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예가 늘어놓는 잔소리 비스무리한 것들을 들으면서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한다. 머리가 짧은게 아니라서 이렇게 엎드려서 자고 나면 앞머리가 엉망진창이 되곤 하는데, 정리하는게 여간 귀찮은게 아니었다. 짧게 칠까도 생각했지만 별로 어울릴 것 같지는 않았고. 그나저나 아까 문 열리는 소리가 너였구나.
" 아까 들어왔을때 일어났는데 금방 다시 잠들어버렸지 뭐야. "
아직도 몸 구석구석이 피로에 잠겨있었지만 누워서 자는 것도 아니고 엎드려서 자면 온 몸이 비명을 계속해서 질러댈 것은 자명할 일이라 부족한 잠은 집에 가서 자기로 결심했다. 가예가 가져다주는 찬물을 마시자 정신이 확 들면서 조금 감겨있던 눈이 완전하게 떠진다. 그래봤자 큰 눈은 아니라서 미미한 변화였지만.
" 보고싶었지~ 하루에도 몇번이고 찾아갈까 고민했다니까? "
바로 옆반이니까 말이야. 장난 섞인 웃음으로 응수하고선 맞은 편에 앉은 가예를 바라보았다. 작년보다 턱이 얄쌍해진게 그녀도 3학년이 되면서 이것저것 고생을 하고 있는듯 했다. 그래도 성격은 어디 안간 것 같아서 다행이네. 남아있던 물을 다 마셔버리고 들려온 질문에 답한다.
" 아무래도 아르바이트 끝나고 공부까지 하려면 수면시간이 줄어들 수 밖에 없는데다가 " " 재능을 사용할 일이 아무래도 많아져서. "
일상적인 대화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지만 남들 앞에서 얘기할때나 공적인 대화에서는 거의 필수적으로 사용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거라서 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재능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지쳐가는게 느껴졌다. 하지만 충전을 아무때나 할 수도 없는 노릇이라 그렇게 전체적인 컨디션이 조금씩 떨어지고 있었다.
" 어쩔 수 없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니까 숙명으로 여기고 사는 수 밖에. "
그리고 이 재능으론 먹고 살 생각이 없거든. 그렇게 계속해서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다가 계속 부스스한 상태가 지속되자 나는 앞머리를 만지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 너도 많이 힘든가보다. 예쁜 얼굴 다 상하겠어. "
진심으로 걱정되는 얼굴로 바라본다. 나야 원래부터 이런 삶이었으니까 익숙하지만 대다수의 고3 들은 바뀐 패턴에 한동안 적응을 못하던데.
생각보다 더 착한 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작정하고 나쁜 짓을 하지 않는 이상, 대체로 사하가 타인에게서 받는 첫인상이 그렇지만. 이왕이면 좋게좋게 생각하는 게 좋잖아. 혹시 몰라 그러다 안 풀릴 일도 잘 풀리게 될지.
"나 그런 걸로 상처 잘 안 받으니까 싫은 거 있음 딱 잘라 거절해요."
은근히 다정한 것처럼 보이면서 또 단호하긴 엄청나게 단호하다. 고양이를 닮은 건 비단 눈꼬리만은 아니었을지도. 사하가 웃었다. 오히려 이렇게 확실한 편이 다가가기엔 편할 수도 있겠다. 다 알려주면 들은대로만 하면 되니까. 다 괜찮은 척, 아닌 척하면서 숨기고 있는 게 더 어려웠다. 남의 마음 읽는 능력 같은 건 없어서.
"그럼 우리 통성명 할래요? 사실 명찰 보긴 했는데 그래도 말로 듣는 거랑은 다를 것 같아. 나는 은사하구요, 3학년. 간식은… 싫어하는 사람이 드물지 않나?"
자문하듯 중얼거린 사하가 슬혜를 바라봤다. 고양이 눈인사하는 것처럼 가만히 보다 은근슬쩍 손을 내밀었다. 어쩌면 조금 촌스러울지도 모르지만, 악수를 청하는 손이었다.
안녕 좋은 점심~~ 답레만 남기구 이따 다시 올게! 참 주원주 물어본 거 봤는데 사하가 딱히 자기 연애한다고 누구한테 얘기했을 것 같진 않아서 ㅋㅋㅋㅋㅋ 근데 또 엄청 숨기는 것도 아니라.. 눈치채고 물어봤음 어 맞는데..? 하긴 했을 거여... 눈치 빨라서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 뭐 그런 사이 아녔을까 생각하구..
"음... 사진으로 인사하고도 부족하시다면 직접 보여드릴수도 있지만요~ 아, 그건 아무리 같은 학교 학생이라도 너무 이른가요? 후후후..."
약간의 발랄함마저 느껴질 정도의 목소리와 그렇지 못한 얄팍한 눈길, 버릇처럼 검지를 들어 자신의 아랫입술을 매만지는 행동은 누가 봐도 초면인 그녀에게 보일 인상은 아니었지만... 아무렴 어떨까, 고양이를 좋아하는 사람 중에 그정도로 위험한 사람은 없으니.
"글쎄요~? 그런건 오히려 제쪽에서 걱정해야 할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참고는 하도록 할게요?"
사실 단호한만큼 누군가에게 쉽게 가로막힌다는 것 또한 자각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게다가 일단 스스로가 만족하지 않으면 어떤 요청에도 어깃장을 먼저 놓고 보는 성미였기에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중심적으로 구는 사람과 타인의 신경을 쓰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들어맞을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봤자 극과극이던지, 그럭저럭이던지 둘중 하나겠지만 겉으론 그렇게 보일진 몰라도 자신 역시 은근히 다른 사람들에게 신경쓰고 있으니 어쩌면 극만 다를뿐 비슷할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과연 누가 먼저 상대방에게 불만을 표할지, 그것조차 기대된다는 생각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음~ 그렇네요~ 역시 그냥 읽는 것과 그 사람에게 직접 듣는건 느낌이 다르단 말이죠..."
가만히 마주친 시선에 그저 빙긋 웃어보이다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어왔으려나, 어떻게 잡을지 잠깐 고민하다가도 양 손을 뻗어 그녀의 손을 사이에 두고 살며시 포개었다. 만약 그녀가 평범한 인사를 하듯이 손에 힘을 주지 않는다면 그대로 끌어 자신의 뺨에 가져다댈것만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현슬혜랍니다~ 뭐, 보시다시피 2학년이구요~ 간식이라면... 먹는 것도 좋지만 만드는쪽을 더 좋아하려나요? 아무래도 요리부다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