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방금 해인의 말은 조금 의외였을지도 모른다. 뭔가, 굉장한 야망이 있을 것 같은 이미지였는데 말이지. 조금 지친 걸까? 아니, 그냥 내가 성격을 지나치게 지레짐작한 걸 지도. 그래도, 자기가 뭘 하고 싶은지 알고 있는 사람은 싫지 않다. 오히려 좋아하는 편에 가까웠다.
"나중에 심심해지면 귀농하러 내려와."
복숭아 과수원 한 켠 정도는 떼줄게, 장난스레 덧붙였다.
"경제랑 통계라.. 둘 다 어울리는데. 수학 좋아하나봐, 응."
해인이 말을 잘 했던 걸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를 수도 있는 법이다. 그리고, 그 중 무엇을 선택하느냐 또한 개인의 몫이지.
"힘이라도 세야지."
해인의 어깨를 수고했다며 두들겨주려 했다. 땀이 조금씩 삐질삐질 배어나왔다. 덥다, 중얼거렸다.
이번엔... 정체불명의 큐브가 자리에 놓여있었다. 마치 우주를 담아놓은듯한 기묘한 상자, 그리고 함께 있던 쪽지엔 <저번에는 너무 무례한 말을 써놓은것 같아 사과드립니다. 이번에는 재미있는 선물로 준비해봤습니다. 좋아해주시려나요?> ...라고 써있었을까?
"딱히 무례한거 같진 않았지만요..."
그것보단 다소 엉뚱한 사람인것 같다, 정도의 생각을 했을까? 몽환적인 상자를 열자 그 안에 또 상자, 그리고 또 안에 다른 상자, 그러곤 진짜 상자 안에는 사탕 속에 파묻혀있는 고양이 마트료시카가 있었다. 대체 얼마나 마트료시카를 좋아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어떻게 보면 까도 까도 똑같은 자신을 닮은듯해 좀 재미있었을까? 마트료시카를 싫어하지도 않을뿐더러 사탕 역시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이건 오히려 분에 넘치는 장난감이 아닐까 싶었다.
<딱히 불쾌하게 생각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재치있는 발언이다 생각했지만요~ 그러니 사과하실 필요 없답니다! 이번에 주신 것도 꽤 마음에 들었어요! 그냥 받는건 좀 그런것 같아서 저도 나름대로의 성의를 표시하도록 할게요~> 라는 쪽지와 함께 있을리 없는 엄지를 치켜올리는 하얀 고양이 스티커와 설탕범벅으로 유명한 모 도넛 회사의 베이직 세트를 답례로 놓아두었다.
...이전에 도넛을 주었던 사람에게 도넛으로 받아치는건 조금 그러나? 하지만 그녀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칠것 같진 않았다.
[오늘 카레 만들건데 먹을래?] [올거면 연락해.] 슬혜에게 톡을 보내둔 뒤 적당한 시간이 흐르자 주원은 "읏샤."하고 일어서서 남색 앞치마를 입고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만들기로 한 것은 바몬드 카레. 카레는 만들기도 쉽고 왠만해선 맛을 실패하지 않으니 말이다. 양을 조절하지 못하는게 아니면. 먼저 감자, 당근, 양파,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싹둘썰기 한다. 주원이 칼이나 날붙이를 다루는 것은 요리보단 무언가를 만들때긴 하지만, 그만큼 익숙해져 있다보니 재료를 써는 것도 능숙했다. 균등한 크기로 잘린 감자, 당근, 고기를 먼저 넣고 볶은 뒤 고기가 반쯤 익었을 때쯤 양파를 넣고 마저 볶는다.
"이대로 밥 비벼먹어도 맛있긴 하겠다."
카레를 포기하고 밥을 함께 볶을까 하는 유혹이 드는 냄새. 그러나 카레를 만든다고 했는데 왠 고기야채 볶음이 되어있으면 그건 이상하지 않겠나. 주원은 그 유혹을 억누르며 나무 뒤집개로 재료들을 볶았다. 양파가 투명해질 즈음 4인분 정도의 물을 넣고 카레를 꺼낸다. 마침 카레는 1인분이 하나의 블록으로 되어있어 구분하기 쉽다. 4개의 카레 블록을 잘라 넣고 뒤집개로 천천히 젓기 시작했다.
"원래 이렇게 묽은가? 양이 틀린건 아니겠지?"
의심이 들 정도의 묽은 색이었지만 어느정도 볶고 있다보니 카레의 색이 점점 진해지며 카레의 식욕을 자극하는 냄새가 방을 채웠다. 묽은 색에서 어느정도 붉기를 띄우자 주원은 인터넷에서 본대로 꿀을 한 스푼 넣은 뒤 다시 카레를 젓기 시작했다.
양과 상반되고 때론 상호적인, 포식자의 입장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늑대에 대한 사전조사는 필수였다. 동등하게 바라본대도 가질 수 있는 건 기껏해야 피소유권이 전부인 양이 우위를 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양 자체가 일종의 감정 억제제가 될 수 있는 요소를 이용해야 했으니까, 라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어쩌면 모두가 알지만 회피하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이니. 뺨에 닿는 손의 감촉에 눈을 감으며 손바닥 안쪽에 부드럽게 뺨을 비볐다가 다시 바로 마주한다.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왔는데 누군가의 피소유자가 되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나쁘지 않지. 그런데... 현재 너만 볼 수 있는 곳에 자국이 남는 걸론 안될까?"
너만이 아니라 나도 볼 수 있겠지. 나 혼자 있을 때 그걸 볼 때마다 너를 생각할 거야. 감언이설이라 하던가, 듣기엔 좋은 말을 뱉으며 소유욕 깃든 성음을 음미한다. 듣는 것만으로도 태초의 고독이 해소되는 것 같은 느낌에 참을 수 없었다. 그럼, 당연히 안아도 되지. 정다운 목소리로 대답하며 외로움으로부터의 해방이 목전에 있는 것 같아 바로 일어나 벤치에 앉아 있는 네 앞에 마주 서 몸을 살짝 굽히고 네 목에 팔을 감았다.
폭렬하는 본능의 수치가 페로몬화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지금 시각화된다면 스며나오다 못해 왕비가 양딸을 해하려 사과에 묻힌 독처럼 표면을 타고 흘러내릴 터다. 해인아, 네 재능을 질투해. 동시에 네가 필요해. 자세가 고정되면 뒤늦게 입을 연다.
"누군가를 목줄을 걸고 싶거나, 목줄에 걸리고 싶으면 훨씬 많은 걸 줘야 할 거야."
그건 일개 기질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라면 큰 리스크일 거야. 네 재능은 쓰지 않기엔 굉장히 유용하고 나로선 그 재능을 이용하고 싶다는 유혹에서 벗어나기 힘들 테니까.
천천히 생각해봐. 확인시키듯 읊조리며 아까 전보다 가라앉아 보이는 보랏빛 머리칼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오늘은 사하가 부실을 청소하는 날이다. 그래서 많이 귀찮았고, 조금은 슬펐다. <명색이 고3인데 청소 하나를 안 빼주네.> 공부 열심히 하지도 않으면서 괜히 시간 아까운 척 중얼거린다. 그냥 귀찮은 거다. 의욕없이 걸어가 의욕없이 부실 문을 열었다.
…이상하네. 우렁각시가 왔다가 갔나?
기분 탓인가. 굳이 청소할 필요가 없는 것 같다. 마지막으로 부실을 쓴 사람이 양심적이다 못해 도덕성이 하늘을 뚫었던 걸까? 사하의 눈썹이 가파르게 꺾인다. 딱히 생각나는 사람이 없는데. 의문은 쉽게 풀렸다. 세 번만에 익숙해진 필체와 말투. 뽀송한 이불이다. 가방을 뒤적거려 포스트잇을 꺼낸다. 필기용은 아니고, 마니또에게 답을 보내기 위해 며칠 전에 샀다. 검정 볼펜으로 한 글자씩 또박또박 글씨를 적어나갔다.
<뽀송아, 넌 짱이야.>
어디에 나타날지 몰라 부실 책상에 하나, 다음 날 교실 책상에 하나 붙였다. 다정한 간섭에 절로 웃음이 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