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공기를 메운 듯한 정적은 착각일까. 그 뒤에 친하게 지내자고 응했으니 그때 눈빛에 스친 이질적인 감각도 착각일까. 피아노 특기생다운 묘사에 웃음이 얼굴을 떠나지 않았다. 역시 특이한 애라니까.
"그래. 우리가 만나서 인사하고 이야기하는 게 네가 말하는 도레미파솔라시도와 4분의 4박자가 될 수 있겠지. 해보자 한 번, 생각보다 즐거울 거야. 네가 하는 말이 맞아. 교류하는 거 줄이고는 있지만 고삼이 돼도 포기 못할 정도라니까."
네 표현을 인용하며 가볍게 아는 선율을 연주한다. 하늘의 감각이 틀리지 않았다면 캐논이었다. 캐논의 도입부를 연주하다가 잠시 멈추고 대답을 들었다. 사족은 붙이지 않았고 그저 하늘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아갈 뿐. 본인과 같지 않다고 해서 고칠 수 없고, 고쳐서도 안 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최선이라는 걸 알고 있다.
"선택한 결과에 후회하지 않는 건 나랑 같네."
이따금씩 고개를 주억이다 교집합에 반응을 했다. 이어지는 뒷말엔 슬쩍 웃어보인다.
"연주를 좋아하는 사람한테 들려주는 건 좋다고 했지? 나는 좋아해. 너도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즐거운 시간이 되겠네. 어때, 친해질 마음이 더 생겨?"
아까 친해지자고 대답은 했지만 친해지고 싶은 마음은 뿜뿜하는 느낌은 아니었단 말이지. 떠보는 것 같기도 하고, 장난치는 것 같기도 한 말투.
선을 그어버리는 너의 행동에 나는 그저 쓴웃음만 지을뿐이다. 너에게 상처를 너무 많이 주었고 그것을 의도한건데 직접 이렇게 들으니까 조금은 아픈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내 어깨를 콱 무는 너의 행동에도 나는 그저 얼굴만 찡그릴뿐 떼어내거나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의 나는 감정에 너무나도 나약하고, 휩쓸릴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 그렇다.
" 알아. 나도 잘 알고 있어 ... "
나지막히 중얼거린다. 분명 아무렇지 않게 얘기해야하는데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린다. 강해인, 이런걸 원하는게 아니었잖아.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나는 원래 나약한 사람인데. 있는대로 강한척, 위험한척 다 하면서 나는 원래 겁쟁이에 나약하잖아. 나를 더욱 끌어안는 사하의 두 팔을 느끼면서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 지금 내가 해주는 얘기는 사라도 모르는 얘기야. 어쩌면 내일은 너에게 이 이야기를 해준 것도 후회하겠지. "
그녀를 끌어안은채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로 천천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 너도 알다시피 우리 집은 가난해. 어릴때부터 가난했고 지금도 그렇게 잘 사는 편은 아니지. 늑대들의 재능은 어릴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해. 나는 재능을 금방 개화한 편이라서 말로 누군가를 회유하고, 사람들을 끌어모을 수 있게 되었어. "
내가 왜 지금 이 이야기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 그냥 억울한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에 대한 자그마한 벌이라고 할 수도 있고.
" 어느날은 부모님이 날 어디로 데려가더라. 무슨 투자 설명회 같은 곳이었는데 어린이 관련 제품에 관한게 아니었을까. 어쨌든 나는 거기서 무서운 아저씨들이 하라는대로 얘기를 열심히 했고, 그 날 엄마가 피자를 사줬어. " " 그걸 시작으로 나는 여기저기 불려다니면서 똑같은 짓을 반복했고, 그때마다 피자를 먹었어. 어릴땐 피자를 먹는다는게 마냥 좋았고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으니까. 하지만 내가 좀 더 컸을때 드디어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아버렸어. " " 어느날 도착한 회사 앞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내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몇몇 사람들이 날 잡으려고 쫓아오는거야. 물론 금방 회사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지만 나는 그 사이에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다 들을 수 있었어. " " 나는 그날부터 안하겠다고 선포했지만 ... 나약한 내가 뭘 할 수 있었겠어. 그날부터 그냥 반강제로 끌려다녔어. 물론 위해는 가하지 않았지만 우리 집은 돈이 필요했고 그들은 돈으로 협박했으니까. " " 중학생때까지 그렇게 끌려다니다가 그 일당이 잡혀들어간 이후에는 우리 집은 자유를 얻었지만 ... 결국 이 모양 이 꼴이 되어버린거야. 생각보다 재미없지? "
큭큭대며 웃으며 다시금 한숨을 내뱉는다. 그리고 이 이야기를 왜 했는지, 본론을 얘기하기 위해 다시금 입을 열었다.
" 결국 내가 겁쟁이라 널 상처 입혔고 그건 부정할 수 없어. 그러니까, 날 평생 미워해줘. 원망해줘. 내가 너로부터 멀어질 수 있게. "
속삭이듯이 미안하다는 말을 끝으로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 복잡한 감정을 없애는 방법을 난 모르니까. 끝까지 너에게 의지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한 인간이라서 미안해.
다정하게 군 것은 가냘픈 토끼를 위한 소꿉놀이였는데. 조그만 토끼가 겁을 먹고 달려나갈까봐. 귀찮아지는 일은 질색이라. 적당히 토끼가 부서지지 않을 정도로 억누르고 있었는데-. 단 것을 뭉쳐 놓은 것 같았던 토끼는 주제를 모르고 안달낸다. 나는 사실 아직 한참 부족하거든. 작은 토끼를 위해서 그것을 잘게 부수고 부숴 고운 가루로 으스러뜨리고, 조각난 것들을 감질나게 조금씩 조금씩 채워가며 쉽게 차오르지 않는 것을, 만족되지 않는 갈증을, 본성을 간신히 붙잡고 있었다. 네가 무서워하며 도망가지 않게, 아주 조금씩 공간을 좁혀 숨을 쉴 수도 없을 정도로 좁은 공간에 가두어도 자각하지 못하게, 어디로도 도망가지 못하게. 그런데 이 작은 토끼가 옷깃을 움켜잡으며 인내를 시험한다. 붉은 빛의 입술을 달싹거린다. 지구는 고개를 들고 낮게 내려 뜬 눈으로 새슬을 깊이 내려다본다. 바다가 담긴 깊은 눈엔 드디어 온기가 일렁였을까. 그 순간 지구가 새슬의 목덜미 뒤를 움켜 잡고 꽉 끌어안으며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낮게 읊조렸다.
"명령은 네가 하는 게 아니야, 토끼야."
건방진 토끼. 하지만 제가 참으라던 것을 눈물을 삼키며 잘 참아 내었으니 토끼에겐 당근이 필요했다. 그리고 나는 그게 먹고 싶은 걸. 한 손에 쥐어진 새슬의 가냘프고 얇은 목은 정말이지 너무 연약해서. 힘을 주어 으스러뜨리면 정말 큰일이라도 날 것 같잖아. 나른한 웃음을 지으며 손아귀에 쥐었던 것을 놓고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꼬아 장난치며, 혹은 부드럽게 매만지며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부탁은 들어 줄 지도 모르지."
원한다며? 능청스러운 지구의 눈이 사륵 접혀 호선을 그린다. 새슬과 마주보는 듯 하더니, 목덜미에 선명하게 잇자국이 난 그녀가 흘렸던 눈물이 지나간 자국을, 뺨을 혀로 핥으며 입술을 달싹였다. 단맛이 나는 것 같았다. 그는 먹잇감을 교양없이 마구 뜯어 먹는 짐승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너는 하필 머리 검은 짐승에게 한참 잘못 걸린거겠지. 지구의 손끝이 새슬의 귀 끝에서, 얇은 목덜미, 여린 어깨, 가냘픈 팔을 거치며 간질이듯 먹잇감을 가만히 애태운다. 날카로운 눈이 그녀의 감정이라도 읽어낼 듯 깊이 꿰뚫는다. 벌써 이런 모습을 보여 유감스럽지만, 지구는 이런 인간이었다. 잘 다듬어진, 매우 훌륭한 교육 받은 뒤틀린 검은 짐승. 모든 것은 속아 넘어 간 네 탓이겠다.
주원은 평소처럼 담백하고 산뜻한 말투와는 달리, 능글맞은 태도로 대답한다. 그럼에도 장난기 남아있다는 것은 그가 완전히 남주원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을지도. 장난스레 미소짓는 슬혜의 모습에 주원은 마음 속으로 안도했다. 그녀의 마음을 완전히 읽을 수는 없을테지만, 그녀 또한 이 분위기를 즐기고 있는 그런 기분이 전해져 온 것 같았으니까.
"있다고 해도, 슬혜는 아닌걸 잘 알아."
그녀는 어딜 봐도 얌전히 먹힐 양처럼 느껴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양의 탈을 쓴 고양이에 가깝지 않을까. 언제 변덕을 부리고, 언제 할퀴고, 언제 물어도 이상하지 않을 그런 고양이. 일부러인지, 아니면 정말 힘이 빠져서인지 넘어진 그녀는 주원의 등에 업히는가 싶으면서도 오른손을 내밀어 주원의 목을 부드럽게 휘감았다. 전해져오는 따뜻한 체온. 양과 늑대가 아니더라도 기대고 싶어지는, 사람의 온기. 그 온기는 그 곳에서 멈추지 않고 주원의 왼쪽 귀까지 향한다. 이전, 그의 코에 닿지 않아던 가녀린 손가락이 주원의 귀를 타고 간지럽게 쓸고 내려간다. 마냥 부드럽고 따뜻할 것만 같았던 손길은 주원의 목에서 멈추어 고양이가 발톱을 세우듯 그 손톱으로 주원의 목을 지그시 눌러왔다.
목을 파고드는 날카롭고도, 따뜻한고통. 그냥 입질이라고 부르기엔 피하고 싶은 고통이었을지 몰라도, 주원은 오히려 그 손톱이 누르는 쪽으로 목을 갖다대었다. 더욱 깊숙히 그 자국을 새겨도 된다는 듯이.
"물려도, 변명은 없는거다?"
그리고 네가 흔적을 남긴 만큼 자기도 흔적을 남기겠다는 듯이.
등을 가득 채우는 따뜻한 체온. 그리고 주원을 향해 드라이아이스 같이 피워내며 흘러내리는 향기.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도 계속 그 시간을 누리고 싶었지만 그는 애써 다리를 움직여 집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