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7 저번에 잠깐 얘기 나눈거에서 생각난건데, 슬혜는 요리부니까 해인이가 학생회 회의 같은 곳에서 먹을 간식 같은걸 부탁한다던가! 음료수 보관을 부탁한다던가 ... 하는 사이 어떨까요! 그리고 본가도 근처에 있다고 했으니 해인이 편의점에서 볼 것 같기도 하고! >:3
원래 하늘은 동아리와는 전혀 관련 없는 학창생활을 보냈으나 오늘은 예외였다. 알고 지내는 친구 중 하나가 바쁜 일이 있으니까 가방만 조금 갖다놓아달라고 했기에 그는 친구의 가방을 들고서 동아리실로 향했다. 그러니까 그 친구 동아리가.. 동아리를 하나하나 돌아보다 그가 멈춘 곳은 약학부라는 곳이었다.
"의대 가려는 애들이 모이는 곳인가. 여긴."
아무도 듣지 못할 혼잣말을 작게 중얼거리는 것과 동시에 이런 동아리도 있다는 것에 정말 신기함을 느끼며 하늘은 가만히 숨을 내쉬었다. 노크하고 들어가면 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하늘은 동아리실의 문을 가볍게 노크했다.
"실례합니다. 안에 있나요?"
문을 바로 열고 들어가기보다는 역시 안의 허락을 받아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며 하늘은 일단 안에서 대답이 나오는 것을 기다렸다. 대답이 전혀 없다면 조심스럽게 문을 열어보기야 하겠지만, 적어도 15분 정도는 기다린 후에 그렇게 행동을 할 예정일 정도로 우선 그는 안의 반응에 좀 더 집중했다.
홍현은 혼자 동아리실에서 조심스럽게 약재들을 혼합하고 있었다. 오늘 치의 동아리 실습은 이미 끝난지 오래였지만 직접 약을 만들 수 있는 기회는 그렇게 자주 오지 않았기 때문에 홍현 혼자 남아 있는 일은 늘 있는 일이었다. 혼합 과정은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고, 홍현은 마지막으로 저울에 정확히 재본 다른 혼합 가루를 조심스레 떠서 부으려던 참이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가볍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함께 안에 누가 있는지 찾는 소리도 들렸다. 홍현은 깜짝 놀라 약 숟가락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리고 놀란 자신이 가루를 엎진 않은건가 확인했다. 다행히도 가루는 멀쩡히 그 자리에 있었다. 홍현은 약 숟가락을 놓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나늘의 때 아닌 장난에 그는 웃었다. 아니, 웃은 게 맞나? 저건 비웃음에 가깝나? 키도 한참 작은 게 우스꽝스러운 모양새긴 했다. 알게뭐람. 어쨌든 그녀는 선생이었으니까. 그리고 학창시절 중 난해한 선생을 보는 것도 추억 속 별미지. 어쨌든 그녀는 국가에서 인정한 어른이었기 때문에 꿇릴 게 없었다. 그녀를 가르치고 타박할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이 학교에선. 그래서 나늘은 자신을 우습게 여기고 있는 듯한 학생의 반응을 가늘게 휘어있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장난은 고작 몇 번으론 그치지 않았고, 그녀를 거친 학생들의 수많은 반응을 봐왔으니 뭐든 넘길 수 있었다. 아마도 지금까지는. 나늘은 어쨌거나 사람 좋은 눈꼬리를 짓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사근하게 여길 사람도 있겠지만 그보단 사람을 홀리고 삼켜 먹어 버리는 여우나 뱀 종류에 더 가까웠지 않을까. 그리고 그 순간 우동의 싱거운 웃음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흐린다. 진짜 웃네. 나름 참으려곤 한 것 같은데 노력까진 아니었고, 이 정도면 대놓고겠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장단에 맞춰 줄 고민이라도 하는 걸까. 아니면 내가 너무 귀여워서? 그건 좀 건방지니 아닐테고.
림보를 하랬으니 그것에 응한다면 몸을 뒤로 숙여 꽤나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연출된다. 게다가 그 대상이 키나 덩치가 크다면 더. 그래서인지도 모르지. 순순히 장단에 맞춰주는 듯한 모습을 보며 해사하게 방긋 웃는 나늘의 얼굴은 천진해 보였다. 언뜻 비쳐 보이는 뾰족한 송곳니까지 더해서. 학생들은 순진하니까 이렇게 의문을 가지면서도 순순히 따라주는 모습은 꽤... 거기까지 감상했을 때 갑작스러운 낯선 촉감에 나늘의 눈이 크게 깜박였다. 그녀의 말캉한 뺨은 그의 손끝에 잡혀 있었고 잠깐 의아한 듯한 얼굴로 뭐? 입을 벌리고 고개를 얕게 갸웃거리자 그것을 주욱 늘려버리는 그가 눈앞에 있었다. 나늘은 잠깐 표정을 깜짝 찡그리며 동작을 따라가다 놓인 것에 고개를 들어 그를 빤히 응시할 뿐이었다. 무언가 화를 낸다기보다는 그저 말없이 깜박, 쳐다보았다. 한가지 그가 성공한 게 있다면 그녀가 팔을 뻗은 쪽의 볼을 그가 건드렸기 때문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뻗었던 팔을 거두고 훔쳐진 볼을 쓰다듬고 있었다. 허들은 무너졌다. 얘 좀 봐. 보기보다 당돌하네.
"그래서 가뿐히 넘었니?"
재밌네. 다음엔 더 높이 준비할까. 당한 것에 어이가 없는지 그녀는 틈새로 실소를 흘리다 흘러내린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그에게서 몸을 돌렸다. 그냥 단순히 넘어갈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그의 말대로 낮은 허들은 사라지고 없다. 어쩌면 흥미를 잃었을지도. 그의 속사정을 알 리가 만무한 그 선생은 그를 뒤로 한 채 양호실의 안쪽으로 들어가 책상 위에 놓여져 있는 차트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마주했을 때 얻은 명찰의 정보를 빈칸에 대충 휘갈겨 적다, 아직까지도 밖에 덩그러니 서있는 듯한 그를 뒤돌아보며 웃음은 온데간데 없는 나른한 얼굴로 고개를 삐딱인다.
"계속 거기 서있을 거야?"
상관은 없지만 목소리를 소란스럽게 주고 받고 싶진 않아서. 볼펜을 입가에 툭툭 가져다대며 그가 이곳에 찾아온 목적을 해결하길 바랬다. 또 언제 변덕을 부릴진 모를 일이지만. 어쨌든 지금 나늘은 얌전해 보였다. 그리고 나른하게 하품을 했던가.
"어디가 고장났니."
나늘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상냥한 것 같다고 착각하고 있다. 그런 얼굴은 무해해 보였으니 다른 딱딱한 감정이 담길 틈은 없다.
다행히 안에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기에 하늘은 더 기다릴 필요가 없다는 것에 안도했다. 사람이 없다면 정말 어쩔 수 없이 강제로 들어가거나, 혹은 가방을 이 앞에 내려놓고 갈 수밖에 없었을테니까. 일단 안의 사람에게 용건을 말하고 들어가서 가방을 놓으면 되겠지. 계산을 마치며 하늘은 들려오는 목소리에 이어 대답했다.
"별 건 아니고 친구가 동아리실 안에 가방을 좀 놓아달라고 해서요. 괜찮으면 안에 들어가도 될까요? 들어가면 안되면 가방만 가지고 안에 놓아주셨으면 좋겠는데."
약학부라고 하니, 어쩌면 들어가기 힘든 상황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를테면 자신 역시 피아노 연습을 할 때 누군가가 함부로 들어오는 것은 꺼렸으니까. 일단 모든 것은 안의 대답에서 이어지는 일이었으니 그는 두 걸음 정도 물러서서 문과 거리를 두었다.
"혹시 약 관련으로 뭐하는 중이라서 곤란하면, 바로 앞에 가방 놓아놓고 갈게요. 그것만 나중에 챙겨주시겠어요?"
선택지 세 개 중 어느 것이 선택되어도 크게 상관없는일인만큼, 다시 한 번 하늘은 안의 사람의 대답을 기다렸다.
가방을 놓는다는 말에 홍현은 가방을 놓는 자리 중 한곳이 비어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옅은 웃음을 띠었다. 아마 실수로 여기에 놓지 않고 자신의 책가방과 함께 들고나간 모양이겠지.
바깥에 있는 사람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할까, 홍현이 자주 부끄러움을 느끼긴 했고 원래였다면 가방만 놓고 가달라고 말했겠지만 여기선 좀 달랐다. 자신과 함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약재들이 있었다. 자신의 친구와도 같은 약재들에 둘러쌓여있으니 홍현의 자신감을 끌어올려 주는 것 같았다. 그리고 들어와도 딱히 방해될 것 같지는 않았기에 들여보내도 괜찮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거기에 생각해 보니 아까 새롭게 만들었던 종합 영양제에 대한 평가를 부탁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