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음. 그런 거라면 정말 가볍게 되겠네. 사실 규리를 보면 접점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데. 그냥 일방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라도 좋다면 그것도 난 환영이야. 일단 하늘이는 피아노 콩쿨이나 대회에서 여러 번 수상을 했으니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은 알 수도 있을 것 같으니까. 깊게 계기를 설정하고 싶다면 선관스레로 가고!
단언하건데, 만월이 선하에게 문제가 되었던 적은 없었다. 집에 가면 부모님이 언제나 계셨고 바보처럼 패치를 빼놓을 일도 없었다. 고작 이런 일로 연습을 빼놓을 수는 없었다. 방수가 되는 패치는 흔했고, 만원이라고 연습에 빠지는 늑대들은 제 경쟁자가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답답하지?
선하는 카라 부분에 손가락을 걸쳐 마구 흔들었다. 빈 속에 보드카를 들이부은 것처럼 위장 한구석이 쓰렸다. 목에서는 앓는 소리가 자꾸만 흘러나왔다. 두렵고, 초조해서... 미칠듯이 화가 나고 답답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참을수가... 혹시나 해서 등에 손을 올려보지만 패치는 여전히 제자리에 붙어있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심경이 수세미처럼 얽히고 섥힌다.
몸을 숙이고 걷던 선하가 불쑥 허리를 피며 한 곳을 바라본다. 향이 났다. 아주 달달하고 포근한... 순간 집에 계신 부모님이 머리에 떠올랐다, 거품처럼 사라진다. 정신을 차리니 자신은 뛰고 있었다. 어리석은 축생처럼, 이성은 그다지도 중요치 않게 되었다. 이러면 안되는데,하는 최소한의 브레이크도 말을 들어먹지 않았다. 먹어버리자. 집어 삼켜버리자. 처음 보는 양에게 다가갈 수록 향은 짙어졌다. 선하가 혀를 내밀고 송곳니를 슬슬 건드렸다. 분명 맛있을 거야. 새의 발톱처럼 굽어진 손이 이현의 어깨를 붙잡는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벌린 입을 벌려놓고, 막상 이현의 얼굴을 보자 굳은 듯 멈추어선다.
"..."
내가 양을 먹는다고? 감히? 두려운 사람의 얼굴을 하고는 입을 다문다. 뒤늦게 죄를 깨달은 죄인처럼, 신에게 고해성사하는 신자처럼 유순해진 얼굴이다. 어떻게든 웃기 위해 입꼬리를 끌어올리지만 초조해보이는 얼굴만 떠오른다. "미, 미안해. 내가, 얼른 이거 떼어놓고, 어, 어..." 횡설수설 말하며 어깨에 올린 손을 떼어놓으려 하지만 이상하게 손이 떼어지지 않았다. 이게 왜 이러지, 중얼거리며 울쌍을 짓다 오래지 않아 죽은 듯 표정을 잃는다. 망연자실하게 중얼거린다.
약 세 알이 사이좋게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느낌이 유쾌한 사람이 있을까. 뭐, 있을 수도 있겠지. 존중한다. 다만 그게 저는 아니었을 뿐이다. 스스로는 알 수 없는 향기가 남을 혹하게 할 수도 있다는 것.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나의 외로움은 나만의 것, 남의 외로움은 알 길이 없으니. 모든 사람이 이 정도의 외로움은 안고 사는 거 아닌가. 빛이 나 알아볼 수밖에 없는 재능이 없었다면 코웃음 치며 넘겨버렸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약 세 알을 먹은 날이었다. 그것 말고는 딱히 기억에 남는 게 없다. 수업을 들었고, 점심을 먹었고, 또 수업을 들었다. 동아리 활동을 하니 야자는 하지 않았다. 석식에 생선이 나온 걸 두고 가시 바르기 귀찮다는 투정을 한 것 정도가 특별한 일일까. 그걸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야 했다.
동아리 활동이 끝나고 따로 남아 문제를 풀었다. 이럴 거면 야자를 할 걸. 생각은 잠깐이었다. 죽 이어지는 문제가 지겨워 책상 위로 엎어졌다. 휴대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니 9시. 이미 해는 지고 달이 뜬 시간이다. 무난한 직선을 그리던 기분이 갑자기 바닥을 친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서둘러 가방을 챙긴다. 돌아가야 돼. 가서,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쓰고 있으면. 오늘 밤만 지나면. 정리 안 된 생각이 엉켜 발목을 잡았다. 아니, 책상에 다리가 걸려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다. 바닥에 손을 짚고 주저앉은 채 숨을 골랐다. 몸이 물 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아니, 마음이. 누가 와서 일으켜주고, <많이 아팠겠다.> 하고 얘기해주면 그 품에 안겨 울고 싶었다.
잃어버렸다. 그런데, "뭐를?" 아무도 없는 텅 빈 자리에서 그리 중얼거렸다. 무언가 끊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단지 아주 가까운 자리에서 희미하지만 분명한 단내가 난다는 것.
몇 시간 전의 지구를 떠올려보면, 그는 교복을 입기 전 갈비뼈 부근에 패치를 붙이고 등교하여 오늘은 어디도 도망가지 않고 무사히 학교 일과를 마쳤다. 중간고사가 머지 않았으니 자진해서 야자에 남아 공부에 매진하다, 그래 그게 문제였을까. 무리하지 말라던 친구의 말이 아른거리고. 하얗고 검은 문제집 위에 검붉은 핏방울을 투둑 떨어뜨렸을 때. 그때 얇은 무언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고. 손으로 코를 막고 고개를 숙여 화장실로 향한 지구는 대충 처치를 마치고 피가 멎을 때까지 줄담배를 펴댔을 뿐이다. 건물의 뒤뜰에 꽁초를 쌓으며, 멎은 듯한 핏덩어리의 휴지를 꺼냈을 때. 간드러지는 달큰한 향이, 그때의 네가 잘못한 거야.
지구의 감정은 일정한 선에 늘 머물러 있었으므로, 남들을 쉽게 속인다고. 단내음이 잔뜩 풍기는 그곳으로 발자국 소리조차 내지 않으며 지구는 무정한 눈으로 보름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네가 잘못한 거야.
"토끼."
지구의 발걸음이 멈춘 곳엔 가엾은 토끼들이 가득 담겨있는 토끼장과, 그 앞에 웅크리고 있는 솜사탕의 토끼가 있을 뿐이었다. 지구는 일정한 거리를 둔 채 그 가엾은 토끼를 건조한 눈으로 바라보며 나즈막히 부른다. 전혀 모르는 얼굴. 그녀는 그저 가엾은 토끼일 뿐이지. 그리고 불운하게도 나는 굶주렸고.
"술래는 나지."
그리고 나는 비겁한 짐승이라, 초 따위를 셀 정도로 상냥하지 못하다. 으르렁거리는 듯한 낮게 깔린 저음으로 그리 경고 아닌 경고를 뱉은 지구가, 당신에게로 일말에 망설임조차 없이 다가가고 있다. 우리의 가여운 토끼는, 궁지에 몰려봤어?
밤 9시.주원이 '슬슬 돌아가야지.' 하고 동아리실의 복도를 걷는 도중, 요리부의 부실을 보고 그 앞에서 멈춰섰다. '그러고보니 이전에 식사 약속을 했었지. 아직까지 남아있다면 권해볼까.' 하는 생각을 갖고 요리부 부실의 문을 드르륵 연다.
슬혜는 무언가를 요리하고 있었던 것일까? 부실의 문을 열자마자 코를 찌르는 상큼함과 단내 섞인 시트러스향이 주원의 예민한 코를 타고 뇌를 향해 직접적으로 냥냥펀치를 날리기 시작했다. 요리부의 부실 문을 열기 그 직전까지, 평범하게 흘러가고 끝나리라 막연하게 생각했던 일상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단순히 기분이 어떻다던가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분명 두 눈을 통해 인식했어야 할 눈 앞의 새초롬한 소녀가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을 부드럽고 달콤하며 상큼한 핑크빛 시트러스 케이크와 겹쳐보이기 시작했으니까.
그와 동시에 주원은, 지금까지 '먹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단 한 번도 늑대로서 마땅히 먹어야 하는 것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19년 인생 패치에 의존해, 인간으로서의, 사회에 속해있는 자로서의 규범에 의해 억눌러왔던 그 허기가. 단숨에 몰려오기 시작했다.
'왜 지금까지 참아야 했지?' '왜 난 지금까지 먹지 못했지?' '누가 먹지 못하게 한거지?' '왜?' '왜?' '왜?' '먹어버려.' '먹어버려.' '먹어버려.' '먹어버려.'
생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자신의 목소리일까? 아니면 눈 앞의 슬혜의 목소리가 뇌내에서 울리는 것일까? 주원은, 그저 '오늘 뭐라도 같이 먹지 않을래?'라고 가볍게 물어보려고 한 것이. '이제부터 널 먹어도 될까?'로 변해가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140센티미터가 조금 넘을까 말까 하는 조그만 소녀가, 어딘지 모를 담벼락 밑바닥에 끈 떨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널부러지듯이 걸터앉아 있었다. 귀가 울리고, 눈앞이 흐려진다. 마치 10일이 넘게 입에 아무것도 넣지 못하고 혹독한 환경을 지나온 것처럼 모든 감각이 발작하며 그 주인을 공격하는 것만 같았다.
"병원에를."
가야 하는데. 가서 주사를 맞아야 하는데. 머리가 멋대로 움직여서 떠올리려 하지 않았던 수식들과 지식들이 뒤엉킨다. 마음은 병원에를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머릿속에는 방금 다음 그랜드크로스가 언제 발생할지에 대한 계산을 포함해, 차마 그 대입되는 지수들이며 그 결과가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 입조차 벙끗하고 싶지 않은 숫자들이 사라의 머리를 스쳐갔다.
알레르기는 알레르기 유발원에 신체의 면역체계가 과민반응해서 오히려 자신의 몸을 공격하기 때문에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했던가. 사라는 지금 자신의 몸의 뇌신경들이 과민반응해서 자신을 공격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손가락 하나도 꼼짝 못할 것 같다. 주저앉아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사라는 문득 땅에 까만 점이 툭 찍히는 것을 보았다. 아, 코피 난다.
손을 들어서 지나가는 택시라도 부르고 싶건만, 어룽어룽 검어지며 흐려지는 눈을 들어보아도 택시는 보이지도 않고, 택시가 보인다고 해도 택시에 타기는커녕 손이나 들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냥 아빠한테 태워달라고 할 걸 그랬나. 아... 아빠는 야근이고 엄마는 동창회 가셨지. 자신은 아무도 없는 집에서 비척비척 걸어나와 병원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기괴한 숫자들이 온통 가득 채워버린 머리에서 사라가 자기 의지로 건져낼 수 있는 생각은 그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