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로라는게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딱딱한 이미지는 아닌데 말이야. 너가 말하는 것도 충분히 진로라고 얘기할 수 있는걸. "
나아갈 진에 길 로. 그저 나아가는 길이라는 뜻이니까 말이야. 하지만 진로결정부라는 이름은 너무 딱딱해서 매력이 없어보이기는 했다. 차라리 지금 이름이 어필하기엔 더 좋아보이긴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가 열변하는 강의를 한 차례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런 것이겠지. 삶이 즐거운거란 말에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었지만.
" 어쨌든 사람을 구하는데 성공했으면 좋겠는걸. 이번 년도에는 신입생들이 또 많이 들어왔으니까 두명 정도 낚는건 어렵지 않아보이니까. "
화이팅이야? 하고 다시금 윙크를 하며 응원을 건넸다. 이번엔 확실하게 오른쪽 눈으로 했는데, 이러니까 왼눈을 감은게 안보이잖아. 허어 ... 상대방이 보기에 이상한거 아닌가 몰라.
" 아 그렇게 부르면 돼. 정확한 내 이름은 강해인이야. "
저 쾌활한 미소. 금빛 눈의 미소 아래엔 어떤 사람이 숨어있을까 궁금하기는 했다. 과연 그대로의 사람일까 아니면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사람일까. 속으로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겉으론 같이 웃어보이며 건넨 손을 잡아서 악수를 한다. 이렇게 아는 사람이 한명 더 늘어난다.
" 이 계획서는 보관해둘께. 나중에 필요할때 우리가 같이 첨부해야할 수도 있으니까. "
주원이가 건넨 계획서를 파일철 안에 집어넣으며 얘기했다. 그나저나 시간이 슬슬 학생회 인원들이 올 시간인데... 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마침 한두명씩 학생회실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 슬슬 학생회 회의 시간이라서. 다음에 또 보면 좋겠네. "
그렇게 얘기하며 미소 지은 나는 들어오는 인원들 한명마다 인사를 해주며 주원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물론 그녀 역시 처음은 당황한 모양이다. 글쎄라는 이름을 다시 되뇌이는걸 보면 잠깐은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그래도 금방 이름의 정의를 깨닫고는 바로 납득한거 같았기에, 불필요한 설명을 덜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을까. 이해력이 빠른 사람은 대화할때 이런점이 좀 편했다고 생각했다.
"후후... 제가 생각해도 나쁘지 않은 이름 같았으니까요~ 아마 실제로 보신다면 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 이해가 가실걸요?"
나름 가장 큰 고양이 반열에 드는 대형종인만큼 그 존재감은 확실하기에, 게다가 어지간한 고양이들보다 머리 한두개는 더 큰 지금도 한창 성장중이니... 그 꼬리에 시선강탈이 되는 것도 당연할거라고 스스로 납득할 정도였다.
"...적어도 고양이 훈련만큼은 숙달된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고양이와 놀아주면서 '고생했다'라는 말을 들은건 꽤 오래간만인지, 평소보다 한층 더 밝은 미소로 그녀에게 웃어보였다. 일단 이런 격렬하게 놀아주기 방법은 다른 사람들 앞에선 좀처럼 해본적이 없으니까, 왜냐고 물어도... 남들 보여주긴 조금 뻘쭘한 춤 아닌가, 덕분에 고양이도 따라하기 쉬운 춤이라곤 하지만 말이다.
"헤에~ 고양이와 노는데에 소질이 꽤 있으신가 본데요?"
아무리 츄르로 유혹했다곤 해도 고양이가 놀라거나 부담스러워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다가가는건 물론이거니와 과장된 행동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 그녀였기에, 어쩌면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을지도 모른다. 물론 날름날름 움직이는 고등어의 혀를 보고선 울기 직전의 모습을 보여준 선배님쪽이 더 귀엽다고 생각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건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그렇게 조금씩 다가가보면 얼마 안가서 부르기만 해도 알아서 나올 거랍니다~ 고양이는 경계심이 많은 동물이지만, 한번 마음을 트면 꽤나 깊게 신뢰하는 동물이니까요~"
물론... 그만큼 고양이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다시 그 관계를 회복하는데 사람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한다는 단점이 있지만 말이다.
나는 연호주의 말을 이제야 봐버렸네. 독백 끄적이다보니 말이야. 아무튼 맥주 한 캔 하고 다 쉬고 오면 적어도 11시 30분은 훌쩍 넘어버리겠지? 그때면 내가 일상이 힘들 것 같아. 직장인이라서 새벽 1시에는 자러 가거든. 그래서 거의 초반부터 무조건적인 킵이기도 하고.. 난 퇴근하기 전까지는 참치를 접속을 거의 하질 않아서 일상이 중간에 이어지는 일도 없어. 그래서 초반부인데 진행되는 것도 없이 너무 기다리게 하는 것도 미안하고. 그런고로 결론은 다음에 시간이 되면 돌려보자!
너무 열변을 토한 것과는 달리 해인이의 반응은 꽤나 담담했다. 상대방의 의견에 대해서 냉정하게 판단을 내리고 말 할 수 있는 것도 학생회에 필요한 능력일테니까.
"고마워. 해인이 네 말대로 열심히 모아볼게. 이번에야말로!"
2년 내내 실패했지만 말이다. 주원은 해인의 윙크를 보고 윙크로 대답해야 하나. 하고 잠깐 멈칫하고 고민하듯 눈을 몇 번 꿈벅인다. "어... 이거 맞나?" 하곤 해인이를 향해 동일하게 오른쪽 눈으로 맞윙크를 해 화답했다.
"해인이는 좋은 사람이구나. 고마워."
주원은 자신이 해인에게 느낀 것을 가감없이 솔직하게 말했다. 상대방은 주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진 모르겠지만. 그는 주원의 '아무튼 즐거운 것을 하는 부'를 존속시키기 위해 최대한의 조언을 해주고 도움을 주려 했다. 주원으로선 호의를 느끼지 않을리가 없지. 머릿속의 해인의 얼굴에 동그라미가 쳐지며 빨간 글씨고 '좋은 사람'이라는 메모가 붙는다.
"응. 어차피 그건 여기에 제출하려고 가져온 거니까."
해인이가 자신이 건넨 자료를 정리하는 것을 보며 말한다.
"그래? 지구 오기 전에 도망쳐야겠다. 그럼 나중에 또 봐. 아, 해인이도 나중에 같이 하자. 아무튼 즐거운 것을 하는 부 활동! 같은 부가 아니라더라도 활동은 얼마든지 할 수 있으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학생회의 문을 열곤 마지막으로 나가기 전에
"우리 부실 위치 알지? 기다리고 있을게. 나중에 또 봐!"
하곤 마지막까지 미소로 손을 흔든 뒤 학생회실에서 도망치듯 달려 빠져나갔다.
//막레입니다! 수고하셨어요. 주원이가 해인이의 본모습(?)을 알기엔 역시 부족하겠다 싶어서..! 일단은 주원이 머릿속엔 날 도와주려고 한 좋은 사람! 이라는 인상으로 남았네요!
평소보다 1시간 정도 더 빨리 등교한 하늘은 텅 빈 교실 안에 들어서서 자신의 가방을 내려놓았다. 원래라면 좀 더 느긋하고 여유롭게 움직였겠지만 오늘은 개인적인 사적 용무가 있었기에 그는 조금 더 빨리 등교했다. 이어 하늘이 주머니에서 꺼낸 것은 USB 3개였다. 작게 숨을 내뱉으며 하늘은 우선 자리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같은 반 아이의 자리에 하나, 그리고 교실을 빠져나와 2학년 3반 교실의 어떤 자리에 하나, 3학년 1반 교실의 어떤 자리에 하나. 각각 3개의 USB를 내려놓고 교실 밖을 빠져나갔다.
누군가는 있었을지도 모르는 교실. 허나,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종이 쪽지 3개를 각각 동봉하며 나가는 하늘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당신의 분위기. 그냥 연주해보고 싶어서. 창작곡은 아니고 이미 있는 피아노 곡이지만. -별 거 없는 거지만, 그래도 듣고서 좋은 하루가 되었으면 하고 바라면서 연주한 곡. -실례되는 행동이었다면 죄송해요. 그래도 최근 만났으니, 뭔가 들려주고 싶어서.
종이 쪽지에 적혀있는 내용은 누구에게나 다를바 없이 동일했다. 아마 USB를 핸드폰 등에 연결한다면 직접 연주한 피아노 곡이 들어있었을 것이다. 물론 그것을 들을지, 아니면 애초에 수상하다고 생각하고 갖다 버려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누가 부탁한 것도 아니고 하늘이 멋대로 한 거였으니까.
자리로 돌아온 하늘은 조용히 책상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손을 꼬물락거리면서 핸드폰과 이어폰을 연결해서 자신의 귀에 꽂았다. 어차피 자신의 반에 학생이 오려면 아직 멀은 것 같으니, 이대로 피아노 곡을 들으면서 혼자만의 시간을 즐길 생각이었다.
눈을 감으며 들려오는 멜로디는 하늘색 평화로운 멜로디였다. 그 또한 자신이 보고 연주해본 무언가의 곡이었다.
금방 납득하게 될 거라니 사진이라도 보여달라고 할까. 근데 나는 3학년, 저 후배님은 2학년. 자칫하다 <야, 고양이 사진 좀 있냐?> 같은 상황이 될까 봐 말을 꺼내진 못했다. 조금 심드렁한 얼굴일까, 아니면 의문스러운 얼굴? 하고 혼자서 추측이나 해볼 뿐.
"음… 있잖아요, 나중에 학교에서 마주치면 고양이 사진 보여줄 수 있어요?"
<딱 한 장만이라도 좋으니까.> 덧붙이며 최대한 무해하게 웃어보인다. 구질구질한 은사하! 완전히 포기하진 못하고 대신 조건을 걸었다. 처음은 우연이지만, 두 번째부턴 운명이라 치고. 뒷말은 괜히 치근덕대는 것 같을까 봐 안 했다.
"좀 더 자신감 가져도 될 것 같은데요."
사하가 말하며 웃었다. 순도 100%의 진심이다. 슬혜가 웃어주는 걸 보고선 조금 놀란 표정을 했지만, 곧 마주 웃었다. 무의식 중에 고양이를 닮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새초롬하게 올라간 눈매나 분위기 같은 게. 웃으니까 귀여운 게 역시 고양이 닮았나 싶기도 하다. 왜 새침떼기 같던 고양이가 다가와서 코로 콩, 해주는 거. 세상에, 나 기절할지도 몰라.
"태어나서 처음 듣는 말인데요. 낯선 고양이한테 관심 받는 것도 처음이에요."
<덕분입니다.> 말한 사하가 고개만 꾸벅 숙인다. 여태 마주친 고양이들은 재빠르게 도망가거나 아니면 근처에 숨거나 본 척도 안 하고 제 갈 길 가기만 했다. 그런데 오늘은 무려 고양이가 놀아주고, 주는 것도 먹어주고… 역시 옆의 후배님 덕분이라는 생각 밖엔 들지 않는다.
"한 번 마음 트면 깊게 신뢰한다는 거 되게 좋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는 나를 다치게 하지 않을 거지? 확신하면 기꺼이 곁을 내어준다는 거. 고양이가 양껏 츄르를 먹을 때까지 가만히 내밀고 있던 사하가 슬혜를 바라보며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