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삭이는 바람과 미소짓는 꽃, 책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한번쯤은 마주쳤을법한 흔한 비유다. 흔해빠진 글토막은 그 장을 덮어내리는 순간 미련없이 곁을 떠나간다. 당연한 일이다. 보이지 않고 느낄수 없을테니.
나는 하나둘씩 떨어지는 초침을 주워다 엎어버렸다. 이게 벌써 몇번째인지 책상 모퉁이에 펜을 대보지만, 금세 잊었다. 의미없는 행동을 읊조리던 흔적은 이미 새카매졌다. 지우개가 까만 자리를 훑고 지나가면, 뭉친 가루는 파스스 한무리의 새가 되어 교실 천장으로 피어오른다. 조막만한 것들이 경망스러운 날갯짓을 펼쳐 창백한 손길에 붙들린 펜이며 고요함에 익숙해진 귀를 예민하게 괴롭혀온다. 물론 아는 체하려 들지 않았다. 짓궂은 공상은 금세 거짓말처럼 허공에 자취를 감추어버리고 말테니. 오히려 신경이 쓰이는 것은 다른쪽에 있었다. 빈손을 옆으로 뻗자 옷깃 사이로 가려진 작은 패치가 손가락 끝에 닿는다. 때이른 반창고는 다 부질없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조심스레 떼어냈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는 펜이 머문 붉은 자국이 남았다. 시끌벅적한 세상이 다시 잠들고 고개를 돌리면, 무채색을 입힌 교실이 나를 반긴다. 가지런히 놓인 책상과 의자, 구석에는 오늘 청소 당번이 몰래 숨겨놓은 먼지덩어리가 수줍게 몸을 감추고 있었다. 돌아갈 시간이 되었다. 활짝 열린 교실 문 근처에서 껍데기만 앙상한 가방을 들어올렸다. 덩그러니 놓인 책에는 필기체로 휘갈겨 적은 글씨가 수두룩했다. 고집스런 글씨들이 강한 주장을 펼치기 전에 얼른 책장을 덮어야했다. 잠시라도 방심하는 순간 청개구리 같은 속삭임은 나를 순식간에 잠겨온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달래기 위해 가끔씩은 약이 필요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자주 그랬다. 조심스러운 노크소리가 양호실 문가에 닿는다.
"들어가도 될까요? 선생님.."
소극적인 손짓 다음으로 작은 목소리가 뒤따른다. 들어와도 좋다는 형식적인 대답이 들려온다면 허리를 숙여 안으로 들어설테고, 늘 그랬듯이 머뭇거리는 말투로 머리가 아프다는 둥 말을 우물대겠지. 뻔한 레파토리가 머릿속에 자연스레 그려졌다.
머리를 들이미는 것을 보면 영락없는 고양이 같은데. 하지만 사라도 늑대 같을때는 분명 있으니까 고양이의 탈을 쓴 늑대라고 하자. ... 지금은 늑대 옷을 입은 고양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어보이지만. 복채를 안받으니까 소원도 랜덤으로 들어주는건가. 쪽지 중에 몇개 줏어서 이번년도엔 이거다! 싶은거지. 뭐 어찌됐던 그건 여기에 눌러앉아 사시는 신님이 결정할 일이다. 제비뽑기던 선착순이던 별로 관심은 없으니까.
" 너한테 득이 되는 소원이 아닐까? "
진담인지 농담인지 모를 표정으로 말을 하고서는 교문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는 날이니까 밀린 집안일을 좀 해놓고, 장이라도 봐둘까하는 생각을 하고 있으니 옆에서 정말 사악한 기운이 담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허어, 아직도 포기 못했다 이 말이야?
" 이럴때만 오빠지 아주 그냥. 안먹어! 안먹는다고! 어제 그거 먹은 손님 얼굴이 어땠는지 알아? "
강렬한 거부 의사를 표현하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내가 지고선 한입 먹어보게 되겠지. 하지만 그런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가는 내내 편의점에 존재하는 다양한 괴식들로 인해 고통을 받을건 교문을 막 나서고 조금을 더 걸어갔을 때의 이야기. 그래도 잠시나마 상념을 모두 잊고서 즐겁게 걸을 수 있었던 몇 안되는 날이다.
>>173 오자마자 바로 이렇게 질문을 던져주다니. 그렇다면 신입으로서 당당하게 답할 수밖에 없겠지! 하늘이는 그냥 평범하게 잠옷 파자마를 입고 자고 있어. 색은 푸른색 계열을 주로 하지만 하늘색만큼은 피해. 이유는 별 거 없고 어릴 때 하늘색 파자마를 입었다가 살짝 이름 관련으로 친척들에게 놀림받은 적이 있어서 그때 이후로는 하늘색 계통은 피하는 그런게 있어.
아이의 머뭇거리는 자그만 목소리가 문을 넘겨 들어온다. 그 바깥에서 대답을 기다리며 우물쭈물 기다리고 있을 아이의 모습이 그려지고, 그녀는 따분함이 가득 담긴 얼굴로 눈을 데구륵 굴리며 저 뻔한 질문에 구태여 입을 열어야 하는걸까 하는 꽤 사나운 생각을 하고 있다. 보아하니 대답을 계속 내주지 않거나 '아니' 같은 심술진 말을 내놓으면 금방 풀이 죽고 돌아가겠거니. 나늘은 초를 세었다. 분명 속으로 세었으니 그게 과연 몇초까지 였을지는 그녀밖에 모르겠다. 하지만 그럼에도 별다른 발소리는 나지 않고, 숨죽여 있을 학생이 문 뒤에 서있는 것은 여전했다. 나늘은 그를 쫓을 생각이 없었다. 얼굴을 덮었던 두꺼운 책을 창가에 도로 내려두고 흘러 내린 앞머리를 뒤로 쓸어넘기며 붕 떠있던 그녀의 발이 바닥에 닿았다. 변덕일 뿐이다.
"안녕, 학생."
답답한 것은 참을 수 없었다. 나늘은 문가로 또각거리는 굽소리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가 문을 열기도 전에, 그리고 질문에 대한 응답을 하기도 전에 멋대로 문을 큰 소리가 나게 벌컥 열고서 상냥하게 휘어진 눈꼬리로 그를 다짜고짜 맞이하며 문틈에 기댄 팔꿈치를 머리 위로 들고 기대었다. 생각외로 꽤 올려다보아야 하는 점이 거슬렸지만 짜증을 낼 정도는 아니다. 나는 어른이니까.
"다치진 않았고, 마음이 아픈가?"
싱글싱글 웃어대며 여전히 우동을 안으로 들일 생각은 없는지 그 자리에서 능청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근처에 지나가는 선생이 본다면 까무러칠 것도 같았지만 그녀가 평범하지 않다는 것은 익히 들었을 테다. 나늘은 따분했으니까. 평범하고 시시한 일상은 주인공에게 걸맞지 않다. 그녀는 주인공이 될 생각도, 될 수도 없겠지만. 따분한 걸.
"들어갈까?"
들어가고 싶어? 나늘은 고개를 기울이며 팔꿈치로 옆문틈에 기대었던 곳에 어느새 손을 짚고 팔을 쭉 뻗었다. 당연한 질문을 하는 이 이상한 양호 선생을 당신이 감당할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다른 곳과 다르게 양호실은 목적이 있으니 찾아오는 곳이잖아? 그러니 퀘스트가 주어져도 가뿐히 깰 줄 알아야지. 주인공이라면. (무)해한 그녀의 얼굴엔 웃음꽃이 피어있다.
"림보로 통과하면 특별히 들여보내 줄게."
나늘의 소문은 그래, 뻔하지만 정확했다. '또라이' 정도였을까. 나늘은 소리내어 하하, 웃으며 20cm 이상은 차이날 것 같은 키차이도 무시하고. 양호실의 입구를 가로 막은 채 팔을 뻗어 낸 조그만 공간으로 괴상한 요구나 하는 것이다. 글쎄, 갑자기 이러는 이유는 앞전의 여러 복합적인 게 섞이지 않았을까? 응? 너는 어떡할거니? 별안간 이 정도는 통과해주면 좋겠네. 양호실이잖아? 그것도 내가 있는. 나늘의 얼굴에 따분함이 사라지고 서늘한 웃음꽃이 만개한다.