 볼을 아프지 않게, 하지만 볼의 감촉의 확실히 느껴지게끔 꼬집으려 했다.
일반적으로 늑대와 양은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로 양은 늑대를 마주치면 무조건 잡아먹히는 수 밖에 없다. 허나 늑대와 양이 인간 정도의 지능을 가지게 된다면 서로가 서로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할 것이지. 특히나 피식자인 양은 늑대에 대해서 정말 많은 공부를 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백가예라는 양은 늑대 앞에서도 저렇게 당당할 수 있는게 아닐까. 뺨에 닿은 손에 그녀가 볼을 부비는 것을 느끼며 답했다.
" 오늘은 그렇게 할까 그러면? "
어차피 밖에 훤히 드러나는데 자국을 남길 생각도 없었다. 밴드를 붙인다고 하더라도 위치를 보면 요즘 애들은 그걸 뭘 가렸는지 잘 알테니까. 그런 소문이 도는걸 나는 원치 않았고 가예도 원치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목에 손을 감으며 안아오자 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등허리를 감싸안는다. 자세가 불편할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녀는 금세 자세를 잘 잡는듯 했고 그와 동시에 유혹과도 같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 목줄에 걸리는 입장에서도 많은걸 주는건 불공평한데? "
내가 널 목줄에 건다면 모를까 말이야. 고개를 어깨에 파묻은 상태로 그녀에게 얘기한다. 하지만 나는 널 목줄에 걸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렇게 되도록 가만히 있을 여자가 아니니까. 차라리 나를 목줄에 걸었으면 걸었지. 그리고 지금 나는 그녀의에 내 목줄의 끄트머리를 쥐게 해주고 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이젠 심적으로 지쳐가고 있었으니까.
'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
누군가에게 이용 당하는 삶은 더이상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내가 재능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하면 할수록 모여드는 승냥이 같은 존재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얼마전에도 편의점에 사람들이 왔다갔으니까. 그럴 생각 없다고하며 돌려보냈지만 그런 일이 생기면 생길수록 지치는건 나였다.
" 너가 오롯이 내것이 된다면 생각해볼께. "
그럼에도 늑대의 소유욕은 가라앉을줄 몰라서 이런 행위로 부정이 사라지고 있는 가운데서도 꼿꼿이 고개를 치켜들고서 나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양을 갖고, 먹어치우라고.
" 오늘은 안가는 날이야. 그러니까 너랑 이렇게 같이 있을 수 있겠지? "
숨을 깊게 들이마신다. 흡사 숲속에 있는듯한 착각이 들 정도의 진한 페로몬의 향이 코를 찌른다.
머리랑 옷이 흐트러진건 딱히 상관 없었다. 갈아입은 옷도 짧은 바지였기에 스커트가 뒤집힌다거나 하는 대참사도 없었다. 우선 제 굴러떨어졌던 곳이 내심 신경쓰였는지 그쪽을 올려다보았지만 다행히도 이불에 자신이 웅크려있던 자국만 좀 크게 남았을뿐 어디가 망가지거나 하진 않았다는 것이다.
놀란건 그 역시 마찬가지였는지 뒤로 넘어져 주저앉은 모양새였는데 한동안 그렇게 정적이 흘렀고, 째깍거리는 초침의 소리, 주변을 스치는 차의 배기음, 그 뒤를 따르는듯한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웃음, 스토브 위의 카레가 끓어오르는 소리가 지나갈즈음이 되어서야 그가 아무 말도 없이 일어나 불을 끄고는 카레를 몇번 저어보았다. 혀를 찬다거나 하는 것도 없는걸 보면 늘러붙은곳 없이 잘 된거 같지만-그전에 그녀가 냄새를 맡아보아도 그런 느낌은 나지 않았지만- 고개를 숙인채 수상할 정도로 터벅거리며 오는 그에게 느껴지는 아우라 때문인지 그녀는 잔뜩 움츠러들었다.
이윽고 들려오는 커다란 소리와 잔뜩 찡그린 얼굴, 심지어 자신의 양쪽 뺨에 쇄도하는 꼬집기 행렬에 저도 모르게 새된 비명을 지르며 머리 위로 X표시를 만들어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