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월에 의해 마법에 걸린 시간이 사라지고서, 그는 혼란한 얼굴로 그녀와 마주보다가 그녀가 갑작스레 자신의 가슴팍에 머리를 쿵 기대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는 고개를 슬쩍 내려서 자신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일단 기다리기로 했다. 자기 자신이야 금방 정신을 차렸다고는 해도 아랑은 아직 혼란스러울테다. 그런 때에 괜히 자극해봤자 좋은 결과를 보기는 힘들겠지. 하지만 그는 생각도 못하고... 아니, 안하고 있는것이, 방금 아랑이 그를 깨무는 동안 그녀를 감싸고 있던 팔을 아직 풀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랑이 그것을 언제 알아챌지는 의문이지만...
" ...엉? "
그제야 정신을 차린걸까.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아랑을 내려다보았다. 어딘가 곤란해보이는 목소리. 그는 어떤 부탁을 해올지 대충을 알것 같았다. 방금 전까지의 모습은 서로 못본척 하자던가... 아니면 서로 양이고 늑대이고 그런 사실을 잊어버리자던가... 대충 그런 부탁일거라고 생각하면서 시선을 맞추지 않고 고개를 떨구고 있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간단한 일이다. 알겠다고 대답만 한다면 뭐든 즐겁게 잘됐네, 잘됐어로 끝날 것이다.
" ....노력은, 해볼게? "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지금까지 몸 속에 잠들어있던 장난기가 머리만을 빼꼼 내밀었다... 하지만 이내 그 장난기의 머리를 잠시 눌러두기로 했다. 아까 내가 농담은 오늘이 만월인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했던것 같은데, 이제 만월은 끝났으니까 철회해도 상관 없을거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며,
" .......농담이야. 말해봐. "
뒤늦게 승낙했다. 아랑이 고개를 들면 장난스러운 미소를 띄우면서도 부드러운 미소를 띄우고 있는 그를 발견할 수 있을테다.
하늘의 달이 다 차오르는 날이 되면 어쩔 수 없는 운명에 사로잡히는 것이 하늘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은 양.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 라벨은 만월이 되는 순간 그 무엇보다 존재감을 뽑내게 된다. 억제제를 3알, 그러다가 2알 정도 더 먹으면서 하늘은 한숨을 약하게 내쉬었다.
늑대에게 쫓기는 것은 상관없었다. 어쩔수 없는 것이니. 자신이 잘 대처하면 될 일이었다. 허나 깊고 깊은 외로움만큼은 그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마치 세상에 홀로 남아있는 것은 고독. 어둠 속에서 손이 뻗어나와 발목을 잡고 끌어당기는 느낌. 자신도 열 여덟인만큼 그런 경험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억제제를 먹어서 막는 날도 있으나 때로는 그렇게 해도 잘 안되는 날이 있었다.
고요한 눈빛이 어둠이 깔려있는 자신의 방에 딸려있는 연습실에 있는 피아노로 향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것이었다. 이성이 본능에 마비된다면 차라리 본능에 맡겨서 피아노라도 힘껏 치자. 그렇게라도 하면 뭐라도 되겠지. 무슨 곡을 칠까. 그래. 만월이네. 월광소나타 제 1악장. 지금 자신이 느끼는 분위기를 피아노를 통해서 표현하니 조금 더 어두운 곡이 나왔을지도 모른다.
"정말 성가시네. 양이라는 거."
자신이 양이라는 것에 불만은 없었다. 이미 그렇게 태어난 것을 거부해봐야 무슨 소용이랴. 허나 그렇다고 짜증이 안 나는 것은 아니었다. 대체 이건 또 언제 없어질런지. 이런저런 어두운 생각이 떠오르는 와중에도 손은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의도적으로, 억지로 계속 치는 것일지도 모른다. 차라리 이렇게 승화시키면 어쩔까 싶어서.
"미안해. 이렇게 어울리게 해서. 너는 이런 분위기가 아니라 다른 분위기를 연주하고 싶을텐데."
자신이 가장 아끼는 친구에게 말을 보내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래도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숨을 크게 내뱉으며 눈을 꽉 감았다. 오늘 하루만 참자. 그리고 또 밝은 분위기로 이것저것 서로 연주하자. 마음 속으로 보내는 메시지는 멜로디를 타고 받는 이 없이 그저 하렴없이 사라질 뿐이었다.
"이 외로움이 싫어. 날 끌고 가는 것 같아서 싫어. 하지만 제일 싫은건, 이 외로움 때문에 누군가가 힘들어질 것 같다는 거야. 지금의 너처럼."
그래. 연주하자. 밤을 지세우며. 그것이 내가 선택한 길이니까. 작게 중얼거리며 스스로에게 핑계를 대며 그는 어둠 속으로 잠식했다. 최면이라도 걸린 것처럼 두 손을 움직이며, 달빛이 가득 섞인 멜로디를 방 안 가득 채워나가며.
양도 늑대도 싫은 것이 아니었다. 그 누구에게도 죄는 없었다. 어둠 속, 달빛 멜로디 속에 자신을 감춘 소년은 자신이 양이기에 누군가를 힘들게 할지도 모를 자신이 제일 싫었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은 감정. 그것은 양도, 늑대도 몰라도 되는 그 무언가.
/사실 정사는 그런 거 없이 만월? 오늘은 빨리 집에 가야겟네. 하면서 잘 지냈다고 카더라. 이건 그냥 IF!
난 최악일지도 모른다. 아니, 최악이 분명하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 무겁고 엉겨붙은 공기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내가 선택한 방법이 '정신을 잃은 척'이라니! 난 제대로 사과해야 했다. 이 사태에 대해서. 그녀의 목에 남긴 상처에 대해서도. 받아들여주었음에도, 끝까지 행하지 못한 것에대해서도.
하지만.
나는 겁쟁이다.
위로 받는 것도 두려워서. 경멸 받는 것도 두려워서. 그러지 않으리라는 것은, 그녀가 그렇게 하지 않으리란 것은 알 수 있었지만. 그래도 그 속내가 두려웠다. 내가 읽게 될 그녀의 진심
눈을 감고.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이 상황이 그저, 흘러가기를 바라는동안 그녀는 나의 귓가에 장난스럽게 손님을 초대해 놓고 먼저 잠들어버리면 곤란하다 말한다. 그 말대로다. 지금이라도 나는 고개를 들고, 말해야 했다.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하지만 마치 내 몸은 누군가에게 속박된 것 같이 손끝도, 입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그래. 거짓말이야. 나 스스로가 나를 묶었을 뿐. 식은땀이 몸을 빠른 속도로 적셔가고 마땅히 방법을 찾지 못한 나는 누군가가 잡고 움직이지 않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목석처럼. 인형처럼 그저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을 뿐이다.
얼어붙어있다기엔, 부끄러움과 수치로 온 몸이 달아올라 있었지만.
그녀는 분명 내가 깨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속았을리가 없다. 귓가에 나지막한, 시트러스향이 아직 남은 목소리가 침대에세 자야하지 않겠냐며 속삭인다.
분명 그 만월의 시간은 끝나버렸고, 그녀의 약이. 나의 패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을 터임에도 나는 왜 아직 그녀로부터 새콤달콤한 향기를 맡아버리고 마는 것일까? 마치 '각인'된 것 같이.
끝까지. 겁쟁이인채로 아무것도 그녀에게 말하지 못한 나는. 그저 그녀가 그대로 떠나갈 때 까지 그 자리에 얼어붙은채로. 화끈거릴 수 밖에 없었다.
목 뒤에 손톱자국을 남긴 고양이이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가자.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나는 그 문을 닫는 것을 기점으로 나도 모르게 소리치고 말았다. 적어도 발소리가 사라진 뒤에 소리쳤어야 했는데, 그만 본능적으로 부끄러움을 그 어색함을 난 참아내지 못한 것이었다.
이 감정을, 이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어떻게든 분출하기 위해 벽을 쿵쾅치고 책상을 쾅쾅 치다 침대에 구르며 이불을 뻥뻥뻥뻥뻥 찬 것은, 비밀이다.
"...열쇠..."
그러고보니, 그녀에게 하지 못한 말이 있다.
열쇠를 돌려달라고? 아니.
사실, 그대로 가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어떻게 처분하든. 슬혜는 그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대로 열쇠를 가져갔다.
베개를 끌어안은 채로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지만, 내 눈은 천장을 보는 것이 아닌 방금 전까지의 시간을 계속, 되뇌이며 회상하고 있었다.
안돼. 이쯤 해야한다. 이러다간 층간소음으로 신고당할지도 몰라. 나름 비싼 곳이라 방음은 철저하긴 했지만 그만큼 내 목을 찢을정도로 강하게 소리쳐버린 것이었다.
"아................."
거울을 보지 않아도 얼굴이 잔뜩 달아오른 것 쯤은, 알고 있다. 이만큼 뜨거운걸.
아무렇지 않은걸까? 슬혜는? 그저 한 순간의 헤프닝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단지, 늑대와 양의 단 한 순간의 실수같은? 그냥 서로 위험한 순간에 필요한 것을 주고 받은 사무적인 행위로?
...난, 그렇게 받아들일 수 없다.
...그렇다고 뭐가 바뀌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리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해도. 그리고 내가 아닌 그 누군가였어도 똑같은 결과였다고 해도. 아니, 누군가는 나보다 더 그녀를 만족시킬 수 있었을지 모르더라도.
...그래도, 나였고, 그녀였으니까.
...아무렇지 않게 안녕. 잘 지냈어? 하고 인사를 하는 행위는, 이제 불가능해.
...이미 일어나버린 이상은. 카펫 위에 포도주를 쏟아버린 이상. 그 자국은 지워지지 않아.
//막레로 갱신! 슬혜주 정말 즐거웠어요. 마치 저한테도 하룻밤 꿈처럼! 으.... 뭔가 완벽하게 해내지 못한게 계속 한으로 남지만... 솔직히 슬혜여서, 슬혜주여서 다행이었다고 생각합니다! :D 지금 일상 끝났는데 다시 돌리고 싶어요. 끝내기 싫다. 으아ㅏㅏㅏㅏㅏㅏㅏ 다음 언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