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가시기 전까지 살려달라고 줄곧 되내었다. 남이 보기엔 이 고통이 괴로우니 살려달라 하는 것 같았지만 절규의 방향이 미묘하게 달랐다. 살려달라는 주체가 어딘가 엇나갔기 때문이다. 본디 3인칭을 썼지 살려달라며 비는 것이 꼭 타인같다. 그러다 기어이 헛구역질을 한다. 나오는 것은 없다. 대신 땅을 박박 긁어내며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계속 어머니를 되내이고 아버지를 되내이며 이노리를 찾았다. 오열에 가까운 목소리였다.
"죄송,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저 때문에.."
두루마기로 가려져 어둠이 드리우자 입술을 꽉 깨물었다. 흐느끼듯 한번 사과를 중얼거린다. 사감 덕분에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나 손은 확실하게 보였는데, 몸을 웅크리고 땅을 긁어대다 부러진 손톱에서 피가 배어나온다. 그것은 손을 두루마기로 가려진 범위 안으로 슥 밀어 들여보냈다. 언뜻 보였던 손가락은 길쭉한 편이라 진짜 이노리라면 검지 손가락을 손바닥으로 쥘 수 있을 정도였다.
이윽고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오리의 안주머니에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작은 유리병을 꺼냈다. 손바닥만한 유리병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가져온 것이었다. 비록 2~30분 정도의 분량이지만 이것이라도 있어 다행이다. 코르크 마개를 열기 위해 손을 가져다대고 떨림이 멎을 줄 모르는 손으로 집었던 순간이다. 건 사감이 크루시오에 직격했던 것이다. 이윽고 떨림이 멎을 줄 몰라 마시는 것 반 턱을 타고 흐르는 것 반이었지만 아무튼 성공적이다. 20분의 효력이 10분으로 줄었을 뿐이다. 점점 두루마기로 감싼 몸이 줄어들었다. 흘러내린 두루마기 사이로 보인것은 주스로도 가려지지 않는 환한 미소였다.
"절망하는 모습이 보고싶다 하였습니까. 경의 경망스러운 품행과 언사로 보건대 거울을 보고 만족하는 것이 훨씬 이롭지 않겠습니까. 봄바르다 막시마."
피했다. 이걸 피하네. 한 방을 노린 공격이 빗나가자 레오는 그대로 바닥에서 한 바퀴 데구르르 굴렀다. 흙먼지를 일으킨 레오는 푸르릉, 하고 거친 짐승의 숨을 뱉으며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공격이 빗나갔을땐 어떻게 해야하더라. 배운 적은 없지만 잘 알고있지. 쉴 틈을 주지않고 다시 몰아붙이면 된다. 대신 신체적 특징인 빠른 거리의 스프린트를 적극 활용해야지. 레오는 몸을 돌려 낮추고 한 번에 뛰어오르려했다. 하지만 그 빠른 동작보다 저주가 더 빠르게 먹혀들어갔다면?
" .... "
레오는 그 자리에 멈춰섰다. 하늘이 어질어질 도는 느낌. 한 차례 그렇게 어지럽게 돌고나면 이상하리만큼 달콤한 향이 코끝에 감도는 느낌이었다. 몸이 붕 뜨는 기분. 하늘이 너무나도 높아져 숨쉬기가 편하고 목이 졸리지도 않으며 그냥 그렇게 기분이 너무나도 좋은상태. 이 느낌을 영원히 지속하고 싶은데. 방해하는 것들이 너무 많잖아. 방해하지 않았으면 하는데. 뭐? 뭐라고? 어떻게 하라고? 아, 전부 죽여? 전부 공격하면 된다고? 아, 그렇구나.
레오는 몸을 돌렸다. 자꾸 계속해서 이 좋은 기분을 방해하는 것들이 맘에 들지않아. 여러명을 공격할 때는 어떻게하더라, 무리사냥을 하면 된다고 했지만 우리는 무리를 짓지 않는걸. 그럼 여러명을 공격할 땐 어떻게 해야하지? 아니, 애초에 신경쓸 필요가 없을지도. 압도적인 힘 차이앞에 무릎꿇리면 되는거잖아. 포식자는 피식자를 두려워하지 않아.
레오는 으르릉 하고 울면서 몸을 낮추고 학원의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누구를 공격해야할지도 모르는 채로 몸을 날렸다. 아무튼 두 앞발을 크게 벌리고 크아앙 하고 큰 소리로 울부짖으면서. 누구든 잡힌다면 어깨를 짓누르고 그 큰 입을 벌려 목을 물던, 어깨를 물던 할 생각이었다. 경동맥을 꾹 누른다면 질식해죽던 과다출혈로 죽던 할테니까.
공격이 들어온다한들 상관없었다. 연약한 인간의 몸이 아닌 이 강인한 짐승의 몸은 몇 번의 공격 정도는 받아낼 수 있으니까.
상황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고 있던 단태의 붉은 암적색 눈동자가 슬몃 다른 곳으로 향했다. 공격을 우선시해야하는 건 어느쪽일까. 지팡이를 만지작거리며 단태는 다른 손으로 자신의 입근처를 매만지다가 그대로 멈췄다.
"...너."
아주 가까운 위치에 서있는 주양에게 향하는 고문저주에 입근처를 매만지던 손을 떼어낸 어둑하게 가라앉은 단태의 암적색 눈동자가 크루시오를 날린 이매탈에게 향했다. 그 눈에 비친 건 몰라도, 자신의 입술을 혀로 핥는 단태의 잇새를 타고 뿌드득- 이갈리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뭐했냐?"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으며 단태가 입가를 만졌던 팔로 주양을 부축하려 했다. 정확히는 감싸서 자신에게 끌어당겼다는 표현이 더 알맞겠지만.
"섹튬셈프라."
지팡이가 이매탈에게 향했다. 아니 향하려고 했다. "-염병할." 임페리오에 걸린 레오를 신경쓰지 못했다. 한팔은 주양을 부축하고 있기 때문에 단태는 지팡이를 쥔 어깨를 물고 늘어지는 검은 표범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에 조준이 빗나갔을 수도 있다. 용케 지팡이를 안떨어트리고 넘어지지 않은 건, 자신이 고통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소매를 타고 피가 흥건하게 새어나왔다. 단태의 가라앉은 어둑한 암적색 눈동자가 흘끗 레오를 바라봤다.
두루마기가 흘러내린다. 생글생글 웃는 어린아이의 모습에서도 노기는 숨겨지지 않았다. 얼굴에 돋아난 핏줄이 보인다. 심호흡을 하니 빠르게 진정된다. 이윽고 핏줄이 천천히 사라진다. 너는 지팡이를 빙글 돌린다. 손가락의 끝으로 지팡이의 끝단을 지그시 누른다. 마치 말채찍을 쥔듯이 어린아이와 맞지않는 손짓이다.
"이노리가 뭘 숨겨요?"
너는 발을 박찬다. 두루마기가 벗겨지고 하오리 자락이 펄럭인다. 지팡이를 든 손과 함께 너는 맨발로 숲의 풀을 즈려밟으며 뛰쳐나온다. 선비탈을 향해 지팡이를 횡으로 그어내려 한다. 초점 자체가 없는 눈은 감정을 가늠하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