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규는 편지를 여러 차례 되읽었다.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했어.' 삐뚤한 글씨를 두세번 곱씹듯 읽었다. 집에 가져갈까, 조용히 중얼거렸다. 누군지는 알지 못해도, 최민규는 이 마니또가 퍽 배려있는 편이라 생각했다. 무난한 간식들이다. 가장 대중적인, 학생들이 가장 좋아할 법한. 정말로 '뭘 좋아할지 몰라 다 준비한' 느낌이었다.
아니, 집에 가져가지 않는 편이 낫겠다. 최민규는 다른 학교에 다니는, 두 살 터울의 동생을 떠올렸다. 분명 털릴 게 분명하다.
조심스레 초코우유를 뜯어 마시고, 그 다음엔 마들렌, 그 다음엔 오리젤리. 그 다음에는 사탕. 천천히, 꾹꾹 씹어담듯 먹었다. 이온음료는 맨 마지막에. 어쩌면 운동하며 마실지도 모르겠다.
노트 한 장을 찢어 그 위에 글씨를 꾹꾹 눌러 썼다. 악필이지만, 최선을 다해서.
'나는 전부 다 좋아서, 전부 다 먹었어. 고마워.'
그리고 매점에서 산 초콜릿 하나를 꺼냈다. 그렇게 편지와 함께 자리에 두고 떠나려다가, 괜히 장난기가 동해버렸다. 다시 자리에 앉아 서툴게 종이배를 접었다. 이곳저곳 찌그러져 못생겼다. 종이배 안에 초콜릿을 넣고, 원래 편지가 있던 곳에 두고 자리를 떴다. 입 안에서 콜라맛이 아직까지 맴돌았다.
>>361 역시 그렇죠? 센스쟁이 해인주 ㅎ▽< 우리 부회장님 짱된다!! 또 첫번째 선물 두번째선물..첫번째 답변 두번째 답변 또 이렇게 폴더 안에 폴더를 접으면 보기 편하겠지만 거기까진 기력이 안가네요 ㅇ<-< >>363 앗 천천히 써주세요~! 두근두근 ㅎ▽ㅎ!!!!
새슬이 솜사탕 맛 날 것 같아요 ㅠ▽ㅠ귀여웟! 문하주도 어서오세요~!!! 반가워요 ㅎ▽ㅎ
세상에 마니또 이벤트 크게 기대안했는데 정말 최고다 코피 쏟을 것 같아요 다들 고운 마음으로 선물이랑 편지 주는 것도 너무 귀엽고.. 마니또 선물 받고 좋아하는 아이들도 너무너무 사랑쓰럽고...... 앞으로 펼쳐질 추리도 기대되고.......청춘미 낭낭해서 너무 행복하네요 ㅠ▽ㅠ왈칶!
주원은 하늘이 강하게 목소리를 눌러 담으며 고개를 젓자 의미심장한 탄성을 낮게 내며 씨익 웃음지었다. 무언가를 알아챘다는듯한 확신에 가득찬 미소였다. 이어 판에 그린 그림을 보여준 주원은 눈을 빛내며 과연 하늘이 어떤 대답을 할까 하고 굉장히 기대하는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책에서 봤다고 했지? 어떤 아이가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그렸는데 어른들은 그걸 모자라고 봤다는 이야기. 하지만 이 그림과는 전혀 관계 없는걸? 아. 참고로 이건 장식."
주원은 검은색 눈처럼 보이는 것을 가리키며 말한다.
"어때. 억울하지 않아? 만약 네가 모자라고 했다면, 나는 이걸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고도 할 수 있거든."
그리곤 판에서 그림을 떼어 하늘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만약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은 아니라고 했으면, 넌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 '맞는데 괜히 아니라고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네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더라도, 이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렇게 말할걸?"
이어 주원은 말을 이었다.
"나는 '중절모'를 그렸어. 남들이 뭐라고 하든, 그 배경지식에 연관되는 어떤 이야기가 있든. 그것처럼 보이는 '눈'이 있든. 뭐,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이라고 한다고 해서 기분이 나쁘다거나 그런건 아니겠지. 하지만 아닌건 아닌거니까. 그렇다고 그게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으론, 분명 남들은 인정해주지 않을테니까."
주원의 목소리는 점점 낮고, 침착해져갔다.
"언제까지나 아니라고 하는 것만으론 통하지 않을 때가 오겠지. 떳떳하게 이것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는 이상은. 단순히 남이 알아주느냐, 알아주지 않느냐가 아냐. '떳떳함'과 관련된거지."
예전같았으면 눈쌀을 찌푸리고 뭐라 반론을 했을 정도로 지독하게 멍청하기 그지없는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말들에 반론이나 반박 따위를 할 기운도 없다. 그러려니, 하고 넘겨버린다. 인연이니, 뭐니, 결국 그래도 너희들도 나를 두고 사라져버릴 거잖아. ...얼굴에 반감을 드러내는 일마저 이제는 귀찮아서 문하의 얼굴은 아무 변화 없이 정면만을 바라볼 뿐이었다.
"있어, 그건."
문하는 스포츠백을 흔들어보인다. 무기력하게 흔들리는 그것 안에는, 굳이 꺼내서 보여주진 않았지만 스포츠드링크가 들어있기는 하다. 보답은 나를 동영체육관까지 안내해주는 것으로 충분한데. 그러다 규리의 가방에서 더 이상한 게 나오자, 문하는 앞으로 향해있던 고개를 규리에게로 돌리고 되물었다.
"가만... 그게 왜 나와, 가방에서?"
너무 의외의 장소에서 튀어나온 그것에 대해 거부의사도 표현하지 못하고 잠깐 멍청하게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멍하니 두어 호흡이 지나고서야 문하는 대답을 할 수 있었다.
학생회실에 들어오니 다른 인원들이 수근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내 책상 위에 치즈 케이크 한조각과 라떼 커피 한잔, 그리고 피곤할텐데 먹으면서 하라는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허어, 생각해보니 전교생 대상의 마니또가 시작했었지 참. 이건 철저하게 선생님들이 주관으로 하는거라서 학생회도 아무 것도 모른다.
" ... 근데 나 쓴 커피 안마시는데. "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보는 눈도 있어서 이걸 쏟아버릴수도 없다. 보는 사람이 없었어도 어떻게 처리할지 대략 난감이었겠지만. 나는 하는 수 없이 치즈 케이크를 작게 썰어서 입에 넣었다. 풍부한 치즈의 풍미가 입안 가득 퍼지면서 뒤로 올라오는 케이크의 달달함이 아주 맛있었다. 하지만 이 커피 ...
" 으윽 ... "
잔뜩 찡그리면서 쳐다봤자 커피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고 나는 결국 한숨을 크게 내쉬며 커피를 딱 한모금, 그것도 아주 약간 마셔보았다.
옆에서 본 중절모라는 말에 하늘은 한방 먹었다는 듯이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나오다니. 정말 생각도 못한 일이었다. 하기사 중절모라면 중절모일수도 있을테니 그에 대해서 반론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어 나오는 이야기는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떳떳함이라. 그렇게 보였구나. 그런 생각을 하며 하늘은 눈을 잠시 감고 숨을 약하게 내뱉었다. 진지하게 이야기를 한다면 자신도 진지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저는 강하늘. 그 뿐이에요. 인간이건, 양이건 어느 쪽도 상관없어요. 강하늘이에요."
자신이 양인 것이 부끄러운가? 아니였다. 그렇다면 자신이 늑대가 아닌 것이 원망스러운가? 그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은 늑대가 아닌 존재일 뿐이었다. 재능으로 피아노를 치는 것이 아니었고, 그렇게 보이는 것이 싫었기에 그는 언제나 늑대가 아닌 것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렇다면 그 이외에 대체 무엇이 필요할까.
"그걸로는 안되는건가요? 반드시 어느 쪽이어야만 하는건가요? 인간이냐, 양이냐. 그 차이로 인해 저는 다른 존재가 되는건가요?"
이어 살며시 표정을 풀면서 하늘은 다시 미소를 지어 그저 주원의 눈을 바라보며 다시 대답할 뿐이었다.
"저는 이 학교에 다니고 있는 평범한 2학년, 강하늘이에요. 남들이 절 어떻게 보든, 제가 인간으로 보이던, 양으로 보이던,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없는 강하늘이란 학생 뿐이에요. 이걸로 괜찮을까요?"
동아리 시간에 화장실 가는 척 하고 나와 옥상 위로 올라갔다. 어차피 다들 영화에 정신 팔려 한 사람쯤 나오는 건 눈치도 못 챘다. 선생님마저도. 사실 영화에 제일 집중한 사람이 선생님 같았다. 이런 걸 두고 뭐라고 하더라, 덕업일치? 어쨌든 행복해보이시니 됐다. 부서 학생이, 심지어 3학년이 중간에 탈출했다는 걸 알고 나서도 행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옥상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가며 생각했다. 요즘 부쩍 간이 커진 것 같다. 지난 번에는 아예 동아리를 째고 학교 밖을 나가질 않나, 지금은 또 무단으로 나와 있고. 차라리 아프다 하고 양호실을 갈 걸 그랬나. 그게 나 같은 애한테 제일 잘 어울리는 땡땡이 방법인데. 어쩌면 다음에는 땡땡이 선배님으로 불리는 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불릴 예정이든, 일단 옥상에는 올라왔다. 여기까지 왔는데 무를 수도 없지 않은가. 문을 열자마자 햇빛이 쏟아졌다. 학교가 어둡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는데, 나오고 나니 동굴 속에 갇혀 있던 기분이다. 사방이 탁 트인 데다 하늘은 파랗고, 햇볕은 쨍하지만 그늘에 앉아 있으면 딱 좋을 정도의 날씨. 난간 근처로 가 내려다보니 벚꽃이 줄지어 피어있는 모습도 보였다. 꽤 예쁜 풍경이다.
근데 봄볕도 무시할 거 못 된다고, 계속 받고 있으려니 뒷목이 따가워질 것 같다. 손으로 눈가를 가리고 두리번대던 사하가 적당한 그늘이 진 곳을 찾아 웅크리고 앉았다. 그늘이 좁아서 자세에 선택지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