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아니에요.. 가루들이 엎어지진 않았으니까요.. 지금 하던건 나중에 해도 상관 없고요. 근데 그..그쪽도 2학년이었어요? 저..저도 2학년인데.."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던 홍현이지만 다시 좀 떨리는 것 같았다. 평상시와는 다르게 동아리실에 단 두사람만이 들어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홍현은 급하게 자신의 자리 옆에도 놓여있던 강정제를 따 마시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난번에 빌었던 소원이 떠오르자 너무 강장제와 딸기에 의존하는 것도 좋지 않을 것 같아 좀만 보류하기로 했다. 동아리실로 들어온 진한 갈색머리의 남학생이 제자리에 가방을 놓은걸 확인한 홍현은 어색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이렇게 만난 김에 통성명이라도 할까요? 전 야..양홍현이라고 해요. 2학년 3반에 다..다니고 있고요."
홍현은 어렵사리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자신이 약품을 조합하던 탁자 앞에 비어있는 탁자를 조심스레 가리키며 말했다.
"저..근데 혹..혹시 실례가 안된다면 저기 앉아서 테..테스트를 좀 해줄 수 있을까요? 물론 위험한 임상실험을 부탁드리는건 아..아니에요! 그...그냥 제가 최근에 만든 종합영양제를 먹어보기만 하면 되거든요..!"
"아. 그쪽도 2학년이었구나. 아무튼 엎어지거나 하진 않았으니까 다행이네. 뭔가 하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 들어오거나 하면 되게 신경쓰이고 그렇잖아? 나도 그럴 때가 있거든."
상대가 2학년이라는 말에 편하게 말을 아래로 내리면서 그는 조금 더 편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선배나 후배가 불편하다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같은 시기에 학교에 들어온 동갑이 제일 편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다만 상대는 아닌 것일까. 어색해하는 분위기도 그렇고 긴장하는 듯한 표정도 그렇고, 오래 있으면 안 될지도 모르겠다고 그는 결론을 내리며 문 쪽을 힐끗 바라봤다. 어차피 가방을 갖다줬으니 굳이 더 여기에 있어야 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허나 곧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그녀의 모습에 그의 시선이 다시 그녀에게 돌아갔고 자신 역시 통성명을 했다.
"2학년 1반인 강하늘이라고 해. 순수 우리말인 그 하늘. 동갑이니까 편하게 말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은데. 아무튼 테스트?"
그녀가 가리키는 탁자를 바라보고 테스트라는 말에 그는 잠시 생각을 하다 곧 탁자로 다가간 후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종합영양제야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으니까. 허나 한가지 확실하게 해야 할 것은 있었기에 그는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 정도라면 괜찮긴 한데, 혹시 손떨림이나 그런 부작용이 있는건 아니지? 난 피아노를 연습하고 있어서 손이 떨리거나 감각에 문제가 생기면 조금 곤란하거든. 물론 종합영양제니까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그런데 직접 만든거야? 와. 대단하네. 약 만드는 거 되게 어렵지 않아? 되게 전문지식이 필요한 것으로 아는데."
오늘은 일요일. 내 일상에서 유일하게 쉬는 날이기도 하다. 신도 일요일은 쉬었다는데 나도 일요일 하루쯤은 쉬어도 되잖아. 학교 가느라, 알바 가느라 정신없었던 일주일은 이렇게 고요한 휴일로 마무리가 된다. 아침에 일어나서 부모님께 안부 문자를 보내는 것으로 시작되는 하루는 대부분을 침대에 누워서 보내곤 한다. 공부도 해야하는데, 라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침대에 누워서 그런 생각을 해봤자 책상에 가서 앉는 것은 좀 더 대단한 결심을 해야지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누워있으면 잠이 오는 것은 시간 문제라 나는 어느새 얕은 잠에 들어버렸다.
[안녕! 내 이름은 강해인이야. 너 이름은 뭐야?] [피자! 완전 맛있어요!!] [엄마 저 오늘 잘했어요? 헤헤.]
죽을 때도 안됐는데 어릴 때의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우리 집은 가난했지만 나름 행복하게 지냈고 먹고싶은 것은 마음껏 먹지 못했지만 그랬기에 가끔 먹는 피자가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꿈은 대부분-
[요 꼬맹이가 말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하네.] [저기, 저기 저 남자애 잡아!] [해인아, 진짜 마지막이야. 진짜 마지막이니까, 응?]
눈이 번쩍 뜨인다. 어제도 그렇고 계속 비슷한 꿈만 꾸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최근에 말을 너무 많이 한걸까. 조절할 수 없는 재능이라는 것은 족쇄나 마찬가지다. 이런 재능을 갖지 못해 부러워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가지지 못한 자는 가진자를 마냥 부러워하는 법이니까. 하지만 피로는 쉽사리 나가 떨어질 생각이 없는지 내 눈꺼풀을 살살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다. 이번엔 선잠이 아니라, 깊고도 깊은 잠에.
"아..하늘? 조..좋은 이름이네..! 2학년 1반이면 내 반이랑 반대쪽에 있는 반이고.."
홍현도 말을 어렵사리 놓으며 내심 테스트를 받길 바라며 기대했다. 그리고 탁자로 다가가 앉으며 테스트에 응하겠다는 하늘의 대답을 듣자 홍현의 얼굴은 밝아졌다.
홍현은 마치 점프라도 뛰고 싶은 기분이었다. 홍현이 이렇게 좋아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종합 비타민제를 만들고 맛을 보게 했지만 그건 다 합쳐서 10명도 안되는 부원들과 친구 몇명에게 권해본게 전부였고,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모집하기에는 내성적이고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홍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홍현은 빠르게 컵을 꺼낸 뒤 물을 따라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내..내가 직접 만든거야. 아직 내가 만드는건 기초 수준에 불과하지만 어렵긴 정말 어렵더라고..! 하지만 만들다 보면 너..너무 재밌어서 머리가 터질 것 같아도 좋아!"
그렇게 잠깐 미소를 짓던 홍현은 정신을 차리고 한쪽 구석에 있던 평가지와 펜을 가지러가며 손떨림에 대한 답을 했다.
"그..그리고 부작용은 확실히 없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을거야..! 우리도 가루로 된 약재들을 혼합하다 보니 손떨림 만큼 치명적인게 어..없거든!"
빈 평가지를 찾던 홍현은 안심을 주기 위해 잠시 뒤돌아 미소를 지어주었다. 그런 후 펜과 함께 빈 평가지를 가져왔다. 평가지는 상당히 간결했다. 이름과 반/번호를 쓰는 칸, 그리고 단맛, 신맛, 짠맛, 쓴맛, 감칠맛 다섯가지 맛이 어느정도인지를 5단계로 나타내는 선택지가 전부였다.
"이건 효과보단 맛을 평가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돼. 조..종합영양제이자 발포형 알약을 겸하고 있으니까..!"
가벼운 발걸음으로 가던 홍현은 기쁨에 살짝 흥분한 것 같았다. 종합영양제를 가지러 가며 자신의 상태를 자각한 홍현은 진정하기로 했다. 밀폐된 원형 플라스틱 통을 연 홍현은 그 안에서 쏟아지지 않게 조심히 기울여 종합영양제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주위에 물이 튀지 않게 조심히 분홍색 종합영양제를 컵에 떨어뜨렸다. 종합영양제는 빠르게 녹아 물에 뒤섞였다. 종합영양제가 섞인 물은 마치 딸기우유에 물을 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종합영양제의 맛은 적당히 달지만 쓴맛도 느껴지고 신맛도 뒤섞인 맛이에요. 거기에 특이한 짠맛도 조금 느껴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