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물려서 안달이었던 적이 있나? 생각해본다. 외롭기야 했다. 어쩔 수 없다. 양이잖아. 옆에 누가 있으면 좋다.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면 더 그랬다. 그럼 그 물물교환인지, 거래인지 하는 걸 할 수 있으니까. 꼭 허기가 아니더라도 외로움과 바꿀만한 건 많았다. 사하는 꽤 오래 걸린 끝에 결론을 도출한다. <은사하는 못 물려 안달나지 않았다.> …그럼 뭐지? 슬프게도 거기까진 생각해본 적 없다. 그래도 일단 반박은 해야 할 것 같아서 입을 연다.
"…그런 건 아닌데."
은근히 눈치보며 말했다. 적절한 타이밍은 이미 지난 것 같지만. 귀찮다는 시선은 그럭저럭 버틸만 했어도 미움받는 건 싫었다. 근데 지금 보이는 건 지구의 뒤통수뿐이라,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짐작가는 건 딱히 밝은 표정은 아닐 거라는 것. <너 머리 엉망이다.> 티끌 만큼의 도움이라도 될까 싶어 말해본다. 도움되면 좋잖아. 어쩌면 마음이 좀 너그러워질지도 모르지.
"이유를 만들어주니까 할 말이 없네."
역시 논리정연한 말엔 이길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이겨먹을 생각도 없었다. <네, 바보가 잘못했습니다.> 말하며 허공에 대고 꾸벅꾸벅 고개 숙인다. 목적지가 양호실이라는 말에는 안심 반, 실망 반인 복잡한 표정을 했다. 귀찮은 일 생기는 거 막으려면 지금 가야 하는 거 아는데, 달콤한 땡땡이가 끝났다고 생각하니 아쉬웠다. 그래도 경중을 따지면 땡땡이보다는 양호실이다. 고분고분하게 따라간다.
안 따라갈 생각은 한 적도 없는데 어쩌다보니 질질 끌려가는 것처럼 됐다. 양호실까지 가는 길은 멀고도 험하구나. 계단을 내려가며 보이는 창문에 족족 눈길을 주며 생각했다. 날이 이렇게 좋은데 양호실이나 가고 있다니. 간 김에 잠이나 잘까. 잔머리가 여정을 떠난다. 멀리 가지는 못 했다. 지구가 던진 말이 앞을 막아서서. 사하가 다시 고민에 빠진다.
"안 주우면 되잖아."
고민치고 대답이 빨랐다. 어처구니 없는 대답을 내놓고선 뭐가 잘못됐냐는 듯 눈만 깜빡인다. 머릿속에선 어린 남매가 빵 조각을 떨어뜨리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 둘은 마녀의 집에서 나올 수 있을까?
아니, 그건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부분에 불과했다. 사람은 결국 자신의 외로움을 채워줄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라는 감정으로 승화해 스스로를 채워나간다.
돈을 사랑하는 이는 돈을 모으는 것으로 외로움을 채우고, 명예를 사랑하는 이는 수많은 업적으로 외로움을 채우고, 지식을 사랑하는 이는 모든 분야의 최고가 되어 외로움을 채우고, 인맥을 사랑하는 이는 다양한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으로 외로움을 채워간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야.
결국 사람은 가장 중요한 것을 원하게 된다. 일시적인 여흥이 아닌 진정한 안식처를, 나중에 자신이 스러져 일어나지 못해도 편안하게 잠들수 있는 기댈곳을 원하게 된다.
그래... 무릇 살아있는 것의 궁극적인 목표는 결국, 대를 남기는 것이라곤 하니까. 간혹 이를 포기하고 스스로 <탈락된 자>라 일컫는 사람도 있지만 그런 이들에게도 최소한의 본능은 남아있는 법이었다. 그리고 그게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이 세계이자 무대에 존재하는 양과 늑대인 것이다.
그말인즉슨, 나 역시 어딘가에 최소한의 본능은 남아있을 것이다. 다만 그 모든 것이 희뿌옇게 바래서, 언제부터 그랬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옅어져서 느낄수 없을 뿐이다.
가령 이전의 극에서 예를 들어본다면 나에게 손이 내쳐진 이, 지금 되돌아와 생각해보면 이 경우에 어느정도 들어맞을 것이다.
지루함에 먼저 객석을 떠날 이들을 위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아이는 나를 좋아했었다. 단순히 좋아한게 아닌, 연애의 감정으로 좋아했었다.
...... 사실 확실하지 않아. 고백을 받았어도 난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고, 지금은 그 아이가 완전히 나를 잊었는지도 알 수 없다.
다만 이젠 알수 없기에, 과거형으로 결론지은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난 그 아이를 사랑할 수 없었으니까, 사랑한다는 연기를 할 수는 있어도, 그것은 내 진심이 아니니까. 진심이 담기지 않은 사랑은 할 수 없었고 그 아이 또한 그런것을 싫어했다.
그럼에도 그 아이는 계속 갈구하고 있었다. 맡을 수 있을 리 없는 페로몬이 아닌 순수한 나의 체취를 쫒고 있었고, 흔해빠진 말이어도 좋으니 거짓없이 말하길 바라고 있었다.
양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 또한 본능적으로 그런 공허함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채운다 한들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 아이가 겪고있는 감정의 소용돌이, 그 아이가 품고 있는 감정의 씨앗을... 난 전혀 받아들일 수 없었어.
두근거린다는 것은 뭘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뭘까?
사람은 어떤 이유로 그걸 갈구하는 걸까? 정말 본능에 이끌리지 않은 욕망도 존재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그 욕망의 끝은 무엇을 향하고 있을까?
나에게도 그런 감정이 남아있을까?
......
나도 모르겠어. 오로지 붕 뜬 기억만 남았다. 받아들이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다른 문제였기에, 몸은 움직이는대로 따랐지만 머리는 냉소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결국, 언제나처럼 난 그 아이를 쳐냈다. 나와는 맞지 않을 것이라고, 밝게 빛나는 색을 가진만큼 양지에서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이대로 계속 반복된다면 상처받는 건 그쪽이 될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한결같았다.
그렇기에 난 조금씩 그 아이가 싫어할만한 행동을 해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트집을 잡았고, 멋대로 행동했고, 억지를 세우며 괴롭히기도 했다.
그리고, 나로선 하지 않을만한 행동까지... 그때서야 그 아이는 내 말을 알아들었는지 서서히 멀어져갔다.
좀 멀리 돌아와 오래걸리긴 했지만 이걸로 되었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니 더이상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때때로, 자신의 분수를 알아야 하는 법이 있었다. 분에 넘치는 결과는 언제나 화를 불렀다. 그렇기에 나는 이해하지 못할 것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그게 사회에서 손가락질 당하지 않을 현명한 방법이기도 했다. 나와 엮여 화를 보는 것보단, 서로 떨어져 안정적인 미래를 보는 것이 더 좋은 일이었다. 그걸로 그 아이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수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 아이는 잘 살고 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모든 것은 내 분수에 맞는 일이었다.
쪽지와 함께 전해진 영상을 튼 시아의 입가에는 금방 미소가 머금어져 있었다. 분명 제일 좋아하는 곡을 추천해준 것이 분명했다. 저번에는 곰돌이 젤리, 이번에는 리듬 좋은 음악. 누구일지 감도 잡히지 않지만 자신을 생각해주는 것이 제대로 느껴져서 마음 한켠이 따스해지는 것만 같았다.
" 덕분에 재생목록에 한곡이 더 추가되었네.. 정말 누굴까.."
시아는 콧노래를 부르며 그 음을 따라한다. 그렇게하면 정체 모를 마니또의 기분을 알게 되어 조금이라도 그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 있을 것만 같은지.
주원을 뒤따라 터벅터벅 걸음을 내딛었다. 웃음기 서린 인상에 더붙어, 속을 알수 없는 눈웃음을 지어보였다. 정말로 들을 필요도 없는 얘기지만, 만약 주원이 귀 기울여 뒤에서 쫑알대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면 시험을 잘 본줄 알았는데 그닥 못 본것부터 자신의 저녁 메뉴 (역 앞 회전초밥집) 까지 전부 알수 있을거다. 그 와중에 사회와 거릴 두는 건지, 쑥스러운 건진 몰라도 주원과 1 미터 쯤 떨어져서 재잘대고 있다.
홀로 내적친밀감을 쌓아올리던 그는 주원이 부실 안으로 들어가자 잠시 머뭇거렸다. 다른 부원이 있을려나, 조심히 부실 안으로 눈길을 돌렸다. 속삭이는 듯한 혼잣말로 "저 낮가리는데." 라며 방을 둘러보자, 쇼를 했던게 무색하게도 아무도 없었다. "실례하겠슴다-" 말 끝을 늘어뜨리곤 조심히 들어와 부실을 흩어보았다. 학교에 살림을 차린듯한 동아리방이 꽤나 아늑해보여 마음에 들었는지, 애꿎은 소파를 만지작거렸다.
"여긴 뭐하는 데에요? 신입 받으실 의향 있으신가요?"
"저 재롱 잘 부려서 심심하진 않으실텐데. 코로 사이다 마실수도 있고." 반쯤 혼잣말인 자기어필을 하곤 캐비넷을 뒤적이는 주원 쪽을 쳐다봤다. 별의 별게 다 나온다고 생각하곤, 어색하게 서 있기를 계속한다. 주원과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서 어정쩡 서 있자니 뼈대 대신 이라고 추정되는 나무 두 개와 작은 톱을 받았다. 뭐하는 동아리길레 톱이 있을까, 잠시 의문을 가졌다 주원을 살짝 올려다 보았다. 아, 자신보다 키 큰 사람을 보니 자존심이 조금 상했나보다. 난.. 언제... 180을 넘을가... 영혼이 빠져나간다..
"네, 조심할게요."
책상 위에 나무를 놓곤 톱질을 어영부영 해 보았다. 애초에 손재주가 좋은 편도 아니니, 설렁설렁 해서 대충 맞기만 하면 장땡이라는 심정이였다. 그리하여 나온 결과물은 으스러져버린 나무 막대와 당혹감 뿐이었다.
"선배 피카츄에요? 이거 갖고 저걸 어떻게 만들었대?"
말하려 한건 피카소였다만, 당황했는지 말이 헛나온 모양이다. 주원이 만든 연을 가르키며 툴툴댄다. "저 그냥 비행기나 접어서 날릴까요? 예전에 누가 그랬다가 된통 혼났단 소문 있었지만. 역사는 반복되는 거잖아요." 포기가 빠른 걸까, 아니면 의식의 흐름대로 말 하는 거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